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화는 어디에? 김동리 『무녀도』의 모화를 찾아가다.

뒤에 물러 누운 어둑어둑한 산, 앞으로 폭이 넓게 흐르는 검은 강물, 산마루로 들판으로 검은 강물 위로 모두 쏟아져 내릴 듯한 파아란 별들, 바야흐로 숨이 고비에 찬 이슥한 밤중이었다. 강가 모랫벌엔 큰 차일을 치고, 차일 속엔 마을 여인들이 자욱이 앉아 무당의 시나위 가락에 취해 있다. 그녀들의 얼굴들은 분명히 슬픈 흥분과 새벽이 가까워 온 듯한 피곤에 젖어 있다. 무당은 바야흐로 청승에 자지러져 뼈도 살도 없는 혼령으로 화한 듯 가벼이 쾌잣자락을 날리며 돌아간다 …….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에 등장하는 ‘무녀도’의 모습이다. 봄이 성큼 다가온 3월 중순, 기자는 무녀도의 아름다움에 반해 경주로 향했다. 『무녀도』는 개화기에 발생한 모자간의 갈등을 그린 소설로 어머니 모화는 토속 종교를 믿는 무당, 아들 욱이는 기독교 신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인 개화기 시대에는 외래 종교가 들어오면서 토속 종교와 많은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특히 작가 김동리는 외래문화에 의해 토속문화가 어떻게 파괴되어 가는지를 소설 속에서 보여주려 했다.
어둑어둑한 산, 흐르는 검은 강물, 쏟아져 내릴 듯한 파아란 별을 담고 있는 도시 경주. 그곳에서 모화는 가벼이 쾌잣자락을 날리며 오늘도 어김없이 시나위 가락에 취해 있다. ‘무녀도’의 모화를 만나기 위해 4시간을 달린 끝에 기자는 경주 버스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여정을 시작한 경주시외버스터미널


허물어가는 모화의 기와집, 지금의 경주 읍성


기자는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경주 읍성에 가기 위해 발걸음을 뗐다. 5분 정도 걸었을까. 기자에겐 너무 낯선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콘크리트식 건물들 사이로 담백하면서도 웅장한 신라 시대 고분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들 사이로 천마총이 은은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현대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 그 둘은 서로 전혀 다르면서도 조화로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경주를 돌아다니는 내내 도시 곳곳에서 이런 풍경을 접할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 바로 경주였다.
15분 정도를 걷자 경주 읍성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긴 세월을 견디면서 경주 읍성은 사실상 외관 일부와 그 터만 남아 있다. 읍성은 허물어지고 남은 외벽 일부와 기와집 몇 채만이 앙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모화가 있었다면 저런 무너져가는 기와집에서 살고 있진 않았을까? 기자는 모화의 집을 떠올렸다.


이 마을 한구석에 모화(毛)라는 무당이 살고 있었다. 모화서 들어온 사람이라 하여 모화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머리 찌그러져 가는 묵은 기와집으로 지붕 위에는 기와버섯이 퍼렇게 뻗어 올라 역한 흙냄새를 풍기고 집 주위는 앙상한 돌담이 군데군데 헐리인 채 옛성처럼 꼬불꼬불 에워싸고 있었다.

▲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경주 읍성


경주 읍성은 고려 우왕 이전 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당시 번영했던 경주의 모습을 잘 나타냈다고 한다. 경주 읍성은 경주시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성이 대부분 헐렸다. 한때 번영을 상징하던 웅장한 읍성, 지금은 얼마 남지 않은 외벽만이 모화의 집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기자는 초라한 모화의 집을 떠올리니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았다.


모화의 한이 서린 성건동을 찾다


경주읍에서 성 밖으로 오 리쯤 나가서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여민촌 혹은 잡성촌이라 불리어지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 한구석에 모화라는 무당이 살고 있었다.

▲ 보존되지 않은 김동리 생가 터의 모습


책의 구절만으로 기자는 모화의 집을 찾아 나섰다. 경주 읍성에서 오 리쯤 나간다면, 대략 2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기자는 모화의 집을 찾기 위해 무작정 성건동으로 향했다. 성건동은 『무녀도』의 작가 김동리가 살던 마을이다. 평소 김동리는 자신이 살던 주변 마을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장장 20분 정도를 걸었을까. 김동리 생가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눈앞에 나타났다. 기자는 모화와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설렘을 안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표지판은 기자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김동리 생가는 1960년대 이후 경주의 급속한 산업화 과정 속에서 사라졌고, 이후 콘크리트 집들이 들어서 현재 세 집이 김동리 생가 터를 나누어 사용하고 있었다.
기자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소설 속 모화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모화는 물밀듯이 들어오는 근대적·서구적 문물들을 보면서 기자가 이 자리에서 느낀 마음과 조금은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눈앞에서 자신이 믿어온 토속 종교가 외면당하는 것을 지켜보던 모화는 결국 접신에 이르러 욱이의 죽음을 불렀고, 결국 모화도 시대적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채 강물 속 한 송이 꽃이 됐다. 기자의 마음속에 잠시 동안 모화와 욱이의 모습이 그림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기자는 경주제일교회로 향했다. 경주제일교회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소설 속의 교회는 모화가 가장 증오했던 곳이자 모화와 욱이가 본격적으로 갈등을 빚기 시작한 곳이다. 1902년, 즉 개화기에 세워진 경주제일교회는 소설 속 교회와 가장 근접하는 교회였다. 기자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경주제일교회에 도착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마치고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일요일이라 신자의 수가 정말 많았다.


모화는 픽 웃곤 했다. “그까짓 잡귀신들.” 했다. 그러나 그들의 비방과 저주는 뼛골에 사무치는 듯 그녀는 징을 울리고 꽹과리를 치며 외쳤다. … (중략) … 그러나 ‘예수귀신’들은 결코 물러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점점 늘어만 갔다. 게다가 옛날 모화에게 굿과 푸닥거리를 빌러 다니던 사람들까지 예수귀신이 들기 시작하였다.


▲ 하늘 높이 솟아있는 경주제일교회의 첨탑


모화는 늘어가는 ‘예수귀신’들을 증오했다. 모화는 예수귀신을 쫒기 위해 교회 앞에서 굿을 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지만 모화의 노력에도 예수귀신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기자가 본 교회를 나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도 모화의 눈에는 예수귀신처럼 보였을 것이다. 모화가 증오했던 교회의 첨탑은 모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 높이 솟아있었다.


한 송이의 꽃으로 남다, 애기청소(沼)


이러할 즈음에 모화의 마지막 굿이 열린다는 소문이 났다. 읍내 어느 부잣집 며느리가 ‘예기소’에 몸을 던진 것이었다. 그래 모화는 비단 옷 두 벌을 받고 특별히 굿을 응낙했다는 말도 났다. … (중략) … 굿이 열린 백사장 서북쪽으로는 검푸른 소 물이 깊은 비밀과 원한을 품은 채 조용히 굽이 돌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명주구리 하나 들어간다닌 이 깊은 소에는 해마다 사람이 하나씩 빠져 죽기가 마련이라는 전설이 있다.)


기자는 모화의 마지막 모습을 찾기 위해 예기소의 현재 이름인 애기청소라는 늪으로 향했다. 20분 정도를 걷고 난 후 눈앞에는 아름다운 한 폭의 산수화와 같은 풍경이 나타났다. 따스한 봄 햇살을 받아 맑게 빛나고 있는 애기청소, 그 위를 무심한 듯 내려다보는 금장대의 화려한 자태, 금장대와 애기청소 모두를 품고 있는 넉살 좋은 산까지. 기자는 오랫동안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부잣집 며느리와 모화를 모두 집어삼킨 예기소는 그 비밀과 원한을 감춘 채 조용히, 그리고 맑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잔잔한 물결 위로는 마실 나온 청둥오리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따스한 봄볕이 내리쬐기 시작한 3월 중순. 그 햇볕을 받아 예기소는 아름다운 빛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잔잔한 물결에서 애잔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급작스런 세상의 변화로 인해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던 모화와 욱이. 그 갈등 속에서 모화는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을까. 모화의 아픔, 모화의 한(恨)까지도 모두 품은 애기청소였다.
기자는 애기청소의 모습을 보기 위해 금장대로 향했다. 금장대는 다리 건너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이미 오랜 시간을 걸은 기자에게 산 중턱까지 가는 길만 보아도 숨이 가빠왔다. 그렇게 산 중턱을 넘어 금장대에 도착했다. 금장대는 신라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건립 연도가 전해지지는 않는다. 이후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임진왜란 당시에는 경주 읍성을 탈환하기 위한 본부로, 이후에는 시인 묵객들이 찾는 곳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전후에 사라졌던 금장대는 지난 2012년, 경주 지자체의 노력을 통해 신라시대 건축양식을 바탕으로 복원됐다.
 

▲ 최근 신라시대 건축양식을 바탕으로 복원된 금장대


금장대에서 내려다 본 애기청소는 잔잔하면서도 평온했다. 떠있는 나룻배는 움직임 없이 애기청소의 잔잔함을 만끽하고 있었고, 두 강의 지류가 만나 흐르는 강물은 애기청소의 정취를 보여주고 있었다.
금장대에서 기자는 모화의 딸, 낭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낭이는 어머니 모화가 애기청소에 들어가 죽은 이후 목소리를 되찾았다. 낭이는 눈앞에서 모화가 애기청소의 지류에 휩쓸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답답하고 소리 없는 낭이의 절규가 애기청소 위를, 그리고 내 귀를 스쳐 지나갔다.
 

▲ 금장대 앞을 조용히 흘러내리는 예기소의 모습


금장대 위에서 굿이 이뤄졌던 백사장을 바라보았다. 백사장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경치를 즐기고 있었다. 풀잎가지를 가지고 장난치는 연인들, 무심(無心)히 낚시를 하는 아저씨들. 예전에도, 지금도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백사장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다.


백사장 위에는 수많은 엿장수, 떡장수, 술 가게, 밥 가게들이 포장을 치고 혹은 거적을 두르고 득실거렸고, 그 한복판 큰 차일 속에서 굿은 벌어져 있었다. … (중략) … 냉수 한 그릇만 놓인 모화상과 이밖에도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전물상들이 쭉 늘어놓아져 있었다.

▲ 한바탕 굿이 이루어졌던 예기소 앞 백사장


모화는 어디에도 없었으나 언제나 경주에 있었다


기자는 터미널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기자가 돌아보았던 경주 시내 모화의 흔적 곳곳을 그대로 지나갔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모화가 욱이와 재회하는 순간의 느낌이, 모화가 새로 생긴 교회를 바라보는 기분이 이렇지 않았을까. 신이 들린 모화가 욱이에게 칼을 겨누는 장면은 모화의 한의 정점을 보여줬다. 모화가 애기청소에 몸을 담근 마지막 순간에는 기자가 모화의 흔적 곳곳을 버스 안에서 바라보듯 일생의 순간들이 모화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지 않았을까.
우리는 모든 것을 지킬 수는 없다. 필연적으로 우리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무언가가 우리에게서 저절로 사라지듯 잊어버리도 한다. 경주에서, 모화의 흔적들을 통해 볼 수 있었던 것은 ‘사라지는 것의 아픔’이었다. 욱이의 죽음, 모화의 죽음, 그리고 경주에서 찾아다녔던 사라진 문화유산들까지…. 기자는 이것들을 마음속에 묻고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모화의 몸은 그 넋두리와 함께 물 속에 아주 잠겨져 버렸다. 처음엔 쾌잣자락이 보이더니 그것마저 잠겨 버리고, 넋대만 물 위에 빙빙 돌다가 흘러 내렸다. … (중략) … 다시 열흘이 지났다. 사내는 손으로 나귀를 가리켰다. “…….” 낭이는 잠자코 그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나귀 위에 올라앉았다. 그네들이 떠난 뒤엔 아무도 그 집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고, 밤이면 그 무성한 잡풀 속에서 모기들만이 떼를 지어 미쳐 돌았다.


 

▲ 전통 유적 공원을 찾은 시민들

 

 

 

글 박상용 기자
doubledragon@yonsei.ac.kr
사진 전준호 기자
jeonjh1212@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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