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 서거 70주기를 맞이해 국내외에서 수많은 추모 행사가 열렸다. 시인이 비탄의 펜으로 “남의 나라”라고 쓴 일본 역시 오늘날 윤동주 시인을 함께 추모하고 있다. 햇빛쨍쨍한 지난 2월 16일 낮,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대학을 졸업한 뒤 마지막으로 수학했던 일본 도시샤대에서 시인을 추모하는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1.
지난 2월 14일 열린 ‘윤동주 서거 70주기 추모식 겸 윤동주 시비 건립 20주년 기념식’을 전후로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윤동주 서거 70주년 기념 유품전시전’이 열린 도시샤대 하리스이화학관 전경.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대학 문과를 졸업한 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도시샤 대학 영문학과 학생이었던 윤동주 시인은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돼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2.
전시전에는 윤동주 시인의 친필 시집과 시인이 필사한 폴 발레리의 시집 등이 전시됐다. 도시샤대 윤동주 기념회 박희균 회장은 “연세대학교에서 빌려온 유품들이 전시됐다“고 설명했다. 우리대학교 정명교 교수(문과대·현대문학)는 “오늘날 우리대학교뿐만 아니라 많은 곳에서 윤동주 시인을 기리고 있지만 윤동주의 시세계가 출발한 연세대가 아직까지 추모의 중심에 있다”고 말했다.

 

#3.
도시샤대 오오야 미노루 총장이 인사를 전하고 있다. 미노루 총장은 “어두운 시기가 다시는 오지 않길 바란다”며 “윤동주 시인의 시에 담긴 순수한 기도가 세계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평안함을 주길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도시샤대는 지난 1995년 2월,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윤동주 시비를 건립했다.

 


#4.
찬송가 ‘내 주여 뜻대로’를 부르는 추모객의 모습.
이날 추모식에는 250여 명의 추모객이 모였다. 정명교 교수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더렵혀질 수밖에 없지만, 그 세상속에서 윤동주 시인은  깨끗히 살고자 평생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라는 찬송이 힘겨운 세상속에서 깨끗하게 살고자 괴로워했던 윤동주 시인의 고뇌를 대변하는 듯하다.

 


#5.
‘윤동주 시의 처녀성’을 주제로 고은 시인이 강연을 하고 있다.
고은 시인은 “담배도 펴지 않고, 술도 가끔만 하고, 연애도 안했다고 전해지는 윤동주 시인의 시는 여러모로 처녀성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이날 고은 시인은 “시와 시인을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 시 평론의 대세인데, 윤동주는 시인이 시보다 시답고, 시가 시인보다 시인다워 시와 시인을 따로 생각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6
헌화를 한 뒤 윤동주 시인의 사진을 쓰다듬는 고은 시인.
고은 시인은 앞선 강연에서 윤동주 시인의 「팔복」을 낭독하며 이 시를 “윤동주 시인의 기독교적 신념을 확인할 수 있는 애달픈 시”라고 표현했다. 마태복음 5장 4절에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오”라는 구절이 있다.

팔복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우리가 永遠히 슬퍼할 것이오

 


#7.
추모식과 헌화가 끝난 뒤의 윤동주 시비.
시비에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적혀 있다. 서시는 윤동주 시인이 1941년 11월 20일,  연희전문대학을 졸업하기 전 완성한 시다. 마광수 교수(문과대·국문학)는 『윤동주 연구』에서 「서시」가 “천명(天命)에 따르려 애쓰는 청년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윤동주 시인의 명복을 빈다.

조가은 기자
gaeunch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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