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영준 문학상(소설 분야) 당선작 ]

남아도는 남자들

 

정회채(경영 07)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친척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다. 내 위에 원래 누나가 있었다고. 무슨 얘긴가 했는데 199312월에 내가 태어난 건 1992년 말에 어떤 태아가 죽은 덕분이었다. 몇 개월 정도 됐을 법한 그 여자. 그 여자가 태어났다면 내가 태어나지 못했겠지만 당시 시대상을 점하고 있던 남아선호사상과 초음파 검사 덕분에 나는 살았다. 딸이란 이유로 자궁 밖으로 빨려나간 그 여자는 이름도 없이 사라졌다. 살았다면 머리를 기르고 나처럼 부실한 허리를 두드리며 걸어 다녔을 테지. 힐보다는 슬리퍼를 신고 다녔을 것 같아. 그 여자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는 모르겠다. 본 적도 없는 여자를 누나라고 부르기도 참 그렇다. 나랑 닮았다면 아마 별로 예쁘지는 않았을 거다. 키도 작았을 거야. 근데 고3 끝나고 성형해서 꽤 괜찮아져서 남자애들이 골목에서 무릎 꿇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그런 인생을 만끽했을지도 몰라. 그건 그런대로 괜찮은 인생 같다. 나처럼 무릎 꿇는 삶이 아닌 무릎 꿇리는 삶. 얼마나 멋진가. 여친 집 앞 카페에서 죽치고 있자니 별 등신 같은 생각이 다 떠오른다.

여친은 안 나온다.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나 빡돌았으니 연락하지 마.”인데 그 빡돈다란 표현이 가소롭다. 옛날에 유승헌이라고 키 191에 학교 뒤에서 담배 피우고 고릴라 같은 여자애가 자기 사까시 해준다고 자랑하던 놈이 있었는데 그놈이 교실 뒤에서 빡도네하면 나 같은 앞에 앉은 멸치들은 긴장을 타야 했다. 근데 얘가 빡도네하면 억지로 새로 배운 단어를 이용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조별발표에서 누군가 통섭, 통섭 거릴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교수 입장에선 얼마나 가소롭겠는가. 나도 그렇다. 박력도 없고 화도 애매하게 낼 줄 밖에 모르는 주제에. 또각또각 대는 거 보면 짧다. 다리 모양도 약간 휘었다.

근데도 난 그런 여자애한테 사과를 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인생의 아이러니가 별거인가. 결국 모든 문제는 불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불알에서 나가고 싶어 하는 놈들이 있으니까 내 인생이 꼬이는 거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불알에서 나가고 싶어 하는 놈들 덕분이니까 애증으로 적당히 마무리 지어야 한다. 아니면 자르든가.

불알이란 단어가 추잡하다면 모든 문제는 섹스 때문에 시작됐다. 섹스하기 전에는 이 사람을 위해 일생을 다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하고 나니 상대가 너무 안 생겼다거나. 처음 한 애는 만질 것도 없었다. 벽에다가 암벽 등반하라고 손 디딜 곳 정도만 남겨놓은 것 같았다. 겨드랑이도 제모한지 며칠 됐는지 민중 같은 잡초가 보이기도 했고. 은수저 물고 난 놈들은 조수석에 여자 태우고 허벅지를 쓰다듬는데 나는 고추 없는 남자애 같은 여자애 허벅지에 머리를 박고는 지금 죽었으면 좋겠어.” 같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여자애는 좋다고 웃었고 허벅지가 살짝 떨렸다. 옆방에서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나는 자취방에서 아다 탈출이라니. 비참하다.

하지만 얘기할 때는 부풀렸다. 이런 거다. 예전에 연락만 좀 하고 지냈던 여자애가 가슴이 크면 그 애 가슴을 인용해 내가 한 여자애에 합쳤다. 남자 놈들 허세 떠는 데 중요한 건 실질적인 경험이 아니라 조합과 배치였다. 그리고 시의적절한 용어 선택도 중요했다. 뭔가 자신의 확고한 언어능력이 있다는 걸 입증해야 했다.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남자가 되어야 했다.

그 있잖아. 빨리는 게.”

누군가 이런 허접스러운 대화를 하고 있으면 신조어를 지어냈다. 남들이 나에게 언어적인 재치가 있다고 느끼게 말이다.

보압이 좋았나 보네.”

그럼 다들 쳐다볼 것이다. 모르는 단어니까.

보압이 뭐야?”

보지 압력.”

그럼 추잡한 새끼들이 웃고. 아다들도 티 안 내려고 웃고. 우리는 보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놓고 여자애 앞에 가면 한없이 진지해졌다. 딱히 어느 쪽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두 세계에서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으니까. 예전에 영국이랑 미국이 전쟁을 할 때 어느 스파이는 미국과 영국 모두에 충성을 다했다고 하는데. 그게 가능한 건진 모르겠지만 내가 한 행동을 굳이 비유하자면 그런 비유도 있을 만하겠다. 뭔 소린진 모르겠지만.

걔와 싸운 건 별 거 아닌 일이었다. 전쟁이 시작되는 이유처럼 말이다. 사실 싸움의 원인이 된 사건은 싸움의 빌미를 탐색하던 중에 터진 우발적인 사고였다. 작전을 입안하는 뇌세포들은 신나서 작전계획을 상신했고 수뇌부에선 전쟁을 선포했다.

왜 답을 늦게 해주는데?”

내가 포문을 열었다. 걔는 8개월 동안 뭔가 메시지에 즉각적인 반응을 한 적이 없었고 나도 별 문제로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싸움을 위해서는 지난 몇 달간 내가 유지한 태도를 엎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말 뒤로 약간의 한심한 대화가 오갔고 우리는 건덕지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가 걔가 소리친 것이었다. 더 이상 머리가 안 돌아가 할 말이 없단 뜻이었다.

나 빡돌았으니 연락하지마.”

남들이 보기엔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처럼 보였을 거다. 드라마에선 그럴싸하게 잘 싸우는데 바깥은 뭔가 어설프다.

싸움을 마치고 돌아오니 상쾌했다. 더 이상 누군가한테 내 인생이 끌려 다니는 걸 방치할 수가 없었다. 목표한 바를 이뤘다. 이제부턴 여생이라 봐도 무방했다. 연금수급자로 여유를 갖고 죽을 날만 기다리면 됐다.

성욕은 잠깐 외출했다가 뇌로 돌아왔다. 이튿날에는 자위를 했다. 츠보미가 나오는 걸로. 딸치고 나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휴대폰으로 걔 사진을 봤다. 실물보다 예쁘게 나온 사진들. 만질 수 있는 육체가 있는데 왜 나는 그랬을까? 후회감이 들었다. 성욕이 속삭였다. 뭐 그게 그리 대단한 문제야? 왜 화를 내고 그래? 사과하고 한 그릇 하자고. 나는 성욕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나는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걔가 사는 방은 창문이 닫혔다. 불은 켜지지 않았다. 그 방은 채광이 좋은 편이라 낮에는 불을 켤 필요가 없었다.

카페는 좁았다. 커피가 딱히 맛있지도 않았고 주택가 사이에 자리 잡았고 가격은 비쌌다. 다들 집에서 비참한 시간을 보내는 게 싫어 약간의 황금기라도 박제해두려고 카페로 나왔다. 종업원이 원두 볶은 걸 길로 갖고 나가 정리했다. 냄새가 나니 사람들이 쳐다봤다. 그 냄새가 허공에 퍼지면 커피는 산소나 탄소처럼 만물을 구성하는 입자처럼 굴었다.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썼을 때 얼마나 많은 커피를 마셨을지 궁금해졌다.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은 지저분했다. 냄새도 좀 나고 바닥에 진흙덩어리가 굴러다녔다. 휴지통엔 누군가가 썼다는 증거가 남은 휴지들이 놓였다. 똥 싸고 있노라면 다시 세상만사가 하찮아 보인다. 왜 모두들 쓸데없이 연애에 목숨을 거는 거지? 아는 친구 하나는 술만 마시면 자기가 요새 만나는 여자 얘기라며 한 시간도 넘게 전화를 했다. 자기가 연애를 하고 있다는 걸 지속적으로 증명을 해야 하는 법원명령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페이스북이든 술자리든 카톡이든 우리는 가끔 등신 같은 짓을 하면서 자신의 연애력을 말하는데 꼭 연애회사에 입사할 포트폴리오라도 만드는 모양이었다. 연애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딘가 하자가 있는 인간처럼 취급받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이게 뭔 짓인지. 결국 남자애들은 기집애 하나 따먹으려고 별 아양을 다 떠는 거잖아. 아니.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거야. 연애엔 좀 더 다른 목적도 있을 거야. 원나잇을 할 자신이 없다거나. 자신에게 몸을 바치는 사람이 없어서 구걸을 해야 한다거나. 아니. 그것보다 좀 더 숭고하고 플라토닉한 거. 맞아. 서울은 존나 외로운 도시니까. 사람들은 그득 쌓여 있는데 무게에 짓눌리는 기분이잖아. 누군가의 작고 부드러운 손을 잡고 오늘 이 밤을 하염없이 걷고 싶어 더 이상 나 외로운 그림자 만들긴 싫어 하루의 시작과 끝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랑. 이거 브라운아이즈 노래인데. 어느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똥꼬나 닦아야지. 아무리 매력적인 사람도 변기 위에서 푸지게 똥을 싸야 한다는 게 인생의 공평함 같다. 물론 비데가 안 달린 건 사회적으로 아직 불평등이 만연하단 뜻이다.

나오니 걔가 지나가는 게 보였다. 아메리카노가 많이 남았지만 그냥 버린다. 밖으로 나오니까 갑자기 햇살이 부시다.

얘기 좀 해.”

내가 말하자 무시하고 걸어갔다. 또각또각. 또 그 힐 신었네. 저 힐 병신 같은데.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그 말 누가 특허 좀 내라. 특허료로 엄청 받을 거다.

내가 화냈던 거. 그때 좀 멍청하게 굴어서 미안해.”

얘 전에 여자애 셋한테 산전수전 다 겪어서 뭐가 미안하냔 질문엔 빠르게 답할 능력이 됐다.

왜 화냈는데?”

걔가 멈췄다. 나도 따라 멈췄다. 누가 쳐다봤다. 제발 쳐다보지 마. 니들 일이나 보라고.

그냥 좀 지쳤어. 아니. 지쳤다란 말이 막연하다 싶음 솔직히 말할게. 니가 나한테 관심이 없는 것 같거든. 요새 들어서. 그래서 뭐라도 좀 너한테 끌어보고 싶었어. 알잖아. 나 관심종자인 거. 근데 연애란 게 그런 거 아냐?”

걔가 입술을 다셨다. 뭔가 쏘아붙이고 싶은데 쓸 만한 말이 안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얘는 다른 여자애에 비하면 인출 속도가 느렸다. 다른 기집들이 ATM이면 얘는 15세기 베네치아에 자리 잡은 상회길드 수준이었다.

그래서 어쩌자고? 왜 내 말은 안 듣는데. 연락하지 말랬잖아.”

그래. 그렇군.

이것도 연락이라 봐야 하나?”

내가 약간 웃으며 말했다. 여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입술 끝이 애매한 것 같지만. 아마 이제 화냈던 사람은 가 버리고 왜 자신이 화를 냈는지 이유를 들어야 할 사람이 온 모양이었다. 그걸 인정하는 게 쪽팔리니까 어떻게든 시간을 벌려고 하겠지. 내가 존나 잘 생기거나 돈이 많았으면 바로 화가 풀렸을지도 모르겠지만 뭐 타고난 건 어쩔 수 없지.

며칠 좀 더. 시간을 갖자.”

시간을 갖자. 우린 시간을 가질 수가 없어서 늙어 죽는 거거든. 반박은 안 했다. 여친은 그렇게 말하고는 갔다. 딱히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마트에 먹을 거라도 사러 가는 거겠지. 개년. 왜 저렇게 허세를 부리는 거지? 근데 왜 나는 저 허세에 비위를 맞추고 있는 거냐고. 나는 속에 말은 많지만 하진 않는다. 누군들 안 그러겠냐만 여친을 만나는 건 내가 아니라 나를 위해 연애를 대행하는 인격이다. 어쨌거나 며칠 더 있어 보자고. 전에도 이런 적 있으니까 또 극복할 수 있을 거야. 울타리를 뛰어넘는 거지. 물론 발 걸려 코가 깨진 적도 있어. 두 번째 여친한테 주먹으로 맞고 코 깨진 건 진짜지만.

문제 하나를 해결했으니 집으로 돌아간다. 버스가 간다. 기사는 수시로 전화를 했다. 나도 50대가 되면 저렇게 볼품이 없어지려나. 그래도 저 아저씨는 집에 가면 자식도 있고 남들이 대강 달성한 건 달성했으니까. 나는 이뤄놓은 게 좆도 없으니까. 아니 좆은 있긴 한데. 비유적인 얘기지. 생각해보면 비유란 게 어떤 놈이 처음에 생각해낼 땐 참신했는데 너무 돌다 돌다보니 단물 다 빠져서 초라해지는 거지. 속담도 처음엔 개드립에서 출발했을 거야. 내 머리 참 말도 많다.

대각선 쪽엔 갈색머리의 여자가 앉았다. 청바지에 녹색 코트, 스트라이프 셔츠, 컨버스. 흔해 빠진 옷차림인데 얼굴은 안 그랬다. 보면 저런 여자와 동시대에 태어나서 다행이단 생각이 드는 그런 여자였다. 여자는 이어폰을 꽂았고 가끔씩 카톡을 확인했다. 왼손을 보니 반지를 끼웠다. 어떤 얼간이가 저기다 반지를 끼운 거냐고! 아마 키는 185 정도 되고 셔츠를 배바지로 넣어도 세련된 금융업 종사자일 거야. 저 여자한테 반지만 끼운 건 아니겠지만. 참 이런 말 지껄이는 내가 추잡하다. 절이라도 들어가야 하나.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아마 저랬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했다. 저런 얼굴이면 아침에 거울 볼 보람이 있을 것이다. 중학생 때부터 화장에 맛을 들였을지도 모르지. 그 업그레이드 된다는 느낌에서 벗어나기 힘들 거야. 사람들이 친절하게 대하겠지. 누군가는 좋다고 따라붙고 어쩌면 스토커가 될 지도 모르고. 스토커가 칼 들고 쫓아올 수도 있겠지. 내 인생엔 누군가 칼을 들고 쫓아오는 일이 없는데 말이야. 좋은 일은 아니지만 뭐 아무려면 어떤가? 내 일도 아닌데. 저 여자 인생은 아마 눈부실 거야. 물론 단지 예쁘다고 현금흐름이 늘어나거나 직장에서 인사고과를 잘 주지는 않겠지만 못 생긴 것보다는 낫겠지.

내심 집에서 나올 때는 화해하고 섹스를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침대에 누워서 세웠던 계획들은 모두 취소됐다. 씨발.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성욕이 하는 말이다. 그것 때문에 기분이 좀 우울해졌다. 그냥 위로하는 느낌으로 여친한테 카톡을 보냈는데 1이 사라지지 않았다. 전화를 할까 하다가 말았다. 인내심이 필요했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생각에 다른 여지를 열어둘 필요가 있었다. 내가 가는 노선이 종점으로 갈 수도 있으니까. 그 전에 미리 내려서 다른 노선을 찾아봐야 했다. 환승할 가능성도 생각해두자. 수술 받기 전에 동의서 받는 거랑 똑같은 거야.

 

친구가 술 마시는데 불렀다. 금요일 저녁이니까 다들 막연히 기분이 좋아졌다. 길바닥엔 쓰레기랑 가래가 붙어 있지만 괜찮았다. 누군가는 혼자서는 조용한 인간들이 떼로 모이면 고성방가하며 민폐라는데. 혼자서 고성방가하는 게 더 이상하잖아. 모르겠다. 여자애들도 몇 명 있다고 했다. 딱히 아는 사람들은 아닌데 좋았다. 결혼은 프러포즈하기 전까지가 재밌고 남녀관계는 사귀기 전까지 썸 탈 때가 가장 재밌으니까.

집에 가서 똥 싸고 샤워하고 나왔다. 강남에서 만났다. 처음에는 친구랑 안경 낀 친구의 친구였다. 테이블이 살짝 암울했다. 남자 셋이서. 친구의 친구는 약간 대화가 덕스러웠다. 뭔가 영화에 관해 조예는 깊은 것 같았는데 얼굴은 전혀 조예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얼굴은 뭘 해도 애니메이션을 본다고 오해받을 거야. 지저분한 피부에 면도도 대충하고 눈도 가늘고 콧대는 굵직하고 입술은 두툼하고. 미국 사람들 이름을 줄줄 외우는 게 없어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입술 주변에 여드름이 무성하던데. 입 냄새가 심할 것 같았다. 친구는 그럭저럭 응수를 해주는 양 했지만 사실 우리 셋 중 둘은 친구의 친구의 말을 듣지 않았다. 친구의 친구의 말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우주를 맴돌 말이었다.

조금 있으니 여자애 둘이 왔다. 약간 덧니가 있는 키 큰 여자애랑 가슴이 크고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여자애였다. 20세기 후반에 노랑머리가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2010년대에도 노랑머리는 튀었다. 다들 겸양 있는 갈색머리를 했다. 노랑머리는 왠지 신문지를 잔뜩 붙여놓은 반지하에서 문신한 남자애한테 몸을 대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강대 다닌단 얘기를 듣고 바로 그 생각을 버렸다. 아마 좀 마이너한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모양인 것 같았다. 갈색으로 물들이면 꽤 괜찮을 것 같았다. 편견이긴 하지만 남자애들은 마이너한 문화권에 속한 여자애들은 별 볼일 없는 남자한테도 몸을 대준다는 믿음이 있었다. 나도 그런 선입견에서 그렇게 자유롭진 못했다.

노랑머리와는 곧 말을 놓았다.

나이가?”

내 얼굴을 보고 처음 하는 말이었다.

스물둘.”

오빠네.”

그렇지.”

말 편하게?”

그래.”

그러자 노랑머리는 말이 많아졌다. 여자친구는 내가 계속 말을 만들어서 공급해야 하는 애였는데 노랑머리는 자기가 말을 끌고 오는 쪽이었다. 시끄러운 게 싫다면 싫을 법도 하지만 그 순간엔 그런 대화가 감도는 게 좋았다. 어떤 사람과 대화할 땐 신경을 곤두서고 기분을 망치는지 일일이 확인하며 대화를 해야 하지만 어떤 사람에겐 편안함을 느꼈다. 아마 그 사람들 각각의 품성이 그렇게 다르기보다는 시간차에 의한 게 더 큰 것 같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재밌는 사람이다. 계속 재밌는 사람은 드물다.

곧 이어 커플 하나가 더 합석했는데 뭐 걔넨 알 바 아니었다. 노랑머리는 내 옆에 앉아서 계속 얼음을 깨부쉈고 나는 노랑머리가 얘기해주는 사람들 얘기를 들었다. 사람들의 얘기는 일관성이 없었는데 확실한 건 노랑머리 마음에 드는 인간들은 아니었다. 가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들으면 그 사람들도 널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걸.”이라고 쏘아붙여주고 싶기도 한데 나 스스로한테도 해당되는 순환논리적인 얘기고 뭐 가슴이 크기도 하고. 넘어갔다. 친구는 덧니랑 커플들이랑 얘기를 했다. 친구의 친구는 몇 마디 해보려다가 사람들이 자기 얘길 듣지 않자 휴대폰만 봤다. 다른 탁자들을 힐끗 보면 다들 그랬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고 겉도는 사람들이 있다.

노랑머리가 담배를 꺼냈다. 나는 담배를 필요할 때만 피우는데 그날은 피웠다. 연기가 머리 위에서 섞였다. 간만에 피니까 머리가 지끈했다. 뭔가 하이해지는 기분이었다. 재떨이에다가 재를 터는 게 좋았다. 재의 입자가 규칙적으로 조직을 만들었다. 입자끼리 엉기면서 의미 있는 모양새를 만들었다.

다들 엄청 속물적이야. 쓰레기들.”

노랑머리가 자기 과 사람들을 그렇게 표현했다. 나는 동의했다. 어차피 볼 일도 없는 인간들인데 악마든 천사든 알 게 뭐야.

이것 봐봐.”

사진을 하나 보여줬는데 버스에서 본 사람을 닮았다. 버스에서 본 사람 얼굴은 기억이 안 났지만 다시 본다면 이럴 것 같았다.

얘가 과 망쳐놨어. 남자애들이 얘 때문에 몇 명이 싸웠는데. 근데 또 얼굴을 내밀어. 존나 씨발년이. 염치가 없어.”

노랑머리가 그 부분에서 약간 괴성 비슷한 걸 지르자 다른 테이블에서 불쾌하단 눈빛을 보냈다. 병신들. 친구의 친구가 노랑머리와 대화를 하고 싶은 것 같아서 내가 계속 노랑머리의 대화를 받아줬다. 친구의 친구는 뭔가를 삼켰다.

얼굴도 성형 존나 한 것 같은데.”

내 말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내가 살짝 팔꿈치로 가슴 쪽을 찔러도 반응하지 않았다. 평소면 이러지는 않을 텐데 뭔가 느낌이 왔다. 부드럽고 굴곡이 분명히 덩어리를 만들었다. 여친과는 달랐다. 몇 번 더 찌르자 걔가 눈치를 줬다.

뭐해?”

아니. 뭐 그냥.”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뭐 딱히 할 말이 필요한가? . 니 가슴 만지고 있어. 존나 크다. 같은 대답을 원하는 건 아닐 테니까.

걔가 몸을 숙였다. 가슴이 팔에 닿았다. 걔가 속삭였다.

만지고 싶어?”

웃지는 않았지만 힐난하는 어조 같지는 않아서 용기가 생겼다. 가슴이 밀착하기도 했고.

.”

노랑머리가 다른 사람들을 쳐다봤다.

이 오빠가 내 가슴 만지고 싶대.”

그러자 커플 중 남자가 웃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놈인데 호탕하게 웃으면 자기 인생도 호탕해질 거라 믿는 등신이었다. 아까부터 설교를 하려고 해서 피하고 있었다. 노랑머리도 웃으면서 말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따라 웃었다. 친구의 친구만 표정관리를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놓이면 온 몸이 찌릿해졌다. 내뱉을 말들이 앞으로 있을 몇 시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지 부정적인 영향을 줄지 판단하기가 어려우니까. 아니. 까놓고 말하자면 어떻게 말해야 얘 브래지어에다가 손을 넣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런 식으로 공론화를 해버리면. 머리가 심란해졌다. 브래지어에 손을 넣으면 팬티에 손을 넣는데도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들어갈 지도 모르고. 몰라.

담배 없는데. 같이 사러 가자.”

노랑머리가 내 팔을 잡았다. 친구의 친구가 담배를 주겠다고 했는데. .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둘이서 나갔다. 한 층 더 위로 갔다. 불이 꺼진 층계참이었다. 노랑머리랑 계단에 앉았다. 창은 불투명유리라 바깥이 흐릿해 보였다. 노랑머리가 내 머리를 잡고 자기 가슴에 묻었다.

기분 좋아?”

나는 손을 올려 가슴을 잡았다.

.”

진짜 밝힌다.”

몰라. 계속 부볐다.

나한테 고맙지?”

.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인생에 가끔은 이런 여자애를 만나는 행운도 있어야지. 근데 언제까지 가슴만 부비지? 좀 있으면 시간대가 붐빌 땐데. 첫날에 이런 적은 없는데. 뭐든지 시작이 있는 법이지. 100미터도 10초대를 넘기는데 그렇게 오래 걸렸지만 한 명이 넘으니까 몇 달 만에 다들 넘었잖아. 이제 친구들한테 은근슬쩍 원나잇 경험이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노랑머리는 갈색머리로 만들고. 얼굴도 정감 가고 못 생긴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사실 괜찮은 편이지. 가슴도 크고. 왠지 얘랑은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아. 뭐 진짜 결혼까지 가려면 장난 아니겠지만. 집이랑 혼수랑 집안 분위기도 맞춰야 하고. 예단은 얼마나 주려나. 요새 몰디브 존나 비싸다던데. 거기까지 갈 돈도 없지. 아니 뭐 그런 것까지 갈 건 없고. 치마 좋아. 전에 여친한테 흰 셔츠에 청바지, 컨버스 신은 여자가 좋다고 했었는데 개소리야. 치마가 짱이야. 갈색 스타킹도 좋아. 여자 다리는 진짜 잘 만든 거야. 다들 미치잖아. 슬슬 찔러볼까?

손을 살짝 움직였다. 여자애의 손도 움직였다.

. 나 혼전순결이야.”

내가 세상에서 들은 소리 중 가장 개소리였다. 처음 보는 남자애한테 가슴을 비비게 해주면서 다른 데도 아니고 허벅지를 쓰다듬는 건 못 하게 하다니.

아니. 그냥 쓰다듬는 건데.”

내 손이 헤맸다. 손 끝의 신경들이 무슨 일이냐며 소리를 질러댔다.

쓰다듬기만 할 거 아니잖아.”

내 손이 밀려났다.

진짜 쓰다듬기만 하는 건데.”

마지막엔 나도 모르게 말꼬리가 흐렸다. 내가 얼굴을 들었다.

아니. 진짜로 쓰다듬기만 하는 거야. 다른 의미는 없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정말 그런 짓 안 해.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 아니야. 정말이야.”

설득력은 없는 것 같지만 말했다. 노랑머리는 고개를 저었다.

거긴 안 돼.”

가슴은 만져도 되는데 여긴 안 된다고?”

.”

그럼 키스는?”

키스도 안 된다고 했다.

 

담배를 사러 나갔다. 편의점에서 보니까 노랑머리 얼굴이 좀 통통해보였다. 자세히 보니 쌍꺼풀도 뭔가 이상했다. 흥이 깨지는 기분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어딘가는 맛이 간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괜찮은 사람인 척 하지만 좀만 친해지면 죄다 미친 인간들투성이다. 나와서 바로 담배를 피웠다.

이상해?”

노랑머리가 물었다.

뭐가?”

.”

무슨 의도로 하는 질문인지. 가슴 만지는 건 좋지만 가슴만 만지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 내 사고방식이 이상한 건가? 아무리 인간들의 다양성이 존중된다지만 이건 뭔가 아니잖아. 근데 노랑머리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보였다.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착 가라 앉았다. 적절한 말을 찾아보자.

아니. 뭐 괜찮아. 약간 놀라긴 했지. 사실 처음 만난 날 이런 사람은 처음이라서. 나쁜 의민 아니고. 사실 굉장히 특별하지. 특별해.”

엄밀히는 가슴만 만지게 하는 사람은 처음이라서도 있지만. 마음은 뭐라던 겉은 신사적으로 굴기로 했다. 불씨를 끄는 건 안 돼. 그냥 끌까?

가슴 만지는 건 괜찮은데. 다른 데 만지는 건 죄짓는 것 같아서.”

이건 또 무슨 소리야.

? 무슨 죄?”

노랑머리가 잠시 눈을 감았다.

예수님한테.”

나는 담배를 깊게 들이마셨다. 금요일 밤 9시 강남대로에 앞에는 커플이랑 뭐 기타 등등들이 돌아다니는데 나는 가슴 큰 기독교 신자한테 혼전순결에 대한 인식을 듣고 있었다. 손석희가 올 것 같았다. 혼전순결이란 게 처음 만난 남자의 머리를 가슴에 파묻어도 된다는 관용적인 개념이란 건 처음 알았다. 하긴 삽입만 안 하면 되니까. 혼전순결이란 기술적인 문제였던 거다. 전에 어떤 놈이 혼전순결 안 깨려고 애널만 하는 커플도 있다고 했는데. 그럼 키스는 왜 안 된 거야? 진도가 너무 빨라서? 가슴 만지는 게 키스보다 앞이야? 어디 교육과정이냐고. 담배를 다시 연달아 피웠다.

오빠. 교회 다녀?”

목소리가 표라도 원하는 것 같았다.

가끔. 요새는 잘 안 갔는데.”

3 때 일요일 자습 안 하려고 몇 번 가긴 했으니 넓은 의미에선 천국에 들어갈 사람에 포함될 것이었다. 천국에 가는 횟수가 정확히 출석 몇 회로 정해지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와서 전도라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목사가 설교할 땐 거의 잤다. 나중엔 그나마도 안 가고 피시방으로 갔다. 3이 끝나고는 안 갔다.

노랑머리와 잠깐 걸었다. 딱히 걷자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자연스레 걸었다. 중간에 벤치에 앉았다. 친구가 어디냐고 카톡을 보냈다. 기분이 착잡해졌다. 좀 쉽게 대주는 여자애를 만난 줄 알았는데 갑작스레 종교적인 주제로 빠질 것 같았다. 눈이 맑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키스를 해줬으면 교세가 금세 불어났을 텐데. 키스를 못 한 게 부끄러워졌다. 그냥 하려고 했으면 했을 것도 같은데. 성추행인가? 머리가 복잡했다. 얜 뭘 하고 싶은 거야? 가슴 만지는 건 왜 되는데!

내가 좀 이상하지?”

여자애가 말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래. 인정하자. 세상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고. 나는 그 중에 단 몇몇을 만나본 게 고작이다. 내가 깔짝 살아온 짧은 세월로 다 예측하진 말자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오빤 섹스 해봤어?”

멋진 대화다. 여자애한테 섹스란 말 듣는 건 좋지만. 맥락이 안 좋다.

. 그런 질문은 대답하고 싶지 않은데. 너무 사적인 질문이라서.”

내 말에 노랑머리는 약간 부끄러워했다. 범위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것 같았다. 하긴 남자가 여자 기분을 일일이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여자들도 자기 앞에 있는 남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 굳이 생각할 것도 없고 말이야. 항상 아쉬운 건 년보다는 놈들이니까.

난 안 해봤어. 전에 사귄 남자친구랑 그것 때문에 헤어졌거든.”

나라도 헤어질 거다. 그거 기다리다가 죽기라도 하면 억울해서 사리가 1톤은 나올 거다. 뭐 가슴은 만지게 해줬겠지.

그건 그 남자 놈이 이상한 거야.”

나는 내 본심과는 관계없이 대외적인 브리핑을 시작했다.

정말로 널 아끼고 있다면 너가 하는 생각까지 존중해야지. 뭐 굳이 종교적인 게 이유가 아니더라도. 여자는 임신이란 게 있으니까 남자랑 다르잖아.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너도 원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자유가 있고. 미국에선 캠페인도 하거든. 저스트 세이 노라고. 억지로 졸라서 자는 걸 강요하는 게 데이트 강간이거든. 뭐 굳이 그런 말까지 안 가더라도 남자가 자기 성욕만 생각해서 행동하는 건 이기적인 거야. 누군가를 대할 땐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야지. 생각할수록 그 사람 웃기네. 그 사람 몇 살이었는데?”

스물다섯.”

나이랑은 상관없는 문젠가 보다.”

내가 웃자 노랑머리도 따라 웃었다. 다시 담배를 피웠다. 약간 자괴감이 들었다. 전혀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들을 한 게 부끄러워서, 라기 보다는 너무 상투적인 것 같아서. 여자애들은 남자애들이 좀 그럴싸한 말을 하는 걸 내심 기대할 때가 많은데. 난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나 좀 싸보였어?”

뭐가?”

아까 계단에서.”

아니. 그렇게 생각할 거 없어. 어떤 행동을 하던 남한테 피해주는 거 아니면. 부끄러워 할 거 없는 일이야. 진짜로. 그리고 난 되게 매력적이라 생각했어.”

말이 살짝 꼬이는 것 같았지만 노랑머리는 그런대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되는 대로 지껄였다. 이런 거 보면 드라마나 술자리가 도움이 되는 것도 같다. 내가 딱히 생각할 필요 없이 그냥 있던 것들을 적당히 끌어와 돌려막는 것이다. 목소리에 진정성이 있으면 내용과 관계없이 사람들은 신뢰한다.

근데 왜 자기가 싸 보이냐고 물을까? 얘도 어지간히 자신에 대한 무언가가 약한 모양이다. 어릴 때부터 부모가 엄하게 키웠을까? 너무 궁금해 하면 안 되는데.

노랑머리가 내 손을 잡았다. 뭐 어쩌자고. 뭘 웃어? 날 심각하게 하지 마. 결혼해야 팬티를 벗는 여자애랑 오늘 밤에 뭘 할 수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평온해졌다. 어디 조용한 룸 카페 같은 데라도 가서 여러 얘기하는 척하며 가슴이나 계속 만질까. 계속 만지다보면 사상의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잖아. 모텔까진 안 가도 키스까진 갈지도 모르잖아. 모르겠다. 가슴이라도 만지자. 일단 가슴은 만질 수 있으니까. 결론이 났다.

어디 조용한 데로 갈까?”

조용한 데 좋지.”

노랑머리가 다시 들뜬 어조가 됐다. 만약에 사귀게 된다면 기분 편차 장난 아니겠다.

모텔은 아니니까 걱정 말고.”

말해놓고 내가 말실수한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아니었다. 짐 챙기러 술집으로 돌아갔다.

친구의 친구랑 커플 중 남자랑 싸우고 있었다. 서로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둘 다 어설픈 게 구속복 입은 사람들이 싸우는 모양새였다. 나도 여자친구랑 싸울 때 저랬지. 친구가 말하는 걸 들어보니 커플남이 친구의 친구의 연애사를 집요하게 캐물었다. 모태솔로인 걸 기대하고 물었겠지. 비웃고 싶었던 거다. 자기보다 못한 인간들이 있어야 안심을 하니까. 커플남은 복사용지를 파는 회사에서 일했는데 거기서 하는 일이라곤 자기보다 먼저 들어온 사람들을 위해 전화를 하고 커피를 타고 복사하는 거였다. 종이만 보다 보니까 우울해진 거다.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들도 태반이다. 누군가는 모델들을 술병과 같이 데려와서 같이 먹는다. 대부분은 그렇게 살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보다 못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싶었겠지. 나는 젊은 시절을 이렇게 알차게 꾸렸는데 너는 왜 인생을 낭비하고 있니? 너도 나처럼 살아봐. 이러면서. 친구의 친구는 자신은 그런 데 별로 관심 없고 다른 주제들에 더 관심이 있다고 항변하고 커플남은 거기에 더 쾌재를 불렀겠지.

아니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나가서 운동 좀 하고. 학교 가서 운동장이라도 뛰어 봐. 짐이라도 다니든가. 옷도. 인터넷에서 15분만 검색해봐. 너무 병신 같은 거 말고. 단정하기만 하면 돼. 피부도. 막 잘 생기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깔끔한 게 최고야. 여자애들은 뭐 잘 생긴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냐. 잘 생긴 남자는 아무나 못 만나니까. 여자애들은 쪽팔리지 않는 남자를 만나. 상타가 되라는 게 아니라 하타만 안 되면 된다고.”

이런 따위의 말을 지껄였을 게 분명했다. 인생에 해놓은 거라곤 여자애 한 네댓 명 따먹은 게 전부이지만 여자애 한 명 못 따먹은 사람한테 설교를 할 수 있겠지. 조언하는 것 같으면서 실제론 그냥 비웃는 거지만. 말이란 게 이래서 병신 같은 거다. 분명히 의사를 그대로 전달하려고 누군가 성대를 비비면서 첫 언어를 시작했을 텐데 이제 액면가는 다 의미가 없다.

친구의 친구는 씩씩거렸을 거다. 평소에 남들과 대화도 잘 못 하니까 분노도 뜬금없이 터져 나왔겠지. 자기 딴에는 진지하게 분노를 방출했다고 믿으면서. 영화광이 된 건 영화 보는 거 말고는 할 게 없어서 그런 거겠지. 집에 혼자 있을 때 영화 대사를 막 읊었을 거야. 그러면 자기 인생도 그런대로 살 만하단 생각이 들었을 거야. 어쨌든 연락해주는 여자애도 없고 야동이나 보면서 언젠가 빵빵한 여자한테 담글 생각만 하겠지. 그렇게 혼자 망상하다가 내심 작은 관계라도 만들어보고 싶어서 이 자리에 나왔을 텐데 섞여 놀 줄도 모르니까 겉돌다가 누가 시비 거니까 폭발했을 테고.

병신. 자격지심 때문에 저래.”

커플남이 커플녀에게 말했다. 뇌라고는 자동응답기 정도 기능 밖에 없는 커플녀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격지심은. 지가 속물처럼 보이니까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거지. 친구의 친구는 친구가 데리고 나갔다.

덧니는 어쩔 줄 모르고 헤맸다. . 이러면 안 되는데.

덧니는 노랑머리의 친구고 집에 가자고 할 것이다. 노랑머리는 집에 갈 거다. 즉 나는 만질 가슴이 없다. 집에 가서 내 거라도 만지면 되지만 그렇게 구차하게 살고 싶진 않다. 여자친구는 여전히 카톡이 1이다.

오빠. 미안해. 나 오늘은 그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친구 좀.”

노랑머리가 울고 있는 덧니를 토닥여주며 말했다. 그래. 들어가렴. 평생 들어가. 니 가슴은 다른 남자가 실컷 만지게 해주렴. 하지만 혼전순결은 꼭 지켜야 돼.

바래다줄까? 괜찮아? 그래. 조심하고. 들어가. . 내가 다시 연락할게.”

실제론 이렇게 말했다.

커플과 노랑머리와 덧니가 떠났다. 나는 버스정류장으로 가다 전화를 받았다. 친구의 전화였다. 다른 골목에 가니 친구의 친구가 토를 하며 울고 있었다. 세상에 그렇게 흉한 꼴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닐 거다. 아스팔트 한구석엔 토사물이 흐르고 다른 구석에선 고깃덩이 위에 눈물이 흘렀다.

개새끼들. 개새끼들.”

친구의 친구가 말했다. 딱히 누군가를 특정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저 새끼 존나 취했다.”

친구가 말했다. 나도 알아. 친구의 친구는 온 몸으로 울었다.

빡촌이라도 갈까?”

친구가 말했다.

돈 많냐?”

아니.”

내가 한숨을 쉬었다.

난 집에 갈래. 넌 어쩌려고?”

저 새끼 데려가야지.”

도와줘?”

아니. 너한테 부탁할 순 없지. 오늘 괜히 욕 봤다. 미안하다.”

인사 하고 정류장 갔다가 왠지 기분이 안 좋아져서 돌아갔다. 친구와 같이 친구의 친구를 부축했다. 지하철을 타는데 역까지 데려가는데 30분은 걸렸다. 몇 정거장을 가는 동안 셋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친구의 친구가 말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감은 채 하는 말이지만 존댓말인 걸 보니 나한테 하는 말이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사실 그 형 말이 맞아요. 제가 병신이죠. 이 나이 되도록 제대로 뭔가를 해 본 적도 없으니까.”

덜컹덜컹. 지하철이란 게 참 신기하다. 땅 속에 굴을 팠는데 무너지지 않고 거대한 구조물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는 게.

네가 죄송한 건 그것 때문이 아니잖아. 네가 싸움을 일으켜 덧니가 집에 가는 바람에 내가 만질 가슴이 없어졌다는 걸 사과해야지. 하지만 꼭 그렇게 한 생각만 머리를 채운 건 아니었다. 그냥 친구의 친구가 불쌍하단 생각도 들었다.

그 새끼랑은 다시 안 볼 거야.”

친구가 말했다. 커플남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커플남과 친구는 대학교 선후배였다.

아냐. 내 잘못이야. 내가 병신이라. 내가 병신이라 그렇지. 다 내 탓이야.”

어디 가서 내가 병신이니 이런 말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듣는 사람들이 할 말이 없다. 친구의 친구는 그런 점에서 오늘 일에서 배운 게 없는 거다. 하지만 불쌍하다.

“500일의 썸머에서도 좀 뭐라고 하지. 비슷한 게 있었는데.”

친구의 친구가 다시 영화 얘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고꾸라져 혀가 꼬이는데도 징하게 이야기를 하더라. 어쩌면 친구의 친구한텐 연애가 필요하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집으로 가는 길에 노랑머리한테 카톡을 보냈는데 얘도 왠지 1이 사라지지 않았다.

거참. 바쁜가? 그래. 바쁘겠지.

1은 누가 만든 거야.

잠이 안 왔다.

 

 

다음 날 일어나니까 답장이 왔다. 실제로는 오타 범벅이었지만 알아먹기 좋게 옮기면 아래와 같았다.

생각해봤는데 우리가 더 이상 뭔가 새로운 걸 해내진 못할 것 같아.”

여자친구는 선문답을 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어제 내가 좀 평소랑 달랐던 것 같아. 나 같지 않았어. 이래서 진짜 미안해. 근데 이런 식으론 안 될 것 같아. 미안해.”

노랑머리는 암호전문이라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덧니가 뭐라고 지껄였나? 아니면 자기 혼자 생각한 건가? 일단 좀 시간을 두고 다시 연락해볼까? . 씨발.

술 냄새를 풍기며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이 안 나왔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섰다. 나오니 거실이 훤했다. 또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벽에는 엄마가 살아있을 적에 가족들과 찍은 사진이 걸렸다. 그러니 문득 생각이 나더라.

나보다는 누나가 태어났으면 더 잘 살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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