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문학상-시 분야] 수상소감

조주형(신학·11)
먼저, 대학언론사(연세춘추)와 심사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가난의 굴레’는 무거운 내용의 시입니다. 이 시에는 가난에 대한 사회구조적 문제와 대량으로 사육되고 도살되는 가축에 대한 문제가 함께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사육(?)당하는 그들의 희생으로, 자본가들의 탐욕과 육식을 즐겨하는 인간의 욕망이 채워지고 있는 가슴 아픈 현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불교는 삶을 고(苦)라고 가르치고 인생을 번뇌로 불타는 집이라고 표현하던데, 기독교인으로서 세상을 이렇게(?) 만드신 하나님은 정말 어떤 분이실까? 하고 (조직신학에서 다루는) 그의 속성과 선한 성품에 대해서 한참을 의심하고 고민도 했었습니다. 
   
좋은 부모님과 괜찮은 환경에서 성장했음에도 사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힘없고 가난한 자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추운 겨울 행상을 하면서 길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찬밥 몇 숟가락을 드시면서 끼니를 때우고 계시는 할머니나, 불편한 몸을 이끌고 다니면서 파지를 주워서 생활하시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안쓰러움과 삶의 무게를 느낍니다. 어떤 사람들은 젊었을 때 공부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아서 저들이 노년에 고생한다고 쉽게 결론을 내립니다. 어떤 현상이 일어날 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난을 단지 개인의 탓으로 돌리거나 또는 사회구조적인 모순으로만 보는 것은 단순하고 편향된 시각입니다. 복합적이고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 양계장에 몇 번 가봤습니다. 냄새가 장난 아닌데, 냄새보다 그 광경이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좁은 철장에 갇혀 사육되는 닭들을 보면서, 인간 때문에 인간뿐 아니라 닭들도 고통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들은 감정을 가진 생명체가 아니라, 단지 인간의 미각을 즐겁게 해주는 고기 덩어리로 취급되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학교나 학원에 갇혀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사육되는 것과 다름없는 학생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결국은 차이는 있지만 푼돈을 받고 상당한 노동을 해야 겨우 살 수 있는 노예 수준의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잖아요. 고기도 공산품이고 노동자도 공산품처럼 생산되는 세상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란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가공된 개념인 것 같습니다.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세상 모든 사람과 모든 생명체들이 안식과 평안을 누릴 날이 속히 오기를 고대합니다.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에 부족한 저도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감을 마칩니다. 다시 한 번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박영준 문학상-소설분야] 수상소감
정회채(경영·07)
 
예전에 친구들한테 말한 적이 있다. ‘연세춘추’의 연세나 춘추나 다 나이를 높여 가리키는 말이니까 ‘나이나이’로 바꿔 부를 수 있다고. “나이를 가리키는 연세는 年歲이고 연세춘추의 연세는 延世인데 뭔 헛소리야?”라고 누군가 지적해주길 바라고 한 말이었다. 그러면 다들 정회채 또 이상한 소리한다며 웃어넘길 테고 나는 사람들에게 또 한 번 웃음을 준 광대가 되리라. 하지만 다들 “응. 그렇구나. 아 근데 재익아. 요새 네팔 여행 가려면 예산 얼마 정도 짜야 할까? 비수기라 좀 싸려나”로 넘어가버렸다. 어쨌거나 나한테 연세춘추의 애칭은 나이나이다.
 
앞선 일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나는 사람들을 웃기는 게 좋다. 웃음의 코드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적절한 변압과 뻔뻔함을 거치면 웃기게도 들릴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쓰고 싶다. 기괴하게 비틀어지고 허우적대면서도 자신만은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 빚어내는 무언가를 써서 사람들을 웃기고 싶다. 하지만 확신은 잘 없다. 그래서 이렇게 수상소감을 쓸 기회를 준 나이나이에게 정말 감사한다. 고마워요 나이나이. 자율경비 낸 보람이 있어요!
 
뱀발을 붙이자면 치킨 먹을 때 바닥 깔개로 일반 신문들은 넓고 중앙일보는 좀 좁고 나이나이가 제일 적절하다.
 
[오화섭 문학상-희곡분야] 수상소감

박웅(정외·96)
 
무엇보다, 오화섭 선생님의 성함을 딴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어 너무나 영광입니다. 부족함이 많은 글이었을진대, 차고 넘치는 단점들보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높이 사 주신 듯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최종철 교수님의 ‘셰익스피어’ 수업을 들으며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왜 4대 비극에 속하지 않는지부터 ‘햄릿’이 왜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그토록 매력적인가까지, ‘공저’라는 희곡의 첫 단추는 교수님께서 끼워주신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A Midsummer Night's Dream' 공연을 마친 날 연구실에서, 제자들을 위해 손수 방울토마토를 씻어주시던 교수님의 뒷모습을 잊지 못할 겁니다.
 
 ‘햄릿’을 예정된 비극으로부터 구하고 싶다는 건 실제로 내 자신의 소망이었습니다. 동질감을 통한 연민이었을 수도 있고 감정이입을 매개로 한 흠모였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네 삶의 예정된 비극은 멈출 수 없는 게 아닐까? 비극적 운명을 잉태하는 악마라는 존재는 사실 우리 자신이 아닐까? 인간은 결국 스스로의 비극을 자초하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그래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이라는 끝이 저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상념들이 극중 작가를 조종한 셈이 되어 나 역시 ‘햄릿’을 구해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쓴 웃음) 하지만 니체의 aphorism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마지막으로, 사회과학대학 극회 ‘토굴’에게 특별한 애정과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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