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인터넷 속도만 해도 3G로는 모자라 4G까지 만들어내는 현대인들에게 일반적으로 ‘느리다’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1년 사이 40만 명에 이르는 여행객들이 바로 이 ‘느림’을 찾아 전라남도 완도군에 위치한 한 섬으로 향하고 있다. 그 섬은 바로 청산도. 청산도에선 이동도, 저녁 재료를 구해 먹는 것도, 또 장례 절차마저도 느리다. 하지만 누구 하나 빨리하라고 재촉하는 이가 없다. 아마 느림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여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가을에서 겨울의 문턱을 바라보고 있는 11월 초, 기자도 여유를 찾아 청산도로 떠나기로 했다. 그것도 요즘 여행 ‘좀’ 가봤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공정여행으로 말이다. 
 
슬로시티 청산도
 
 청산도는 지난 2007년,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선정된 이후 2009년 여름에는 예능프로그램 『1박2일』에 등장해 푸른 바다와 정겨운 마을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슬로시티란 ‘느리게 살자’라는 전체 목표 아래 전통문화를 보호하고 자연 생태 유지에 앞장서고 있는 지역들로 이탈리아의 슬로시티 운동본부인 치타슬로(Cittaslow)*가 전 세계의 슬로시티를 선정·관리하고 있다. 슬로시티로 선정된 청산도는 섬의 다양한 경치를 즐길 수 있는 ‘슬로길’과 도시의 패스트 푸드 대신 우리 고유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슬로푸드 체험장’을 만드는 등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청산도가 ‘느림의 섬’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계기가 됐다. 기자는 이러한 청산도의 ‘느림’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공정여행’에 집중해 전체적인 여행 계획을 세웠다. 
 
공정여행이란?
 
 공정여행이란 공정무역의 개념을 여행에 차용한 것으로 여행지의 상권과 환경을 존중하는 여행 방식을 말한다. 이는 최근 전 세계 여행지들이 수많은 여행객으로 인해 그 본연의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다는 문제에 주목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이렇게만 말하면 공정여행이 정확히 어떤 여행인지 감을 잡기가 어려울 수 있으니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행 전문 블로그에서 ‘공정여행 십계명’을 가져와 봤다.
 
1. 현지인이 운영하는 숙소와 식당을 이용한다.
2. 저탄소 이동수단을 이용한다.
3. 일회용품 사용을 피한다.
4. 대형마트보다는 지역 시장을 이용한다.
5. 무리한 흥정을 지양하고 적절한 요금을 지불한다.
6. 사진 촬영은 사전 허락을 받는다.
7. 동물을 혹사시키는 투어는 참여하지 않는다.
8. 식물의 채취나 동물을 포획하지 않는다.
9. 여행지의 문화, 역사, 경제, 사회적 상황 등에 관심을 가진다.
10. 어린이의 노동을 착취하는 제품은 구매하지 않는다.
 
조금 불편해도 괜찮아
 
 ‘공정여행’을 목표로 잡았으면 최대한 탄소를 적게 배출하는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따라서 기자는 자가용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리지만 탄소를 절감하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장장 6시간에 걸쳐 겨우 청산도에 도착했다. 
 배를 타고 도착한 청산도의 도청항은 섬 안쪽으로 움푹 파인 모양으로 그 안은 수많은 어선으로 가득 차있었다. 기자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버스 시간에 맞춰 재빠르게 청산도 순환버스에 몸을 실었다. 청산도에서 이용할 수 있는 대중 교통수단으론 청산도 순환버스와 청산도 시티투어버스가 있다. 순환버스는 청산도 곳곳을 돌아다니는 일반 마을버스로, 청산도의 유명 여행지에 정류장을 두고 있어 현지 주민들뿐만 아니라 여행객들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시티투어버스는 오로지 여행객들을 위한 버스로 특정 여행지에 정차해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이때 가이드는 대부분 청산도 토박이들로 여행객들은 이들에게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현지인들은 가이드라는 일자리 창출 효과도 볼 수 있다. 이때 순환버스는 이르면 저녁 5시에 운행을 멈추고 시티투어버스는 하루에 3번밖에 운행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어 이용하는 데 불편함을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은 슬로시티 청산도다. 조금 느려도 최대한 버스를 이용하고 청산도의 슬로길 11코스**를 걸으면서 청산도 곳곳의 절경을 만끽해보는 건 어떨까. 공정여행은 ‘즐거운 불편’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이 방문한 여행지의 아름다움을 지켜주고 싶다면 여행하는 데 있어 조금의 불편은 즐거운 마음으로 감수해보자.
 
▶ 슬로길 중 제1코스를 걷고 있는 사람들.
 
곳곳에 숨어있는 느림의 미학
 
 순환버스를 타고 도착한 첫 번째 장소는 바로 영화 『서편제』의 촬영배경이었던 ‘서편제 길’과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지였다. 서편제 길은 청산도 슬로길 제1코스로 길 양쪽으로 낮은 돌담이 이어져 있고 돌담 옆에는 밭이 펼쳐져 걷는 사람에게 정겨운 느낌을 준다. 이 길 위에선 『서편제』 주인공들이 진도아리랑을 불렀던 것처럼 돌담 위의 스피커를 통해 진도아리랑을 들을 수 있다. 도시에선 컴퓨터나 스마트폰의 소음 때문에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적막 사이로 나지막하게 흐르는 진도아리랑을 듣다 보면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일행이 있더라도 잠시 말을 멈추고 천천히 길을 걸어보자. 걷다 보면 『봄의 왈츠』 촬영지인 하얀 집이 나온다. 이 집의 2층 전망대에 서면 도청항을 포함한 청산도의 서쪽 끝이 마치 전래 동화 속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음 목적지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청산도에만 남아있다는 ‘초분’이다. 초분은 죽은 사람의 관을 바로 땅에 묻지 않고 짧으면 1년, 길면 3년 정도를 볏짚을 덮어서 놔두는 임시무덤이다. 초분을 만드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죽은 사람이 객지에서 죽었거나  너무 가난해 제대로 된 묘를 마련하지 못해서이고 두 번째는 자식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사이 부모가 죽었을 때 죽은 부모를 임시로 묻어두기 위해서다. 죽은 부모를 초분에 묻음으로써 부모는 바다에서 돌아온 자식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볼 수 있고 자식은 죽은 부모의 장례를 자기 손으로 치를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청산도에는 부모의 초분을 찾은 자식이 초분에 소나무 가지를 꽂아놓는 풍습이 남아 있다. 소나무 가지의 색깔이 초록색인지 갈색인지를 통해 자식이 부모의 묘를 얼마 만에 찾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렇게 청산도의 초분에는 자식을 향한 부모의 기다림이 묻어있다. 이 기다림의 시간 또한 청산도만의 느림이 아닐까.
 이후에 찾아간 곳은 ‘범바위’였다. 범바위는 청산도에서 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으로 이곳의 경치를 한눈에 즐길 수 있어 청산도의 명소 중 하나로 꼽힌다. 높은 곳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즐기는 청산도의 풍경은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서울에서 1박 2일로 여행을 온 조순희(62)씨는 “범바위에서 청산도의 경치를 바라보는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며 “모처럼 진정한 휴식을 취하고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범바위에 위치한 전망대에는 빨간 우체통이 하나 놓여 있다. 이것은 전망대뿐만 아니라 청산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느림 우체통’으로 이 우체통에 편지를 넣으면 편지를 넣은 날로부터 1년 뒤에 발송된다. 1년 뒤 자신이 쓴 편지를 읽는다면 아마 지금 당신이 전전긍긍해 하고 있는 고민들이 그땐 아무렇지 않은 일이 돼 있을 것이다. 아니면 너무나 사소해 잊힌 기억들이 그때 가서 다시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이런 것들이 바로 ‘느림’이 주는 깨달음이 아닐까. 
        
청산도 사람들, 그들만의 여유와 정(精)
 
 공정여행의 가장 큰 목표 중 하나인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선 지역 주민들이 파는 지역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 고된 하루의 일정을 마친 기자의 저녁 메뉴는 자연산 전복이었다. 전복은 청산도의 대표 특산물로, 청산도가 속해있는 완도군은 전국 전복 생산량의 80%를 책임지고 있다. 도청항 바로 앞에는 각종 해산물과 이를 재료로 한 청산도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직거래 장터가 있다. 그곳에서 전복을 사면 능숙한 손놀림으로 전복을 손질하는 현지인들을 만날 수 있다. 그 모습이 신기해 사진을 찍으려던 기자는 문득 공정여행의 수칙이 떠올라 사진을 찍어도 될지 동의를 구했다. 현지인에게는 자신의 일상이 남의 카메라에 담기는 일이 불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에게 전복 손질하는 모습을 찍어도 괜찮겠냐고 양해를 구하자 아주머니는 이를 흔쾌히 승낙했다. 공정여행 십계명에 따라 현지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을 예약하면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목표 달성과 더불어 지역 어른의 넉넉한 인심 또한 느낄 수 있다. 민박집의 밥을 먹지 않더라도 몇 번씩 김치는 있는지, 방은 따뜻한지, 또 불편한 점은 없는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받게 되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도청항 근처 식당에 중년 아저씨들이 들어와 음식을 보따리 채 받아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기자가 의아해 하자 식당 주인 조소영(37)씨는 “바다에 김을 하러 나가시는 분들을 위해 도시락을 싸드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청산도 곳곳에서는 내 가족이 아니어도 서로 도와가며 사는 사람들의 정겨움과 여유를 느낄 수 있다. 조씨는 청산도에서 태어나 학교까지 다닌 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지만 청산도로 시집을 오면서 다시 이곳에서 살게 됐다. 그녀는 “청산도의 가장 큰 매력은 여유”라며 “정신없이 바쁜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고향 생각이 났다”고 한다. 그녀는 이곳 청산도에선 일한 만큼의 수확을 얻고 쉬고 싶을 땐 마음껏 쉴 수 있어서 지금 행복하단 말과 함께 다시 일을 하러 갔다. 
 
 이렇게 아름답고 여유로운 청산도인 만큼 이곳을 찾는 여행객의 수는 해마다 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청산도 공정여행의 필요성도 점점 커지고 있다. 기자가 경험한 청산도 공정여행의 핵심은 청산도의 자연환경을 지킴으로써 앞으로도 청산도가 그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행지가 될 수 있게 하는 것과 청산도의 미덕인 느림에 대해 이해하고 이를 진정으로 즐기는 것이었다. 청산도 시티투어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김철호(64)씨는 “이젠 1년에 30만에서 40만 명이 청산도를 찾는다”며 “물론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은 좋지만 여러 사람이 즐기는 자연인만큼 모두가 책임의식을 갖고 지켜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는 결국 지속 가능한 여행으로서의 공정여행을 강조하고 있었다. 조소영 씨 역시 “청산도를 찾고 소감을 말해주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인 것 같다”며 “첫째는 직접 슬로길을 걸어보고 진정한 청산도에서의 휴식을 누려보신 분들이고 둘째는 청산도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다른 유흥거리를 찾아 자가용만 타고 다니다가 ‘여기 왜 이렇게 볼 게 없냐’고 불평하시는 분들”이라고 말했다. 조소영씨의 이야기는 여행지의 문화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공정여행을 떠나는 것이 결국 여행자인 우리 자신을 위해 가장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특히 그 여행지가 시간도 잠시 쉬어가는 섬인 청산도라면 도시의 바쁜 일상에 지친 당신에게 더없이 좋은 휴식의 기회가 될 것이다.
 
*치타 슬로 : 이탈리아어로 slow city를 뜻한다.
**슬로길 11코스 : 청산도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걷기 코스. 총 11구간으로 이뤄진 코스가 청산도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글·사진 김예린 기자
yerinee@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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