연희전문과 세브란스의 항일투쟁 역사

1800년대 후반, 한국인이 설립한 사립학교가 크게 늘어나자 일제는 식민지 교육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1908년 「사립학교령」을 제정했다. 이후 일제는 1911년 사립학교규칙을 공포해 당시 민족교육을 실시했던 사립학교와 종교계 학교를 규제하기 시작했다. 1885년 설립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아래 세브란스의전)와 1915년 개교한 연희전문학교(아래 연희전문) 역시 일제강점 하에서 수난을 겪었지만, 기독교 정신과 민족주의에 입각한 연세의 창립 정신은 일제강점기에 빛을 발했다.

▲ 3·1운동 당시 연희전문 학생들을 주도적으로 참여시켰던 연희전문 김원벽의 졸업사진

3·1운동에 앞장선 연세인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모든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민족자결주의 정신이 전 세계로 확산됐다. 우리나라에서도 해방과 독립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3·1운동이 발발했고, 여기에 세브란스의전과 연희전문의 구성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은 당시 세브란스병원 구내 약제실에서 주임으로 일하고 있었다. 세브란스의전에는 캐나다에서 온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 교수도 있었다. 당시 세브란스의전 세균학과 위생학 교수였던 스코필드는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행위로 일어난 수원 제암리 참변을 사진에 담아 전 세계에 알렸던 인물이다. 이갑성은 수시로 스코필드와 연락을 취하며 3·1운동을 준비했다.
세브란스의전의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세브란스의전 교남학생친목회 회장이었던 배동석은 세브란스의전 학생들을 3·1운동에 참여시키는 데 앞장섰던 것으로 전해진다. 배동석과 함께 학생 조직을 담당했던 세브란스의전의 김문진과 이용설은 「독립신문」을 발행해 각지에서 일어난 시위 소식, 파리평화회의 등의 소식을 알렸다. 「독립신문」은 당시 세브란스병원 외래진료소에 있는 사진실 암실에서 밤마다 수백 매씩 인쇄됐고, 시내와 지방으로 발송됐다.
연희전문 학생들의 독립운동은 당시 재학 중이었던 김원벽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한국독립운동사』에 따르면 ‘서울 탑동공원에 학생 4, 5천명이 모였으니 이는 미리부터 조선민족 대표와 기맥을 상통하던 연희전문 김원벽 등의 지휘에 의해 독립선언식에 참가한 것이다’라고 전해진다. 당시 연희전문은 1919년 3월에 제1회 졸업생 22명을 배출할 예정이었지만, 3·1운동이 벌어지며 많은 재학생이 검거되거나 각지로 흩어져 폐교 상태에 이르기도 했다.

학생운동단체의 조직과 활동

1920년대에는 3·1운동의 여파로 학생들의 항일민족운동이 보다 체계적으로 발전된 양상을 띠게 된다. 여기에 연세 학생들 또한 앞장서서 활약했다. 1920년 5월, 연희전문의 김윤경과 세브란스의전의 김찬두가 각각 회장과 부회장을 맡았던 ‘조선학생대회’는 조선 학생 대중의 친목과 단결, 조선물산 장려 등을 목적으로 활동했다. 조선학생대회는 전국 약 2만 명의 회원을 가진 큰 조직으로 발전했지만, 규모가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우려한 일제의 방해로 인해 무력해지고 말았다.
학생들은 이를 대신할 학생자치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1922년 물산장려운동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자작회’의 경우 연희전문의 염태진과 박태화가 주도했던 단체다. 또한 1924년에 조직된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연희전문의 이병립이 중요 인물로 참여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사회과학 연구와 조선학생들이 당면한 문제 해결 등을 목표로 활동했고, 이후 1926년 6·10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6·10 만세운동은 우리대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다. 연희전문의 이병립과 박하균의 경우 격문 수만 매와 태극기 200여장을 제작하는 등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6·10 만세운동으로 인해 검속된 83명의 학생 중 연희전문과 세브란스의전의 학생이 37명이었다. 이후 1929년 11월에 일어났던 광주학생사건에 대해서는 일제의 탄압에 항의하기 위해 연희전문의 전교생 116명이 학생회의 이름으로 동맹 휴교에 들어갔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학교 당국은 학생들의 지적 활동을 돕기 위해 연구실을 갖추고, 그 연구결과를 『연희』 , 『문우』,  『경제연구』 등에 게재했다. 1935년에는 연희전문 문과의 홍이섭, 최영해 등이 주관한 월간지 「연희타임스」가 창간되기도 했다. 정인보 선생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연희타임스」의 창간사는 학문에 힘쓰면서도 진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격려를 전하고 있다. 이처럼 당시의 간행물들은 연희전문 학생들의 학술연구 교양지의 역할 뿐 아니라 일제의 식민정책에 대한 항쟁의 역할도 했다.

일제 말기의 탄압과 해방

비교적 온건했던 일제의 식민정책은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공포 정치의 양상을 띤다. 학교에 대한 압박도 심해지면서 한국어 교육이나 반일감정을 지닌 단체들은 철저히 감시당했다. 1937년 6월, 일본 경찰들이 민족주의자들의 모임인 수양동우회를 습격하고 지식인들을 검거했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백낙준, 이묘묵, 하경덕 교수 등이 연루됐다. 이듬해 9월에는 일제의 탄압정책의 일환인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부교장 유억겸이 사임했고, 최현배 등 민족주의 교수들이 학교에서 추방당했다.
일제는 학생단체에도 사상적인 압박을 가했다. 이에 학생들은 문우회와 상우회, 이학연구회와 같은 학술단체에서 활동하며 소극적인 항일 활동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항일 시인으로 잘 알려진 윤동주 또한 연희전문에 있을 때 문우회에서 활동하며 『문우』지에 「새로운 길」과 같은 시를 게재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가며 문학 활동을 했던 윤동주는 동경대 유학 시절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옥사했다.
일본의 식민정책이 더욱 가혹해지면서 학교 또한 이와 같은 전시체제에 맞춰갔다. 4년제였던 문과와 이과의 수업 기간을 3년으로 단축해 청년들에게 징병제를 실시해 동원했다. 교수들에게는 강의진도예정표를 작성하게 해 총독부의 사찰에 자료로 이용하고 이사회를 해체하기도 했다. 전쟁 종말기에는 연희전문을 경성공업전문학교로, 세브란스의전을 의학전문학교로 개칭하는 등 학교를 재정리했다. 이에 퇴학하거나 도피하는 학생이 늘어 학교 유지가 어려워졌고, 1945년 해방 이후에야 다시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글 정서현 기자
bodowoman@yonsei.ac.kr

<자료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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