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만 한국 입양인의 아버지 박성철 목사를 만나다

▲ 20만 한국 입양인의 아버지 박성철 목사

요즘 공인회계사 시험 준비를 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다시피 했다. 너도나도 공인회계사 시험을 비롯한 다양한 시험과 취업을 위해 달려야 하는 게 사회의 분위기다. 이렇듯 열심히 달리는 이들의 공통된 목표는 무엇일까. 바로 안정된 직업과 돈일 것이다. 그 목표가 그릇된 것은 아니다. 다만, 만약 그들이 시험에 합격하고 미국에 유학까지 가서 학위를 땄는데 교통사고를 당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면 그들은 무엇을 위해 열심히 달렸던 것일까. 남들이 선호하는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누구보다 먼저 땄지만 선교와 목회에 온 힘을 쏟아 붓고 있는 박성철 목사(경영·59)를 보며 우리가 진정 중요시해야 할 가치와 목표에 대한 고민을 해봤다. 사랑과 베풂을 실천해온 그의 이야기를 지금 소개한다.

우리대학교 1호 CPA 합격자에서 목회자로

지난 1959년 박 목사는 우리대학교에 경영학부생으로 입학했다. 그는 채플 수업을 듣고 정기 연고전에서 아카라카를 목이 쉬도록 외치는 평범한 학생들 중 한 명이었다. 재학 2년 차에 박 목사는 등록번호 290번으로 공인회계사(CPA) 시험에 합격해 이 분야의 선두주자로 나섰다. 박 목사는 “은사였던 송태연 교수가, 내가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첫 제자라며 기뻐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합격 당시를 회상했다. 한편, 1970년대부터 외국인들의 한국 투자가 쇄도함에 따라 신뢰를 더하기 위해서 모든 상장회사는 외부 회계감사를 필수로 받게 됐고 이로써 우리나라에 공인회계사 전성시대가 시작됐다. 그 과정에서 박 목사는 자연스레 외국인 투자자들과 소통하고 영어보고서 작성을 해야 했는데 통역에만 의존해 소통하는 방식에 한계를 느낀 박 목사는 미국 유학을 결정했다. 그렇게 미국 미네소타 대학 경영 대학원에서 MBA 학위를 받고 귀국 시기를 기다리던 때에 박 목사는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박 목사는 “차체가 완전히 찌그러졌지만 기적적으로 몸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며 “구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잊어버렸던 18살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는 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대학교에 들어오기 전, 박 목사의 롤모델은 아프리카에 정착해 환자들을 돌본 슈바이처 박사였다. 박 목사는 이전에 한 부흥회에서 사람들 앞에 나서서 ‘아프리카까지 갈 수는 없겠지만 우리나라의 소외당한 지역으로 가 의술을 펼치는 것이 꿈이다’라고 당당히 밝힌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꿈을 잠시 잊고 돈을 벌 생각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먼 타지에서 믿기 어려운 사고를 당한 것이다. 박 목사는 구조되기 전, 마태복음 6장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는 성경 구절과 죽으면 백만장자의 꿈이 다 무슨 소용이냐는 생생한 음성을 들었다. 그는 “비로소 하나님이 생명을 연장해주신 이유를 깨닫고 섬김의 삶을 살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어린 나이가 아니었던 박 목사에게 의술의 길은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내적 치유에 힘쓰는 ‘영적인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시카고 멕코믹 신학대학원에 등록하여 모든 과정을 마치고 목사가 됐다. 이렇게 박 목사는 천금을 벌수도 있는 회계학도에서 봉사하는 삶을 사는 목회자로 탈바꿈했다.

‘한국 입양인’을 돕기 시작하다

‘영적인 의사’가 되기로 한 박 목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한국 입양인들의 현실이었다. 한국 입양인이란 주로 미국·유럽 등지로 입양되어 한국인·서양인·입양인이라는 본인의 정체성을 수용하는데 혼란을 겪는 20만여 명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일반인보다 4~5배에 달하는 자살률을 보이는데, 그는 한국 입양인 중 자살한 사람의 수가 덴마크 전체 인구 중 자살한 사람 수보다 많다고 전했다. 박 목사는 어렸을 적 눈여겨봤던 고아의 모습이 이들과 닮았다고 느꼈다. 그는 “저녁에 또래 친구들끼리 놀다가 부모님들이 부르면 다들 집으로 돌아가 밥을 먹었는데 고아였던 아이는 갈 곳이 없어 멍해 있던 모습이 생생하다”며 “한국 입양인들의 모습과 그러한 고아들의 모습이 겹쳐 보여 그들을 친자식처럼 돕기로 했다”고 말했다. 지난 1976년부터 입양인들을 보살피기 시작한 박 목사는 2000년에 서울 동안교회와 협력해 시행한 크리스천 홈스테이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정식 목사로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 프로그램은 박 목사의 제자인 김동호 목사를 만난 이후 지난 2003년에는 3명의 입양인에게 비행기 표, 3주간의 숙박비, 교통비 전액을 마련해주는 ‘Spiritual Journey to Korea and Inner Healing Retreat’(아래 여정)으로 발전했다. 이 여정은 10여 년간 이어져 지금은 서울 동안교회, 향상교회 등을 비롯한 많은 단체와 협력을 통해 매년 진행되고 있다. 박 목사는 “이 프로그램은 지난 60년간 무관심으로 내버려졌던 한국 입양인들에 대한 회개이자 반성이고 20만 명의 새 가족을 얻게 되는 뜻 깊은 일”이라며 프로그램의 의미를 전했다.
박 목사는 프로그램에 수혜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입양인, 다니엘 허 씨를 소개했다. 다니엘 허 씨는 그를 입양한 가정의 부모가 이혼하는 불행을 겪었다. 여러 의붓아버지를 거치며 자란 그는 늘 사랑이 부족했고,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급기야 허 씨는 12살이 되던 때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 후로도 수시로 자살을 생각했던 그는 27살 때 이 프로그램을 추천받았다. 허 씨는 호스트 가족들과 봉사자들의 헌신적인 사랑의 삶을 통해 아가페 사랑을 체험했고 평생 시달려온 우울증에서 벗어났으며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에서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화했다. 허 씨는 “내 경험에 의하면 우울증은 병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외로움에 시달리다 생긴 증상”이라며 “나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 순간 우울증은 치유됐다”고 기쁨을 표현했다.
박 목사는 해외한국입양인선교 센터(아래 KAM 센터)를 통해 이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수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치유사역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는 ▲목회자 상담 ▲입양인 수감자 치유사역 ▲실직이나 부상 등으로 가족 부양이 어렵게 된 입양인들을 돕는 사역 ▲성경탐구 ▲입양인들을 위한 한국기독교 가정 민박 알선 그리고 위에 언급한 ▲여정 등이 있다. 예방사역의 목적으로는 ▲크리스천 멘토 프로그램 ▲구정 잔치 등의 한국문화행사 ▲청소년 크리스천 캠프 ▲10대 입양인들과 가족들의 모임 등이 진행되고 있다.

순탄치만은 않은 봉사 현실

한편, 박 목사는 한국 입양인들을 위한 봉사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우선, 한국 입양인들의 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 자체가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20만 입양인들이 정체성의 혼란을 갖고 살아가는 것을 접할 기회는 많지 않다. 알게 되더라도 이 문제를 양부모들과 미국, 유럽 사회의 책임이라고 치부해버리고 외면해버리기도 한다. 박 목사는 “입양인들이 경제적으로 부유한 서양인들 가정에 입양돼 행복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정체성 혼란으로 겪는 아픈 상처를 알아주고 치유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봉사자들의 문제도 있다. 봉사자와 봉사자끼리, 교회와 교회끼리 합심해서 활동을 더 키워나가고 널리 퍼뜨려야 하는데 자신에게만 내려진 소명이라 여기며 단독으로 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설명이다. 박 목사는 “KAM 센터 또한 많은 교회가 힘을 합한 상태지만 이 센터를 더 발전시킨다는 생각보다는 개인적으로 직접 일하는 것에 더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많아 아쉽다”고 전했다. 또한, 그는 봉사자들의 봉사가 일회성 활동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물론 이러한 일회성 활동 또한 수혜자들에게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장기적으로 마음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박 목사는 봉사자들이 단순한 가르침이나 물질적 지원을 주기 보다는 시간을 길게 두고 한국 입양인을 친자식처럼 따뜻하게 대하며 정서적 교감을 하는 것이 진정한 섬김의 길이라고 말했다. 박 목사는 “미국의 젊은 선교사 언더우드가 연세대학교를 만들고 3~4대에 걸쳐 힘 써왔기에 지금의 연세대학교가 존재하는 것”이라며 “우리대학교의 섬김의 리더십을 많은 동문이 널리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섬김의 삶과 길

종교인으로서, 그리고 봉사인으로서 그가 가진 신념과 삶의 기조에 대한 질문에 박 목사는 요한1서 4장 12절 ‘이제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뤄집니다’라는 성경 구절로 답했다. 해외 20만 명 한국 입양인들이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그의 삶에 가장 중요한 의미이다. 그는 “친정집을 찾아온 딸에게 주는 친정어머니의 사랑처럼 온전히 베푸는 사랑이 내 삶의 길잡이가 됐다”며 “나는 사랑에 빚진 자라 이 사랑의 빚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갚을 수 있을 때 갚으면서 살고 싶다”고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박 목사는 우리대학교 학생들에게도 당부와 조언의 말을 전했다. 우선, 그는 우리대학교 재학 당시 총장에게 들었던 ‘전문인이 되기 전에 먼저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자’는 말을 강조했다. 그는 전공 서적 이외의 도서들도 잘 챙겨 읽어야 진정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말의 의미가 다가온다고 말했다. 이어 박 목사는 “내 손에 든 것이 풍부하지 않더라도 가진 것을 베풀고 도우며 더불어 사는 이웃이 되길 바란다”며 물질보다 사랑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 것을 당부했다. 세 번째 당부로 박 목사는 혈연, 지연, 학연 세 가지를 타파하자는 말을 전했다. 한국 입양인들에게 이 세 가지는 커다란 벽과도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저 벽 속에만 갇혀 다른 인간관계를 배척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한국 입양인들은 혈연과, 지연으로부터 떨어져 삶을 시작하고,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우리나라 대학에 진학하지 못해 소외되고 있다.

한편, 이러한 혈연, 지연, 학연의 타파는 단지 벽 밖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벽 속에 갇혀있는 사람들도 한정된 인간관계와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진정 불쌍한 사람은 마음의 문을 닫고, 벽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박 목사는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사역 등을 통해 이런 방해요소들을 타파해 가려 한다. 그리고 그의 수명이 다할 때 이 희망의 물결이 끝나지 않도록 센터를 세우고 기금을 조성하려 한다. 환갑을 훌쩍 넘은 나이지만 누구보다 열렬히 섬기는 삶의 길을 걷는 박성철 목사의 염원이 이번 세대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 그다음 세대로까지 퍼져나가길 기대해본다.


글 손준영 기자
son113@yonsei.ac.kr

<사진제공 박성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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