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 창학의 역사를 짚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저명한 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 Carr)의 금언이다. 우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현재를 통해 과거를 비춰본다. 우리대학교 창학 역사는 다른 학교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연희’와 ‘세브란스’의 두 학교가 독자적 발전을 거치다 ‘연세’의 이름으로 합쳐지는 과정이었다. 이런 창학 역사에 비춰 현재 우리대학교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를 재고해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는 건 어떨까?

▲ 우리대학교 역사의 시작, 광혜원

광혜원에서 세브란스까지, 의료원 창학사

갑신정변은 우리대학교 창학 역사에 큰 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1884년 12월 4일 급진개화파 인사들은 개화에 소극적이던 명성왕후 외척 일파를 공격했고, 외척 일파의 중심인물 혜상공국 총판 민영익은 중상을 입게 된다. 민영익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이자 의사인 호러스 알렌(Horace N. Allen)의 치료 덕분에 회복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조선에서 서양 의학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게 된다. 평소 민영익을 아끼던 고종은 알렌에 감사를 표하며 1885년 서울 재동에 광혜원이란 이름의 병원을 설립하도록 명한다.
광혜원은 곧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꿨고, 이것이 바로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효시가 된다. 1886년 학생 16명을 선발해 교육활동을 시작한 재중원이 연세대학교 역사의 시작인 셈이다. 이후 캐나다의 의과대학 교수인 올리버 에비슨(Oliver R. Avison)이 제중원을 인계받아 1899년 미국의 실업가이자 자선사업가인 루이스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로부터 기증받은 기금으로 1904년 병원을 신축하며 ‘세브란스’라는 현재의 명칭을 사용하게 된다.
1908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는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했고, 이들은 한국 정부로부터 최초의 의사면허증을 발급받게 된다. 1909년 사립 세브란스의학교, 1913년 사립 세브란스연합의학교, 1917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개명하여 발전하는 듯 보였으나 1942년 큰 고난을 겪게 된다. 일제의 강요로 인해 아사히의학전문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1947년 다시 6년제의 세브란스의과대학의 이름으로 인가를 얻어 6·25 동란 중 거제도와 원주 등지의 피난처에 구호 병원을 설립해 의료사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한편, 간호학교는 1906년 에스더 쉴즈(Esther L. Shields)에 의해 세브란스병원 구내에 설립됐다. 간호학교는 1910년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를 배출했으며 지난 1966년에는 연세대학교 간호대학으로 정식 승격했다.

연희의 이름과 연세의 통합

연세의 또 하나의 뿌리인 연희전문학교(아래 연희전문)는 1915년 설립된 조선기독대학(Chosen Christian College)을 그 모태로 한다. 연희전문은 당시 재한 기독교 선교부의 협력으로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가 조직한 YMCA에서 설립됐다. 그리고 1917년 Chosen Christian College가 연희전문학교로 이름을 개칭하면서 ‘연희’의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당시 우리나라 유일의 전문학교였던 연희전문은 문과, 신과, 상과, 수물과, 응용화학과, 농과를 개설했다. 이후 일제 치하에서도 교육의 중심으로 활약하던 연희전문은 1938년 일제의 일본어, 일본사 교육 강요로 인해 고난을 겪었으며 1944년에는 교명을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고치고 한국인 간부와 교수진을 추방하기에 이른다.
해방 이후 백낙준 등으로 구성된 접수위원회가 미군정으로부터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의 재산권과 운영권을 인수하여 연희전문학교의 명칭을 회복하게 된다. 1946년 당시 교장으로 재임하던 백낙준은 대학준비위원회를 구성했고, 연희전문은 ‘연희대학교’라는 종합대학교로 재출범하게 된다. 1949년은 ‘연세’의 이름에 기념비적인 해다.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예과를 연희대학교에 두게 되면서 두 학교 간 통합의 초석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연희대학교는 6·25동란으로 다시 한 번 위기를 맞게 된다. 전쟁으로 3개월간 임시 휴교를 하고 또 1.4 후퇴 때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서울 수복 이후 연희대학교는 지난 1953년 8월에 이르러서야 환도해 개강하게 된다. ‘연세’라는 명칭은 지난 1957년에 이르러 사용된다. 여러 진통을 겪었지만,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이 통합되며 재단법인 연세대학교가 설립됐고 현재의 온전한 이름이 완성됐다.<관련기사 1735호 6면 ‘한 지붕 두 살림, ‘연’과 ‘세’’>

이상 해방 전후까지의 우리대학교 창학 역사에 대해서 살펴봤듯 ‘연세’의 이름은 여러 변화와 고난 속에서 완성됐다. 130주년을 맞은 올해의 우리대학교는 여전히 하수상한 세월 속에 있다. 하지만 연세는 지금껏 변화에 적응해 왔고 고난을 헤쳐 지금의 위치까지 왔다. 이런 역사를 본받아 지금의 문제를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글 이승학 기자
minor158@yonsei.ac.kr

<자료사진 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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