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1주기, 세월호의 현장을 찾아가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300여 명의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침몰 사고. 세월은 무심히도 흘렀고 어느덧 사고 1주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사고를 수습하느라 분주했던 팽목항과 친구들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단원고, 진상규명을 위해 목소리를 모으던 광화문 농성장. 이곳들은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고 그 모습은 ‘세월호 사고를 잊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표출됐다. 1년이 흐른 지금, 그곳들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팽목항은 아직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1. 진도 팽목항에는 각기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길가에 묶여 있는 리본을 정리하고 있는 진도 조계종의 법전 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스님은 팽목항에 처음 온 기자에게 점차 잊혀져가는 그곳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려줬다.


#2. 항구 옆에 자리잡고 있는 빨간 등대로 가는 길에는 실종자들의 무사생환을 기원하는 현수막과 노란리본이 줄지어 있었다. 지난해에 비해 방문객은 줄었지만 이날도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한 발걸음은 계속되고 있었다.


#3. 항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엔 실종자 가족과 봉사자를 위한 생활공간이 있었다. 그 곳에 설치된 합동분향소에서는 한 여성이 영정사진을 보며 흐느끼고 있었고 옆에 있는 간이 성당에서는 간소하게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4.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점은 사진에 보이는 섬을 지나 배로 1시간 반을 가야 도착할 수 있다. 책상 위에 놓인 묵주와 간식거리들은 실종자를 향한 가족들의 그리움과 무사생환 기원의 간절함을 대변하는 듯했다.


아침 8시, 진도 팽목항(아래 팽목항)으로 떠나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컴컴한 바닷속에 갇힌 가족을 찾아 나섰던 피해자 가족들의 발걸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서울에서 팽목항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 간 기자는 무려 7시간이 걸려 팽목항에 도착했다. 그날의 슬픔에 아랑곳 없이 개나리는 노랗게 꽃봉오리를 피우고 있었다.
수습된 시신들이 뭍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처음으로 만나는 곳이었기에 ‘통곡의 항’으로 불렸던 팽목항. 하지만 현재는 여객선이 드나들고 낚시꾼의 모습이 포착될 정도로 일상의 분위기로 돌아와 있었다. 팽목항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인 것은 등대로 가는 길에 묶인 노란 리본 물결이었다. 1년의 세월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노란 리본은 빛이 바래 있었고 추모 글귀도 점차 흐려져 있었다. 기자는 등대를 향해 걸어가던 중, 진도 조계종 총괄본부장 법전 스님을 만났다. 법전 스님은 팽목항에 온 이유에 대해 “실종자 가족을 격려하려는 의미에서 기도를 드리러 왔다”고 답했다. 이어 법전 스님은 “처음에는 통행이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았지만 계속해서 발길이 줄고 있다”고 점차 한산해지는 팽목항의 모습에 아쉬움을 표했다. 그래도 여전히 슬픔을 나누기 위해 팽목항을 찾아온 일반 방문객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정읍에서 온 김영권(56)씨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세월호 참사는 정치적인 개념보다 사회적 개념으로 다가가야 한다”며 “선체를 인양해 사건을 봉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에서 온 송대석(60)씨도 “아직 아이들이 바닷속에 있으니 빨리 선체 인양을 해 진실을 밝혔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등대 주변에서는 또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현수막과 무사 생환을 기원하는 글귀들을 볼 수 있었다. 한편에는 희생자들의 사진과 하늘나라로 가는 편지함이 놓여 있어 그날의 아픔을 되살렸다. 낮 4시가 되자 분향소 옆 간이성당의 미사가 고요히 진행됐다.
팽목항에서 막차를 타고 슬픔이 가득했던 또 다른 장소, 진도 체육관(아래 체육관)을 찾아갔다. 체육관은 시내에서 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다가 이정표가 없어 쉽게 찾아갈 수 없었다. 피해자 가족들이 떠난 체육관은 고요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서있었던 단상, 피해자 가족들이 머물렀던 공간을 보니 1년 전 아픈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혼란과 통곡으로 가득 찼던 체육관은 이제 고요한 슬픔만 남아있었다.
 


단원고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5. 단원고 2학년 교실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1년 전에 놓인 것으로 보이는 국화 꽃들은 책상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꽃과 함께 올려져 있는 노란 종이학에는 구조를 염원하는 사람들의 희망의 메세지가 담겨 있었다.

#6. 교실 한가운데에는 노란 리본이 달린 화분이 있었다. 리본에는 희생 학생들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노란 리본이 세월호 참사의 기억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했다.


해는 붉은 빛을 뿜으며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그 빛은 유리창을 넘어 단원고 2학년 교실을 비추고 있었다. 붉은 빛 사이로 빛바랜 노란 리본이 시간을 잊은 듯 흔들리고 있었다. 단원고 학생들의 발자취를 따라 2학년 교실이 있던 건물의 2·3층부터 5층의 심리치료센터까지 찾아가 봤다.
현재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은 3·4층에 새로 마련된 2학년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2·3층 교실의 절반은 추모 공간으로 남아있다. 추모 공간은 말 그대로 시간이 멈춰 있었다. 책상마다 학생들의 영정사진과 참사를 애도하는 국화꽃이 놓여있었다. 칠판에는 ‘빨리 돌아오라’는 시민들의 염원을 담은 글귀와, ‘구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추모 공간 앞에는 그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방명록이 남아있었다. 지난 2월 이후로는 방명록 글이 눈에 띄게 줄고 있었다. 단원고 관계자는 “2월까지는 많은 사람이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고 기억하기 위해 방문했지만 그 이후에는 발길이 뜸해졌다”고 전했다.
단원고 3층에도 추모 공간이 마련돼 있었다. ‘지각이다. 빨리 돌아와’라는 선생님의 글귀, ‘5천만 국민을 위해 살아주세요’라는 염원이 담긴 메시지들이 그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교실 책상 위에는 오래돼 보이는 음식들이 있었다. 각종 편의점 음식과 음료수들은 아마 먼저 간 학생들이 생전에 즐겨 먹었던 간식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멈춘 교실과 복도는 슬픔을 느끼게 했다.
2학년 교실을 둘러본 후 3학년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는 교실로 향했다. 교실에는 적게는 2~3명, 많게는 10명 정도의 학생들만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선생님들은 수업에 열중하고 있었고, 학생들도 수업내용을 하나하나를 필기하고 있었지만 교실 곳곳의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단원고 5층에는 심리치료센터가 마련돼 있었다. 경기도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는 이곳은 평일 아침 9시부터 낮 5시까지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들은 누구나 상담 받을 수 있는 곳이다. 단원고 관계자는 “아직 학생들이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벌써 8개월, 광화문 농성장을 찾아가다

#7. 광화문 광장에서 보이는 농성장의 모습이다. 농성장의 천막과 도시의 빌딩들이 대비를 이루고 있다. 농성장에는 계속해서 사망자와 실종자를 추모하듯,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서두르며 뛰어다니는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8. 수많은 사람이 광화문 농성장을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농성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보기 힘들다. 세월호 참사는 사람들에게 점차 잊혀져 가고 있었고, 피해자 가족의 외침은 세상의 소리에 묻혀가고 있었다.

#9. 광화문 농성장에는 세월호 참사의 상징인 노란 리본이 큰 조형물로 설치돼 있었다. 농성장 주변의 노란색들이 시간이 흘러 빛을 잃어갔듯, 이 조형물도 본래의 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10. 농성장의 비닐 천막 안에는 피해자 가족들을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이 머물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실종자를 찾길 염원하는 현수막이 보였다. 여기서 만난 한 유가족은 자식을 위해 8개월째 노숙을 하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활발히 목소리를 내왔던 광화문 농성장(아래 농성장)으로 찾아갔다. 노란 리본으로 물든 농성장에 피해자 가족들이 노숙한 지 어느덧 8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피해자 가족들을 만나러 농성장 비닐 천막을 걷고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천막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인터뷰를 거부했다. 걷었던 비닐 천막의 무게가 언론에 대한 불신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설득 끝에 피해자 가족 중 한 명이 마음을 열고 취재에 응했다. 농성장에서 상주한다는 故오영석군의 아버지, 오병환씨였다. 오씨에게 오군은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안산의 한 중소기업에서 일했다는 오씨는 지난 11월 3일,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기 위해 직장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1주기를 맞은 지금의 심경에 대해 오씨는 “우리는 가족들, 자식들의 죽음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싶은 것뿐”이라며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지금 현실이 통탄스럽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씨의 말처럼 유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진상조사 하나, 그리고 그를 위한 세월호  선체 인양뿐이었다. 그들은 무리한 특별법 제정을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현재 세월호 참사는 이리저리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씨는 “나는 정치를 하나도 모르는 일반적인 서민”이라며 “유가족이 바라는 것을 듣지도 않고 세월호 참사를 정치에 이용하는 상황이 매우 안타깝다”고 대답했다.
농성장의 오른편에는 세월호 인양을 위한 서명운동이 이뤄지고 있었다. 기자는 그 곳에서 서명을 받고 있는 한 자원봉사자를 만났다. 마포구 서교동에서 왔다는 장원희(50)씨는 그날 처음 농성장에 나왔다. 장씨는 “마음이 너무 아파서 피해자 가족들을 돕기로 결심했다”며 “청운동에서 시위를 할 때 피해자 가족들을 위한 도시락을 준비하고 노란 목도리를 떴다”고 말했다. 농성장에 있던 봉사자들은 대부분 마음이 아파 피해자 가족을 돕기 시작했다. 농성장 한복판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에 동참해주세요’라고 외치는 이득열(36)씨. 이씨는 “지난 5월부터 이곳에서 꾸준히 피해자 가족들을 돕고 있다”며 “서명을 하거나 인사를 해주시는 분들이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농성장에선 피해자 가족들이나 봉사자가 아닌 사람들을 찾기 힘들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사람이 찾았던 지난 8월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신호가 바뀌고 많은 사람이 농성장 앞을 지나다녔지만 정작 그곳을 찾는 사람은 적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식었음을 체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농성장에서 만난 한양대 강태교(행정·12)씨는 “광화문에 온 김에 생각이 나, 발이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며 “1년이 지나도 여전히 농성을 하는 모습을 보니 울컥했다”고 대답했다.

참사 후 1년이 지나 찾아간 팽목항과 단원고, 그리고 광화문 농성장. 이 세 곳은 세월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던 곳이다. 하지만 현재는 참사가 잊혀지는 것을 반영하듯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진 상태였다. 아직 세월호 참사를 잊기에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다. 9명의 실종자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정치적 갈등으로 참사의 진상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다시 찾아온 봄날의 개나리처럼, 빛바랜 노란 리본이 샛노랗게 피어나길 희망한다.

 
 

 글 사진 고석현 기자 @shk920211
신준혁 기자 @jhshin0930
오지혜 기자 @dolmengemail
박상용 기자 @doubledra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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