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화섭 문학상(희곡분야) 당선작]

 

공저(共著)

 박웅(정외 96)

  - 등장인물 : 작가 / 햄릿 / 메피스토(악마1,2)

- 장소 및 배경 : 작가의 작업실과 분장실, 원작의 배경이 되는 덴마크 궁성과 그 주변

 - 무대 : 무대 오른편으로 작가의 작업실이 존재하여, 의자가 딸린 네모난 책상 위에는 노트북이 놓여 있다. 한편, 무대의 왼편은 분장실로 꾸며져 있고 거울이 달린 탁자 앞에 소품 박스를 준비해 그 안에 필요한 소품들을 담아 두면 된다. 무대의 중앙엔 어느 정도 높이가 있는 원형 무대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별도의 원형 무대는 색채나 질감에 있어 전체 무대와 확연히 다른 느낌이면 좋다. 그리고 극이 시작되는 시점에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가 각각 무대 전면과 후면에 하나씩 놓여 있다. 전면의 의자는 약간 하수 쪽으로 치우치게 배치하고 후면의 의자 역시, 살짝 상수 쪽에 가까워야 한다.

 - 비고 : 악마1과 악마2는 모두 메피스토의 분신이지만 성별이 다를 뿐이다. 여배우가 맡는 악마1과 남자배우가 연기하는 악마2는 상황에 따라 햄릿의 상대역으로 변하기도 한다.

  막이 오르면, 무대 왼편의 분장실에 조명이 들어오고 햄릿은 거울을 보며 분장을 고치고 있다. 잠시 후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듯이 정자세로 앉는 햄릿, 휴대폰을 꺼내어 통화버튼을 누른다.

 신호음과 함께 무대 오른편의 작업실에도 조명이 들어오면, 작가가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노트북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손만 쭉 뻗어 전화를 받는 작가.

햄릿 : 난 준비 다 됐는데, 언제 시작해?

작가 : , 그게 곧 시작할 거야. 조금만.

햄릿 : 그래? 알았어. 그럼, 신호 줘.

 

햄릿이 전화를 끊으면 분장실을 비추던 조명, 사라진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

 

악마1 : 거 봐, 당신은 지금 도움이 필요해. 내가 도와주겠다니까?

 

작가가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면, 하수 쪽의 의자 위로 색조명이 켜진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는 악마1이 장난스런 포즈 - 요가 동작 중이라든가 - 로 앉아 있다.

 

작가 : 그래서? 뭘 어떻게 돕겠다는 거지?

악마2 : 이제껏 얘기했잖아. 날 보내주기만 하면 된다고.

 

상수 쪽의 의자에도 색조명이 떨어지고 악마2 역시, 우스꽝스러운 자세 - 엎드린 채로 슈퍼맨 흉내라든가 - 를 취하고 있다.

 

작가 : 널 보내라? 햄릿에게?

악마1 : (의자에서 내려오며) 그래, 덴마크의 왕자, 햄릿!

악마2 : (작가에게 다가가며) 존귀하고 고결한 영혼의 대명사!

악마1 : 아울러, 지독히도 처절한 비극의 주인공!

악마2 : 지금 당신의 신호만 기다리고 있는 저 햄릿 왕자님에게 날 보내달라는 거야.

작가 :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서성이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악마2 : , 신께서 직접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작가 : ?

악마2 : 한 인간의 운명을 바꾸려 하고 있잖아? 안 그래?

악마1 : 게다가 마음씨 좋은 신이지. 나의 왕자님께는 해피엔딩을 선사해 주고 싶구나. 그런데 이미 예정된 비극을 어찌 하면 멈출 수 있을까? 벌써, 며칠 밤낮을 이리도 고민 중이시니 말이야.

작가 : 좋아, 널 보낸다고 치자. 뭐가 어떻게 달라지는데?

악마1 : 많은 것이 달라지지요, 작가 선생님.

악마2 : 우리 왕자님을 기다리고 있는 불행한 미래에 대한 암시,

악마1 : 중요한 순간이 닥쳤을 때,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조언,

악마2 : , 필요하다면 거래를 해도 좋고.

악마1 : 어쨌든, 전 작가님과 한 뜻이니까요.

작가 :  그래, 어쩌면 괜찮은 생각일 수도 있어. 그런데 햄릿에게 악마를 보낸다라

악마1 : 혹시 두려운 거야?

작가 : ?

악마2 : 햄릿, 비극적 결말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성공! 대신, 악마의 꼬임에 빠져 저속하고 비열한 속물로 타락! 그게 두려운 거냐고?

악마1 : 만약 그렇다면 실망인데? 누군가 그랬잖아. 진정 고귀한 영혼은 암흑의 충동이 아무리 거세도 결코 올바른 길을 잃지 않는다고. 우리 작가께선 주인공을 믿지 못하나 봐.

작가 : 아니, 그런 걸 걱정하는 게 아냐! 다만

악마2 : , 그러면 이제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아? 언제까지 텅 빈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을 건데? 오늘 하지 못한 일은 내일도 못 하는 법! 악마든 천사든, 뭐라도 잡아서 일단 시작부터 해야지. 안 그래?

악마1 : 그리고 글은 원래 그렇게 쓰는 거야. 가능성이 보인다 싶으면 과감하게 움켜잡되, 일단 잡은 이상은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

 

이 때, 다시 전화벨 소리가 들려오고 작가가 전화를 받으면 분장실 위로 조명.

 

햄릿 : 아직도 멀었어?

작가 : , 아냐 지금 바로 시작할 참이었어.

햄릿 : 그래? 그럼, 전화기 끄기 전에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작가 : 물론이지.

햄릿 : 왜 나야?

작가 : ?

햄릿 : 작가는 누구라도 무대에 세울 수 있잖아. 근데 분장실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나니까.

작가 :  당신이 내 첫사랑이거든.

 

햄릿은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전화기의 종료버튼을 꾹 누르고, 휴대폰 종료음과 함께 분장실을 비추던 조명도 사라진다.

 

악마1 :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감동, 감동! 당신은 내 첫사랑, 당신을 구해드리고 싶어요!

악마2 : 이야, 작품이 좋아! 목적 분명하고, 동기 부여 확실하고! 이 글, 대박 날 조짐인데?

작가 : (천천히 악마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그래서 네가 얻는 건 뭐지? 햄릿의 영혼이라도 가지고 싶은 건가?

악마2 : 영혼? 아아 , 솔직히 탐나는 거야 사실이지만 어디 당신이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 햄릿은 우리 작가님이자 신의 가호를 받을 거 아냐? 나도 큰 기대 안 한다고.

작가 : 그럼 더 이상하잖아. 아무런 이유나 대가도 없이 날 돕는다? 그것도 악마가?

악마1 : 글쎄, 지옥은 따분하거든. (하수 쪽의 의자를 원형무대로 옮기며) 아무도 노력하지 않으니 방황하는 이도 없고.

악마2 : (작가를 다시 책상 앞에 앉히며) 하지만 여기엔 햄릿을 위해 노력하는 당신이 있고.

악마1 : (상수 쪽의 의자도 원형무대로) 당신을 돕기 위해 노력하는 내가 있고.

악마2 : (분장실에 조명이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햄릿을 가리키며) 또 예정된 비극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할 왕자님이 있으니, 활기차잖아? 그러니까 우리, 다 함께! 좋은 작품 한번 써 보자고!

악마1 : (손을 비비며)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지금 햄릿은 어떤 상태지?

작가 : (노트북 자판에 손을 가져다 대며)  햄릿은 아주 울적해.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동생과 결혼했고 왕 자리도 빼앗겼어. 그렇지만 그걸 억누르고 있어야지. 그래, 오프닝은 술집이 좋겠다.

 

소품 박스에서 술잔을 꺼낸 햄릿이 원형무대로 올라서면 분장실은 암전.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효과음과 함께 중앙이 밝아 오면, 술잔을 든 햄릿이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햄릿 : 저 군대를 좀 보라. 수많은 병력과 엄청난 비용이다. 게다가 부대를 통솔하는 자는 젊은 청년. 그런데 난 지금 무슨 꼴인가? 명예, 포부, 언제나 입으로만 떠들어대면서 정작은 허송세월만 하고 있으니.내겐 어떠한 일을 실행할 대의명분도 의지도 힘도 수단도 모두 다 없지 아니한가 그러나 이 내 마음아,지금은 입을 다무는 것이 현명함을 유지하는 길이다. (뒤돌아서며 목청을 높여) , 오늘은 내 친구가 빛나는 승전보를 위해 출정을 떠나는 날이오. 내가 술 한 잔씩 돌릴 테니 다 같이 축복을 해 줍시다. (의자에 가 앉으며) 아까 덴마크를 지나 폴란드로 떠나는 군대 보지 않았나? 그 선두에서 일행을 지휘하는 멋쟁이가 바로 내 유학 시절 친구거든. 대단하지, 안 그래? 껄껄.

악마1 : (팔짱을 낀 채, 햄릿을 지켜보며 서 있다가) 호오, 좋은데? 원작보다 인간적이고. , 그럼 메피스토 등장이요!

 

원형무대 바깥, 작업실 쪽에 서 있던 악마1이 신나는 걸음걸이로 무대에 올라선다.

 

악마1 : (햄릿 앞의 의자를 가리키며) 여기 잠시 앉아도 될까요?

햄릿 : , 그러시게. 근데 술이 없구먼. 내 한잔 살 테니 우리 시원하게 건배나 하지. (몸을 돌려) 여기 술 한 잔 더 주겠나?

 

작가의 옆에 서 있던 악마2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서둘러 분장실로 달려간다.

 

악마2 : , ! 잠시 만요!

햄릿 : (다시 악마1을 바라보며) 통성명이라도 할까?

악마1 : , 제 이름은 메피스토펠레스. 편하게 메피스토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햄릿 : 메피스토라,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 이름이군. , 

악마1 : 이 나라의 왕자님이시지요. 덴마크의 왕자, 햄릿.

햄릿 : 알고 있었나?

악마1 : 굉장히 유명하시거든요. 저 같은 떠돌이 여행자도 알 만큼.

 

이 때, 악마2가 술잔을 들고 와 악마1에게 건넨 후 다시 무대 밑으로 내려간다.

 

악마1 : 어떻습니까? (술잔을 들어 보이며) 저도 왕자님의 호의에 보답을 하고 싶은데 제 이야기를 좀 들어 보시겠습니까?

햄릿 : 얘기? 뭔데 그러나?

악마1 : 자세하게 설명 드릴 순 없습니다만, 왕자님은 이제 곧 엄청난 불행에 빠지게 될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결말이 왕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로부터 왕자님을 구하고 싶습니다.다행히, 제가 일러 드리는 대로만 행동하시면 나쁜 일은 절대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햄릿 : 허허, 여행을 다니면서 신비한 능력이라도 얻었나 보지? 예언 같은 건가?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힘? 자네, 차라리 신이 되어 보지 그러나?

악마1 : 물론, 제 말을 당장 신뢰하긴 힘드실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제가 어떻게 알았느냐가 아니라 왕자님이 곧 비극의 소용돌이에 깊숙이 빠져들게 된다는 예정된 사실이지요.

햄릿 : 하긴, 내가 자네 말을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정해진 운명 따위가 있다면 인간이 무엇 하러 그렇게 꾸역꾸역 살아가겠나? 그래서, 원하는 바는 뭔가?

악마1 : 전 단지 왕자님을 돕고 싶을 뿐입니다. 친구로서.

햄릿 : 후훗, 그래? 하지만 지금 자네 눈빛은 친구로서 보이는 선의 같은 게 아니야. 뭔가 바라는 게 있는 욕망의 일렁임이지. 안 그런가?

악마1 : 글쎄요, 지금 당장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겠습니다만 , 제 제안을 거래로 받아들이는 게 편하시다면 좋습니다! 주십시오, 주실 수 있는 걸.

햄릿 : 내 자네에게 재산과 땅을 준다면, 어떤가?

악마1 : 저야 감사할 따름이죠.

햄릿 : 좋아. ,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지의 땅 100에이커와 금화 다섯 상자를 내리는 바이며, (손에 든 술잔을 내밀며) 자네와 내가 신뢰를 담아 부딪치는 이 술잔이 그를 공증하도록 한다.

 

햄릿과 악마1은 잔을 부딪쳐 건배를 나눈다.

 

악마1 : (술을 마신 후 잔을 내려놓으며) 선왕의 유령이 나타날 겁니다.

햄릿 : (흠칫 놀라) 뭐라고? 선왕? 내 아버님 말인가?

악마1 : 무조건! 만나러 가지 마십시오. 그렇게만 하면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을 겁니다.

 

이 때, 악마2가 원형무대 위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다.

 

악마2 : 왕자님, 여기 계셨군요. 한참을 찾아다녔습니다.

햄릿 : 아니, 자네는 호레이쇼가 아닌가? 망루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긴 어쩐 일로?

악마2 : (흥분하여) 제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마십시오.

햄릿 : 설마! 정말 아버님의 유령이?

악마2 : ? 아니, 그걸 어떻게

햄릿 : (의자에서 일어나며) 어디인가? 앞장서게.

악마1 : 전 분명히, 만나지 말라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햄릿 : 그랬지. 조언은 잘 들었네. 자네 말이 순 허풍이 아니란 것도 알았고. 헌데, 이후 선택은 내 자유 아닌가? 혹시, 자네 말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 거래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나?

악마1 :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실체도 없는 허깨비를 만나 뭘 어쩌시려는 겁니까?

악마2 : 맞습니다, 왕자님. 유령이 무슨 해코지를 할지도 모르고

햄릿 : 나한테 해코지 따위나 하려고 저승에 있어야 할 유령이 이 먼 곳까지 왔단 말이냐? 게다가 아버님의 모습이라 하지 않았는가? 내가 안 가볼 순 없는 노릇이다.

악마1 :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햄릿 : 후회라 (고개를 저으며) 그건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 때나 쓰는 말이지. 그보다, 자네는 같이 안 갈 텐가?

악마1 : 정 가시겠다면, 전 조금만 있다 금방 뒤따르겠습니다. 왕자님께서 하사하신 이 술, 우정의 증표인데 남기고 싶진 않아서요.

햄릿 : 알았네, 그럼 자네한테 위치 아하, 괜한 걱정을. (악마2에게) , 가세.

 

햄릿과 악마2는 바쁜 걸음으로 원형무대를 내려서고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악마1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까닥거린다.

 

악마1 : 그래요, 유령을 만나러 가실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왕자님의 매력인 거고, 뻔히 알면서도 권하는 건 이 악마의 악취미인 셈이죠.

 

악마1이 술잔을 들어 남은 술을 마시면 중앙이 어두워지며 작업실에 조명이 들어온다.

 

악마1 : (원형무대에서 내려와 술잔을 작가의 책상 위에 놓으며) 근데 괜찮겠어?

작가 : (깍지 낀 손을 앞으로 내밀어 기지개를 켜며) 뭐가?

악마1 : 안 보내는 게 낫잖아? 물론, 내 취미까지 만들어줘서 고맙긴 하다만. 유령 못 만나면 만사 해결일 텐데? 진짜 아무 일도 안 생길 거고.

작가 : 아무 일도 안 생기면 그게 더 문제지. 글이 막 시작했는데 여기서 그냥 끝? 게다가 햄릿 입장에서 안 갈 수도 없잖아? 선왕이라는데.

악마1 : 뭐 당신이 작가니까. 그리고 햄릿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겠지, 첫사랑인데. 안 그래?

작가 : (잠시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뗀 후 악마1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악마1 : (손사래를 치며) 오해하지 마, 비꼬는 거 아냐.

작가 : (쓴웃음을 짓더니) 햄릿은 말이야, 나랑 참 달라.

악마1 : ?

작가 :  같은 거지. 현실이 아닌 꿈. 난 왕자도 아니고, 복수를 해야 될 일도 절대 안 생겨. 치열한 고민이라고 해봤자, 자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버스가 덜 막히려나, 아니면 지하철? 최근 느낀 가장 큰 좌절이 뭔지 알아? 낮에 현금 만원만 더 찾아 놓을 걸, 수수료 아깝다. 내가 사는 이 세상은 고결한 성품이니 위대한 영혼이니, 그 따위 것 필요로 하지 않거든. 아예 관심도 없으니까. 하지만 햄릿은 멋질 수 있잖아. 적어도 자기 세계에선.

악마1 : (고개를 끄덕이며) 호오, 그래서 보낸 거로군. 대리만족!

작가 : ?

악마1 : 그렇잖아? 어떤 일을 실행할 대의명분도 의지도 힘도 수단도 모두 다 없는 햄릿! 이래서야 딱히 당신과 다를 바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 유령이라도 만나야지. 다만, 이왕 그리 될 거! 술독에 빠져 사는 햄릿의 자기모멸로 글을 시작한 의도는 뭘까? 굳이 왜?

작가 : (씁쓸하게 웃으며) 내가 잠깐 잊고 있었네. 그래, 명색이 악마였지. 하지만 이제 그만 사양할게.더는, 내 안 들여다보거나 속마음 캐낼 생각하지 마.

악마1 : 어머, 무슨 소리? 악마는 그런 짓 하지 않아. 인간들이 스스로, 날 빌어서 얘기하는 거지. 그나저나, 그거 알아? 언젠가 신이 그러더라고. 인간은 분명 나와 다르지만 자신을 본 떠 만든 것도 사실이라고. 당신 역시, 달라서가 아니라 닮아서 흠모하는 걸 수도 있어. (싱긋 웃으며) 어쨌든, 오케이! 그럼 이제 별 수 없이 왕자님은 복수를 시작해야겠네? 삼촌이 범인인 걸 알았으니?

작가 : (다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본 후 잠시 생각에 잠긴 채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너도 같이 왕궁으로 딸려 보낼 거야. (노트북에 다시 손을 올리며) 그래, 네가 성벽에서 아이디어를 내는 거지. 상대방을 방심시키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행동해라. 실성한 왕자님을 곁에서 돌보는 건 내가 맡겠다.

악마1 : (감탄조의 콧소리) 흐음, 뭔가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지는 게 이야, 훌륭해!

작가 : 햄릿은 갑자기 미쳤고, 사람들은 그게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오펠리아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극중극까지는 쭉 흘러가는 거야.

 

원형무대에 다시 조명이 들어오면서 햄릿과 악마2가 등장한다.

 

햄릿 : 네가 보기엔 어때? 재상 영감, 그 노인네도 비열한 음모에 가담했을까?

악마2 : 글쎄요, 지금은 우선 주모자에게 초점을 맞추는 게 나을 듯싶은데요. 제가 듣기에, 국상 문제로 연기되었던 결혼 축하연이 오늘밤 열린다지요?

햄릿 : 뭐냐? 쌍수를 들어 축하라도 해 주자는 거야?

악마2 : 정확히는 축하 공연을 한 편 하자는 겁니다. 대신, 내용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얘기로. 일단 씨를 뿌려놓으면 언젠간 꼭 수확을 얻게 되는 법이니까요.

햄릿 : (알겠다는 미소를 지으며) 좋은 생각이다, 메피스토. 우선 네가 가서 리허설 준비 좀 하고 있어라. 내 곧 뒤따라 갈 테니.

 

악마2가 퇴장하고, 햄릿은 잠시 홀로 서성인다.

 

햄릿 : 간만에 혼자로구나 , 난 어쩌면 이다지도 비열한 인간일까? 얼마 전까지의 나 자신을 생각해 보라! 무기력하게 세월만 보내며 몽유병자처럼 서성대던 주제에 헌데, 지금은 묘한 흥분에 사로잡혀 큰일을 도모할 수 있게 된 현재를 찬양하고 있다. 마치 미친놈처럼 알 수 없는 희열에 들떠! 이런 일이 생기길 바라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래, 이제 어머니를 마음껏 원망할 수 있다! 근데 그게 그렇게 즐거운가? 하아, 이제 정신을 좀 차리고 부디 생각을 가다듬자. (문득 누군가를 발견한 듯) 아아, 오펠리아!내가 그대를 볼 수 있다는 건 일생의 축복이지만, 어찌 이 더러운 세상에 당신 같은 천사가 나다닐 수 있단 말인가? 조용히 아름다운 나의 여신이여, 그대만은 온갖 죄악 속에서도 무사하길

 

때를 맞추어 악마1이 무대 위로 올라서면, 햄릿은 그녀에게 다가간다.

 

햄릿 : 그대는 정숙한가?

악마1 : ?

햄릿 : 그대는 예쁜가?

악마1 : 무슨 말씀이신지요?

햄릿 : 만약 그렇다면 그대의 정숙이 아름다움과 어울리지 못 하도록 하는 게 좋을 거야.

악마1 : 왕자님, 아름다움은 정숙과 가장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햄릿 : , 그렇기도 하지. 허나 아름다움이란 놈은 또한, 아주 쉽게 정숙을 매춘부로 타락시키니까. 역설이 아니야, 상식이라고. 한때, 나는 그대를 사랑한 적이 있었지.

악마1 : 저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햄릿 : 나를 믿어선 안 됐는데. 본래는 그대를 사랑한 적이 없었어.

악마1 : 그럼, 저만 속은 꼴이 되었네요.

햄릿 : 오펠리아, 내 청컨대 수녀원으로 가시오. 뭣 때문에 죄 많은 애를 낳으려고 하지? 사내란 악당이야! 누구 하나 믿을 게 못 돼. 제발 수녀원으로. 난 그댈 보고 싶지 않다고!

악마1 : 왕자님, 진심이신가요? 제가 그렇게 보기 싫으신가요?

햄릿 : 결혼이 하고 싶어서? 그렇다면 지참금으로 이 저주를 선물하지. 얼음같이 정숙하고 백설처럼 순결해도 예정된 타락은 피할 수 없을 거야. 타락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 줄까? 남자를 피하는 거야! 끝까지 정숙할 수 있도록! 대신, 악당은 악당이 상대토록 하지. 차라리 내가 사내를 만나겠다고!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결혼은 없어져야 해. 음탕한 짓을 하고선 몰랐다고 잡아뗄 바에야 독신으로 사는 게 옳단 말이야!

 

그 때 악마2가 다시 등장한다.

 

악마2 : 왕자님, 리허설 준비가 끝났으니 어서 오시는 게

햄릿 : 그러나 이미 결혼한 놈들은 하나만 빼고 다 살려 주지. 그럼 잘 가시오, 오펠리아. (악마2를 덥석 안으며) 아아, 나의 벗 메피스토! 친절도 하셔라. , 가야지! , 서둘러 가자고!

 

악마2의 어깨에 팔을 두른 햄릿은 경쾌한 걸음걸이로 원형무대를 벗어난다.

 

악마1 : (처연한 목소리로) 갑자기 제게 왜 이러시는 건데요? 무한한 애정을 담은 왕자님의 그 눈길은 누구에게 향해 있는 건가요? (순간, 흠칫 놀라) 잠깐만 아니, 설마? 그렇다면 (장탄식) 아아, 이제 이 몸은 그 분의 꿀 같은 맹세를 빨아 마시던 난 여자 중에서도 가장 초라하고 불쌍한 신세가 되었구나. 과거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괴롭게도 이런 모습을 봐야 한다니.

 

악마1의 깊은 한숨과 함께 조명이 점차 사그라진다.

 

악마1 : 잠깐만, 이거 뭐야? 질투? (작가 쪽을 보며) 이래도 돼?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님?

작가 : 아주 오래 전부터 생각했었던 거야. 오펠리아 입장에서 보면, 대체 햄릿은 어떤 존재일까? 그 광기에, 자길 사랑한다는 확신도 없고, 얼마나 상처가 컸을까 말이야. 게다가 지금은 햄릿 옆에 너까지 붙어 있는데, 당연히 흔들리지 않겠어?

악마1 : 아하, 계속되는 자전적 글쓰기!

작가 : ?

악마1 : 오프닝엔 무기력한 햄릿, 이번엔 정인에게 상처받은 오펠리아. 순차적으로 감정이입하고 있구먼, ? 그래도 당신 경우가 좀 더 낫지 않았나? 적어도 남친이 수녀를 강요하진 않았으니, 헤헤. 그저, (남자 목소리를 흉내 내며) 걘 그냥 동아리 후배야. 너답지 않게 왜 이래? 의심을 해도 말이 되는 걸 해야지. 그보다, 너 언제까지 이럴 거야? 내가 꼭 재능 얘길 하는 건 아닌데, 이제 접을 때도 됐잖아?

작가 : 너 지금 뭐하자는 거야? 그만 해!

악마1 : 너나 좀 그만 해! 아직도 무슨 얘기가 더 하고 싶은데? 뭘 위해서? 달라진 게 있니?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변했어? 뭣보다, 사람들이 네 글을 좋아하질 않아!

작가 : 역겨우니까 그만 닥치라고!

악마1 : (목을 가다듬으며) 에고, 목소리가 좀 거슬렸나? 그럼, 이번엔 그냥 변조 없이. 솔직히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 오빠는 언니보다 내가 더 좋다는데, 그럼 어떻게 해요?

작가 : 그래서 내가 뭐래? 알았으니까, 네들끼리 지지고 볶고 잘 살아! 괜히 지저분하게 나 엮지 말고,제발 내 눈앞에서 꺼지란 말이야!

악마1 : 오빠랑 오래 사귄 것도 알고 그래서 언니가 오빠 못 잊는 것도 아는데 오빠까지 자꾸 흔들린다잖아요? 자기 맘을 잘 모르겠다고. 그러니 언니가

작가 : 그만! 경고했어! 더 이상 나 가지고 놀 생각 하지 마!

악마1 : (혀를 쏙 내밀며 혼잣말하듯) 무대 위에서 맘껏 놀라고 글 쓰는 게 작가 아닌가? 그리고 아까도 말했잖아? 내 입을 통해 나오는 건, 모두 당신이 스스로에게 하는 얘기라고.

 

작가는 다시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하고 동시에 무대 밝으면 햄릿과 악마2가 등장.

 

햄릿 : 오펠리아, 어서 앉지 그러시오? 연극이 곧 시작될 텐데.

악마1 : ! 그러지요, 왕자님.

햄릿 : 폐하께서도 저기 오펠리아의 옆자리로 가시지요.

 

악마2와 악마1은 나란히 의자에 앉고, 햄릿은 옆자리에 서서 손동작으로 신호를 보낸다. 그에 맞추어 조명이 변화한다.

 

악마1 : 지금은 어떤 장면이죠, 왕자님?

햄릿 :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하는 거요. 이 연극의 주제지. 'immortality, thy name is love.'

악마1 : 왕비가 남편을 무척 사랑하는군요.

햄릿 : 그렇지! (속삭이듯) 아니, 그랬지!

악마1 : 어머, 저건 누구죠?

햄릿 : 저 자는 왕의 조카인데, 간악한 성격의 쥐새끼 같은 놈이라오. 저거 보라고. 왕이 낮잠을 자고 있는데 저 놈이 살금살금 다가가잖아? 손에 든 게 뭘까? 치명적인 뱀독이 담긴 병이지. 그리고 그걸 왕의 귀에 붓는 거야.

 

이 때,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악마2.

 

악마2 : 그만! 연극을 중지하라!

 

조명은 원상태로 돌아오고, 몹시 흥분한 모습의 악마2는 빠른 걸음으로 퇴장한다.

 

악마1 : 아니, 폐하께서 왜 그러시지? 몸이라도 안 좋으신 걸까요?

햄릿 : 내가 아까 얘기했잖소. 이미 결혼한 놈들 중에 하나만 빼고 다 살려 준다고. 그 칼이 하필이면 폐하를 찔렀나 보지, 하하하.

악마1 : 아니, 왕자님 어떻게 그런 말씀을

햄릿 : 오펠리아! 이래도 수녀원으로 안 갈 건가? 여긴 그대가 있을 곳이 못 돼, ? (무대 밖을 쳐다보며) , 저기 당신 아버지가 헐레벌떡 뛰어오는군.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인데.

악마2 : (무대로 다시 올라와) 왕자님께서 이러시는 이유를 신은 감히 짐작할 수 있지만, 그래도 너무 심하셨습니다. 폐하께서도 어머님께서도 상심이 크신 듯합니다.

햄릿 : 그래요? 재상께서 그러시다면 내가 심했나 보죠. 그 말을 전하러 온 겁니까?

악마2 : 왕비님께서 오늘 밤에 꼭 보았으면 하십니다.

햄릿 : 알겠소. 내 찾아뵈리다.

 

악마2는 가벼운 목례 후 퇴장하고, 의자에 앉아 상처받은 오펠리아를 연기하고 있던 악마1은 갑자기 언제 그랬냐는 듯 밝고 기대에 찬 표정으로 햄릿에게 다가간다.

 

악마1 : 어땠습니까?

햄릿 : 두 말하면 잔소리지. 아까 못 봤어? 창백해진 얼굴로 꽥 소리 지르는 걸. 흉측한 살인자의 꼬리를 드디어 잡은 거야.

악마1 : 그럼, 이제 저도 왕자님께 또 한 번의 기회를 드려야겠군요.

햄릿 : 아하, 거 참 절묘한 타이밍일세. 지금 이 중요한 순간, 넌 다시금 나에게 내 미래의 비극을 예언하겠다는 게냐?

악마1 : 오히려 반대이지 않습니까? 피할 수 있는 방책을 알려 드리겠다는 건데.

햄릿 : 좋다, 내 기꺼이 듣도록 하지. 그런데 이번엔 무얼 줄까? 지난번엔 부를 주었으니 이번엔 명예를 줄까? , 메피스토펠레스! 그대는 지금 이 시각부터 덴마크 왕국이 인정하는 최고위 귀족이다. 내 단언하건대 적어도 폴로니우스보다 못 하지는 않으리라. 저 위에서 무대를 정리하고 있는 나의 벗들이 배우만이 가질 수 있는 예술혼으로서 그를 보증하도록 한다. 어때? 거래 조건은 맘에 드시나?

악마1 : 왕은 잠시 후, 기도실로 갈 겁니다. 그리고 병사를 모두 물릴 겁니다.

햄릿 : 그래서?

악마1 : 모르시겠습니까? 그곳엔 무방비 상태의 왕이 있을 거라는 의미입니다.

햄릿 : 아아, 네 말은 그 비열한 악당이 영혼을 정화하고 저승 갈 채비를 완벽히 마쳤을 때, 시의도 적절하게 죽음을 선사해라? 메피스토, 그게 과연 복수가 될 수 있을까? (고개를 저으며) 아니지, 아니야.그렇다면 난 조금만 더 기다리고 조금만 더 참겠다. 그 더러운 영혼이 지옥에 쳐 박힐 수 있도록! 반드시 마땅한 때가 올 테니 오늘은 칼을 뽑지 않을 거야.

악마1 : 설마 결행을 앞두고 일말의 망설임이 생긴 건 아니겠지요? 왕자님, 잘 생각하십시오. 다행히 현재까진 아무 것도 잃지 않으셨습니다. 허나 이제부터는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잃어 가실 겁니다. 결국,주변이 모조리 파괴되는 건 순식간의 일이죠.

햄릿 : 됐다. 철천지원수를 천국에 보내기 싫을 뿐이야. 그보다, 아까 재상 늙은이의 기색이 영 수상해 보이던데 어머님의 방에 갔을 때 뭔가가 있는 건 아니지? 거래라도 또 하나 하지 않으면, 귀띔도 안 되는 건가?

악마1 : 글쎄요 진심으로 알고 싶으십니까?

햄릿 : 내키지 않으면 말고.

악마1 : 좋습니다. 그냥 제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의 사실만을 말씀 드리지요. 누군가 엿듣는 자가 있을 겁니다.

햄릿 : 아하 누군가란 말이지. 메피스토, 너의 호의에 감사할 따름이다.

 

악마1과 햄릿이 악수를 나누면서 중앙 무대는 암전. 동시에 작업실이 밝혀지면 악마2가 뚱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책상 위에 걸터앉아 있다.

 

악마2 : ? 아니, 어째서?

작가 : 햄릿이니까.

악마1 : (원형무대에서 작업실로 내려서며) 그래서 햄릿이니까, ? 이봐, 당신 확실히 해! 그냥 우유부단한 거야? 아니면 정말 비상식적으로 고상한 거야?

악마2 : 다 좋아, 이유야 어쨌든 근데, 진심으로 구할 맘이 있긴 해?

작가 :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도저히 그림이 안 그려져. 옳다구나! 햄릿이 기도실로 달려가 칼 휘두르는 모습, 상상이 안 된단 말이야.

악마1 : (버럭) 당신은 햄릿이 아니야! 모르겠어?

작가 : ?

악마2 : 결국 이런 거네. 당신은 뭔가를 바꾸려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한심한 모습만 작품에 투영하고 싶었을 뿐이야. 앞으로 나가지도 못 하고, 뒤로 물러나지도 못 하면서! 그래도 난 이런 사람이니 어쩔 수가 없다! 떼나 쓰고 있는 거지.

악마1 : (무척 답답하다는 듯)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작가 : ?

악마1 : 솔직히, 엄마가 너한테 뭘 그리 잘못했니? 요즘 세상에 별거가 별 거야?

작가 : (중얼거리며) 아이 씨, 내가 뭐래!

악마1 : 근데 왜 그렇게 살아? 너 혼자 무슨 비련의 여주인공인 것처럼, 글이네 예술입네! 어둠의 자식마냥 폐인처럼!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면 안 되는 거니? 결국, 나 보라는 거잖아? 다 이 엄마 때문이라고! 그렇게 꼭 티를 내야 속이 시원하지?

악마2 : 아빠 생각은 그래. 인생에는 목표가 있고 계획이 있어야 돼.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걸 바라는 건 아니고. 너도 이제 나이가 벌써 몇인데, 최소한 어느 정도는 갖추고 살아야지. 네 또래 애들 봐라. 걔들은 행복하게만 잘 살지 않디? 그러니까 너도

작가 : 제발! 제발 좀! 엄마도 그렇고 아빠도 그렇고, 지금 다들 자기 짝 만나서 행복하잖아? 내가! 그렇게 싫다고 했어도! 아무리 얘기해도 들은 척도 않고! 각자 행복 찾아 떠나서, 맘껏 즐기며 살고 있잖아! 그러면 나 좀 내버려 둬! 내가 알아서! 나도! 나 하고 싶은 대로 살 테니까!

 

잠시의 정적, 악마들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서로 눈짓을 교환한다.

 

악마1 :  (한숨)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악마2 : 벌써 두 번의 기회가 지나갔어.

악마1 : 저 잘나신 왕자님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할 건데?

작가 :  지금 당장은 나도 잘 모르겠어.

악마1 : (다시 한숨) 좋아. 그러면, 잠시 나한테 맡겨.

작가 : ?

악마2 : 애초에 돕기로 했던 거잖아. 신께서 막히셨다면 악마가 나서야지.

작가 : 하지만

악마1 : 그럼, 여기서 그만 둘까? 아니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작가 : 그러자는 건 아닌데

악마1 : 됐네, 결정. 그렇다면 보자, 다음 장면은 말이야.

악마2 : 기도실이 좋겠어. 당신도 좀 도와야겠다. (작가를 일으켜 원형무대 옆에 세우며) 좀 있다 타이밍 맞춰서 올라오는 거야, 오케이?

작가 : 아니, 지금 무슨

악마1 : (윙크를 하며) 두고 보면 알아. , 다들 준비 된 거지?

 

악마1이 조명을 향해 손가락을 튕기면 중앙 무대가 밝아지고, 그 사이 무대로 올라간 악마2는 의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시작한다. 뒤이어 악마1도 등장.

 

악마1 : 폐하, 부르셨다는 전갈을 받고 왔습니다.

악마2 :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그래, 오펠리아. 야심한 밤이니 단도직입적으로 요점만 얘기하마. 햄릿 왕자와 결혼하여 같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건 어떠냐?

악마1 : 폐하, 솔직히 전 자신이 없습니다. 요즘 왕자님을 보면, 저를 대하시는 태도가 정말 절 좋아하시는지도 모르겠고 매일같이 붙어 다니시는 그 친구 분, 왕자님이 혹시 그 분을 마음에 담아 두고 계신 건 아닌가 죄송합니다, 폐하. 소녀가 망측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음을 저도 압니다. 그렇지만 왕자님이 최근 정신도 온전하지 않으신 듯하고

악마2 : 후훗, 그 점은 염려 말거라. 내 보기에, 햄릿은 미친 게 아니니까.

악마1 : ?

악마2 : 실성을 가장하여 그러는 척을 할 뿐이지. 확인해 보고 싶으면 지금 왕비의 방으로 가서 대화를 살짝 엿들어 보아라. 아마, 틀림없이 내 말이 맞을 게다.

악마1 : 아아, . 그러면 저는

악마2 : 그래, 우선 확인부터 하고 오너라. 대신, 햄릿이 멀쩡하다는 걸 알게 되면 아까 내 부탁대로 같이 유학을 떠나는 거다, 그렇지?

악마1 : .

악마2 : (일어나 악마1의 손을 잡아 주며) 결혼식은 최대한 성대하게 치를 생각이다. 넌 내일부터 신혼의 부푼 꿈에 젖어 예비 신부의 행복만을 만끽하면 된단다, 아가야.

 

이 때 무대 위로 등장하는 햄릿, 허리에는 칼을 차고 있다. 악마2는 서둘러 의자 뒤편으로 몸을 숨기고 악마1 역시, 작가에게 눈짓을 준 후 의자 뒤로 돌아가 엿듣는 동작을 취한다.

 

햄릿 : 어머니, 부르셨다는 전갈을 받고 왔습니다.

 

무대 위 잠시 간의 정적 후, 마침내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무대 위로 오르는 작가.

 

작가 : 너는 아버지를 매우 노하게 했다.

햄릿 : 어머니는 저의 아버지를 매우 노하게 했습니다.

작가 : 도대체 왜 그러느냐? 이젠 이 어미도 몰라보는 것이냐?

햄릿 : 천만에, 무슨 말씀을요. 어머니는 왕비이자, 자신이 끔찍이도 사랑했던 남편의! 그 동생의 아내이자, 그리고 유감이지만 저의 어머니입니다.

작가 : 그래, 역시 그게 불쌍한 내 아들. 이 어미가 많이 원망스럽겠지.

햄릿 : (갑자기 흥분하며) 어머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내가 불쌍하다니요? 불쌍한 건 어머니시지요. 그리고 뭐죠? 차라리 당당이라도 하던가! 남편을 죽인 원수와 결혼까지 하셨으면, 그 끔찍한 짓에 걸맞게 선량한 어머니 행세라도 끝까지 하셔야지요! 원망스럽냐고요? 그럼 제가 맘껏 원망이라도 할 수 있게! 끝까지! 내가 미치광이가 될 때까지! 욕정의 대변인 역할을 충실히 하셔야 맞는 거잖아요?

작가 : 남편을 죽인 원수라니, 그게 무슨? 얘야, 너 정말 몸이 많이 아픈 거니?

햄릿 : 아아악! 이게 뭡니까? 겨우 한 달. 아버지의 상여를 따르던 신발이 채 닳기도 전에, 세상에 나의 어머니가! 왜 숙부의 품에 안기셨습니까? 사리를 분간 못하는 짐승이라도 이보다는 더 슬퍼했을 것 아닙니까? 너무 빠르고, 너무 더럽잖아요! 어쩌면 그리도 잽싸게 그 더러운 이부자리로 달려간단 말입니까?

작가 : 햄릿, 네 말이 비수처럼 내 귀를 찌르는구나. 제발, 이제 그만!

햄릿 : 제 가슴이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입을 다물어야지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게, 왜 옳지 못 한 일을 그것도 한없이 아름다웠던 내 어머니가! 부끄러움과 아름다움은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일이 결코 없단 말입니다!

작가 : 넌 지금 내 가슴을 두 조각으로 갈라놓고 있단다. 이 어미가 잘못했다. 내가

 

그 때, 악마2가 서서히 몸을 일으켜 의자 주변을 배회한다.

 

햄릿 : (가리키며) , 보이시죠? 어머니가 진심으로 사죄를 구해야 할 대상은 제가 아니라, 바로 저기 저 분입니다. 그렇지? 사과의 한 마디라도 직접 듣고 싶어서 나온 거지? 아니면? 아직도 복수를 마치지 못한 이 나태한 자식을 질책하러 온 건가? 왜 그러시죠, 어머니?

작가 : 너야말로 왜 그러느냐? 아무 것도 없는 곳을 응시하면서 허공을 향해 얘기를 하고 있으니. 부디, 너의 광란을 진정시켜 보도록 해라. 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 거냐?

악마2 : (선왕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어머니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 햄릿!

햄릿 : 이 분! 이 분이요! 그렇게 창백한 얼굴로 저 원한 가득한 눈 그런데도 지금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어머니 앞에서 윽박지르면 안 된다! 부드러운 말로 어머니를 달래 드려라! 이토록 가엾은 모습을 하고도 아직까지 어머니의 걱정뿐이란 말입니다!

작가 : 저기, 누구와 말을 하고 있는 거냐?

햄릿 : 어머니의 눈에는 아무 것도 안 보입니까?

작가 : (고개를 젓는다)

햄릿 :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까?

악마2 : (서서히 무대를 벗어난다)

햄릿 : 저기! 지금 걸어 나가고 있잖아요. 보세요, 막 문밖을 나가고 있어요!

작가 : (뒷걸음질 치며) 햄릿, 다 머릿속에서 나온 망상이다. 눈에 안 보이는 것도 실성하게 되면 나타나는 수가 있어.

햄릿 : (거칠게 머리를 쥐어뜯으며) 실성! 어머니는 제가 정말 실성한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때 !”하는 탄성 소리와 함께, 악마1의 몸에 부딪혀 의자가 넘어진다.

 

햄릿 : 드디어 쥐새끼가 나타났구나! 좋아, 이번엔 주저할 필요도 없이 단칼에 죽여주마!

 

햄릿은 쾌재를 부르며, 몸을 뒤로 돌리자마자 악마1을 향해 칼을 찌른다. 하지만 곧장, 심한 충격에 빠져 칼을 손에서 놓치고 만다. 바닥에 쓰러지는 악마1을 황급히 부축하며 품에 안는 햄릿.

 

작가 : 아니,  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

햄릿 :  오펠리아!

악마1 : 다행이에요, 왕자님. 정신이 망가지지 않고 온전하셔서 소녀가 걱정을 많이 했답니다. 그런데 , 다행이에요.

햄릿 : 오펠리아!

악마1 : 아직도 제가 보기 싫으신가요? 수녀원에 안 가서 실망하셨어요?

햄릿 : 아니야 아니오, 오펠리아! 그런 게 아니었어

악마1 : 아아, 그렇구나 기분 좋다 결국, 제가 괜한 오해를 한 거잖아요.

햄릿 : 오펠리아, 미안하오 내가 내가

악마1 : 아직 제 마음을 다 드리지도 못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후회 없이 마음껏 드릴 것을 왕자님의 마음을 실컷 받기나 할 걸 아아, 가엾은 왕자님 내가 가슴에다 꼭 안아 드리고 싶었는데 이 가슴이 점점 식어 가 이제는 다 식어버렸나 봐요, 미안 나의 고귀한 사랑이시여 (죽는다)

햄릿 : 오펠리아! 오펠리아, 잠시만 눈을 떠 보시오!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오펠리아

작가 : 햄릿! 너 어서 이리 나오너라. 그리고 재빨리 방으로 돌아가서 잠을 청해라. 넌 오늘밤에 오펠리아를 만나지 않은 거다. 오펠리아는 여기서 죽은 게 아니라 네 실성에 상심한 나머지, 칼로 제 몸을 찌르고 강물에 떨어진 거야. 시체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어서!

햄릿 : 이 마당에 그런 게 무슨 오펠리아가 죽었는데, 이 천사 같은 여인이 내 칼에

작가 : 죽은 자는 죽은 자고, 산 자는 살아야지. , 어서 일어나! 좀 있으면 시체를 빼돌릴 기회마저 사라지니까.

햄릿 : 제발 좀 그만 두세요! 다 소용없잖아요. 눈에 안 띄고 옮긴다는 게 말이나 돼요?

작가 : 시녀를 시켜 토막을 내서라도 옮길 테니 걱정 말고 넌 방으로 가라니까!

햄릿 : (넋이 나가)  뭐라고요?

작가 : 나까지 숨이 넘어가는 걸 봐야 걸음을 떼겠느냐? 얼른, 오펠리아를 내려놓고 방으로 돌아가거라.애야, 푹 자면 금방 잊을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어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는지 머리를 움켜쥐며) 잠깐만! 이게 뭐야? 왜 오펠리아가 햄릿한테 죽는 거지?

 

작가의 외침과 동시에 작업실 위로도 조명이 들어온다.

 

악마2 : (노트북 앞에 앉아) 당연한 흐름인데, . 자연스럽기만 하네. 그리고 어찌 보면 당신이 뿌린 씨앗이잖아. 오펠리아의 의심과 질투! 안 그래?

작가 : 그건

악마2 : 어쨌든 원작에서도 오펠리아는 죽어.

작가 : 지금 그게 문제야? 이렇게 되면 햄릿의 심리 상태가 이젠 더 이상

악마2 : (책상에서 일어나 원형무대 옆에 서며) , 레어티스는 이미 올라갈 준비를 마쳤는데 안 보내 줄 거야?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작가는 결국, 무대에서 내려가 노트북 앞에 앉고 작업실을 비추던 조명 역시, 사그라진다.

 

악마2 : 거의 다 왔어! 탄력 받은 김에 속도 내서 달려보자고. 오펠리아가 묻힌 묘지!

 

중앙 무대에선 악마1을 고이 눕힌 햄릿이 그 손등에 입맞춤을 하고 있다. 빠른 발걸음으로 무대에 올라서는 악마2.

 

악마2 : 그 더러운 손 치우지 못 해!

햄릿 : 레어티스 자네에게 뭐라고 위로의 말을

악마2 : 내 동생의 몸에서 추잡한 손을 치우라고 얘기했다, 햄릿! (햄릿에게 발길질을 가하며) 그래도 이 자식이!

햄릿 : 그래, 난 맞아도 싸지. 좋아, 잘 했네, 레어티스. 자네의 분이 풀릴 때까지

 

악마2가 햄릿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악마2 : 어떠냐, 햄릿! 넌 내게 모욕을 당했다. 너 같은 놈에게도 명예란 것이 있다면 우린 어차피 끝을 봐야 한다. 내 누이를 죽게 한 자여, 결투를 신청한다!

햄릿 : 좋다, 레어티스. 결투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곳은 오펠리아가 평안히 잠들어야 하는 곳. 장소를 옮기는 것만은 허락해 주기 바란다.

악마2 : , 고양이가 쥐를 생각하는 꼴이지만 좋아, 옮기도록 하지.

 

악마2가 퇴장하고 햄릿도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악마1이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햄릿의 앞을 막아선다.

 

햄릿 : 뭐냐?

악마1 : (의미심장한 어조로) 마지막 기회입니다.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햄릿은 갑자기 작업실 쪽으로 고개를 돌려 작가를 바라본다.

 

작가 : (햄릿과 시선이 마주치자 한동안 멍해져 있다가 이내, 중얼거리듯) 하하하, 메피스토. 메피스토, 이 친구야. 내 모습을 봐. 모르겠나? 이제 내게 두려운 건 아무 것도 없어. 비극이니 불행이니, 그딴 게 날 기다리고 있다 한들 뭐가 대수냐는 말이다.

악마1 :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시지요.

작가 : 또 뭘 갖고 싶어서 이러는 거냐? 이미 부와 명예를 주었으니  그런 거였나?

 

작가는 한숨을 푹 쉬더니 노트북 자판에 다시 손을 올린다.

 

햄릿 : 이번에는 내 영혼이라도 줄까? 좋아! , 주지. 기꺼이 주지! 그래서 도대체 뭐냐?

악마1 : 결투를 취소하십시오. 이건 제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조언입니다.

햄릿 :  싫다면?

악마1 : 독을 쓰는 자가 있을 겁니다. 모르시겠습니까? 이제 그만 멈추십시오.

햄릿 : 그래 (차갑게 눈을 빛내며) 내 눈으로 직접 보도록 하지, 그 비극적 결말이란 거.

 

바닥에 떨어트렸던 칼을 다시 집어 든 햄릿이 악마1을 스쳐지나 원형무대의 한편에 자리를 잡으면, 칼과 술잔을 든 악마2가 악마1에게 잔을 쥐어준 후 햄릿의 앞으로 다가와 결투 자세를 취한다. 신호가 울리자 맹렬히 서로를 공격하는 햄릿과 악마2. 그러다 두 사람은 동시에 칼을 놓치고 서서히 상대방을 노려보며 칼을 줍는다.

 

악마1 : 햄릿! 결투가 중단된 김에, 잠깐 이 술로 갈증을 푸는 게 어떻겠느냐?

햄릿 : (어두운 표정으로)  아니오, 어머니. 조금 있다 마시기로 하죠.

악마1 : 그래? 그럼, 힘 내거라. 어미는 언제나 네 편이다, 알지?

 

다시 재개되는 결투. 몇 번의 치열한 공방이 오가다가 마침내, 햄릿의 결정적인 공격이 악마2를 쓰러뜨린다. 환성과 함께 박수갈채를 쏟아내는 악마1.

 

악마1 : 결국, 우리 햄릿 왕자가 승리를 거두었구나! 하지만 레어티스도 훌륭했다. 모두 공정한 결투를 펼쳤고 그 결과가 나왔으니, 이제 승자를 위한 축배를 들어야지. , 덴마크의 왕자, 햄릿을 위하여!

 

악마1이 잔을 들어 술을 마시자, 햄릿은 무의식적으로 그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가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는 표정으로 엉거주춤 멈추어 서고 만다.

 

악마2 : , 결투에서 이겼다고 기고만장할 것 없다. 넌 이제 곧 죽을 테니까. (햄릿이 바라보자) ?놀랐나? 내 칼에는 독을 발라놓았거든. 동생의 죽음에 대한 복수다, 이 위선자야!

햄릿 : (쓸쓸한 어조로) 레어티스, 몸을 한번 움직여봐라. 벌써부터 마비 증상이 느껴지지 않나? 네 칼은 처음 칼을 떨어뜨렸을 때부터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내가 바꿔 들었거든.

악마2 : 아니, 뭐라고? 그럴 리가 , 몸이 (벌렁 자빠진다)

 

그 때, 악마1 역시, 쓰러진다.

 

악마1 : 햄릿! 이 어미가 숨을 잘

햄릿 : 어머니, 무슨 일이십니까?

악마1 : (목을 움켜쥐며)  독이다! 술잔에 독이 들어 있었어! 이 어미는 으윽!

햄릿 : (죽어가는 악마1을 부축하며) 반역이다! 누군가 왕비님을 독살했다!

 

그리곤 곧장, 쓰러진 악마2의 몸 위에 올라타 계속하여 칼을 내리꽂는 햄릿.

 

햄릿 : 클로디어스, 이 반역자! 처음에는 아버님을 무참히 살해해 왕위를 찬탈하더니 이제 내 어머님까지 돌아가시게 해! 이 잔악무도한 살인자! 죽어라! 저 지옥 밑에서 영원히 고통 받으며 언제까지고 분노의 화염에 불 타거라!

 

십 수번의 칼놀림 후에야 온 몸에 맥이 빠진 모습으로 몸을 일으키는 햄릿, 눈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물이 맺혀 있다. 그 때 악마1의 커다란 박수 소리가 정적을 깬다.

 

악마1 : (스윽 몸을 일으키며) 아주 좋습니다. 드디어 아버지의 복수를 훌륭히 완수해 내신 햄릿 왕자님께 박수! 그래도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제 말을 하나도 따르시지 않더니, 결국 이 모양이잖아요?

악마2 : (역시 몸을 일으키며) , 애초부터 예상은 했습니다만 여하튼, 얼추 복수는 성공하셨으니 소기의 성과는 있으신 겁니다, 그렇죠? 게다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십시오. 그래도 왕자님만큼은 꿋꿋이 살아남으셨습니다.

햄릿 : (침통한 목소리로) 그거 고맙군.

악마2 : 하하, 고맙다고요? 그럼 다행히, 저와의 계산도 잊지는 않으시겠군요.

햄릿 : 이제 내 영혼만 주면 되는 건가?

악마2 :  사실, 큰 상관은 없습니다. 결국은 내 차지니까.

햄릿 :  무슨 뜻이지?

악마1 : (싱글거리며) 말 그대로 상관없다고. 지금 갖지 않아도, 언젠간 내 손에 들어오게 되어 있거든.그거 알아? 예전에 말이야.

악마2 : 제가 신이랑 내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한텐 무척 쓰라린 기억이죠. 그 잘난 신께서 다 잡은 먹이를 채가 버렸으니 구원이니 뭐니 어쩌면서.

악마1 : 그래서 내가 이번엔 수를 좀 써 놨지. 왠지, 널 키우는 신도 막판에 억지를 부릴 것 같았거든.근데 이제 빼도 박도 못 할 거야.

악마2 : 왜냐하면 왕자님은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을 테니까요.

악마1 : 살인자의 영혼! 넌 어머니가 독배를 쥐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잖아.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햄릿은 무거운 걸음으로 무대 중앙에 선다.

 

햄릿 : 죽느냐 사느냐,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다만, 신이 내게 주신 게 이 하찮은 목숨밖에 없으니 노력했을 뿐이다. 허나, 노력하는 인간은 방황하기 마련이고 이제 그 방황을 마치기 위해선 잠을 청할 수밖에 없다. 죽음이란 그저 잠드는 것, 그 뿐이다. 잠드는 것

 

햄릿은 칼을 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잠시 후 작가가 터벅터벅 무대 위로 올라온다.

 

작가 : 아니야, 이게 아니야. 내가 준 게 고작 목숨이 다라고? 내가 당신을 왜 좋아했는데? 왜 당신을 구하고 싶었는데? 난 단지 하지만 이렇게 또다시 비극을 만들고 싶진 않았어 난 정말

악마2 : 그래서 내 탓이라는 건가?

작가 : 그럼, 아니야? 햄릿의 영혼을 가지고 싶어서 네가 이 따위로 만든 거잖아!

악마1 : 이거 어쩌나? 그게 아닐 텐데.

악마2 : (햄릿에게 다가가 몸을 일으켜주며) 물론, 원하는 바를 얻어가는 건 사실이지.

악마1 : (몸 이곳저곳을 털어주며) 하지만 나중에 이 글 다시 한 번 읽어봐.

악마2 : (햄릿의 오른팔에 팔짱을 끼며) 메피스토를 빼고 읽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걸.

악마1 : (왼팔에 팔짱을 끼며) 결국, 당신이 쓴 글이거든.

악마2 : 악마란 건 말이야, 평소의 너랑 가장 먼 모습이기도 하지만

악마1 : 바로, 네 모습이기도 하지.

 

악마들과 햄릿은 나란히 전체 무대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원형무대 위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작가는 책상 쪽으로 내려와 노트북을 정리한다. 그 후, 분장실로 이동하여 노트북을 소품 박스에 쑤셔 넣어버리는 작가. 분장실을 떠나려는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이자 그 앞에 멈추어 한동안 말없이 스스로를 응시한다. 서서히 전체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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