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현주소 ; 위기와 본질을 담아내며

“너는 200년이 지나도 취업 못 해!”

우리대학교 국문과에 재학 중인 ㄱ씨가 경영대 ㄴ교수와의 식사자리에서 들은 말이다. ㄴ교수는 ㄱ씨가 듣는 교양수업의 담당교수였다. 졸업 후 국문과 대학원에 가겠다는 ㄱ씨를 비웃기라도 하듯 ㄴ교수는 인문계열의 낮은 취업률을 운운했고 ㄱ씨는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물을 훔쳐야만 했다.
 

문사철, 무엇이 위기인가?

‘위기’라는 단어는 현 상태에 심각한 문제가 있지만 아직은 개선의 여지가 있음을 내포한다. 하지만 이미 너무나 오랜 기간 대두돼온 ‘인문계열 위기론’이 앞으로 얼마나 ‘위기’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문(文)·사(史)·철(哲)을 중심으로 하는 인문계열 위기론, 이는 오늘날 대학캠퍼스 너머 우리 사회 전반에 새로운 위기들을 양산하고 있다.
우리대학교 문과대 소속의 A 교수는 “요즘은 대학들이 문과대학의 수업을 줄이거나 심지어 학과 통폐합을 통해 과 자체를 없애고 있다”며 “이는 대학들이 실적을 위해 업적이나 논문을 양산할 수 있는 실용학문만을 살리고, 문과를 폄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많은 대학들은 인문학의 개별 학과를 ‘교양학부’로 통합시키거나 심지어 학과 자체를 아예 없애기도 했다. 중앙대학교는 오는 2015년 1월 20일, 학부의 취업률과 대외 경쟁력 등을 평가해 경쟁력이 낮은 학부를 통폐합하거나 정원을 줄이는 개편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 같은 처사가 인문학과 같은 순수학문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우려한 학생들은 “인문학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성과 위주의 학술활동을 권장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인문학의 위기를 불러오는 큰 이유다. 이공계를 우선 지원하는 국가정책이 갈수록 심화되어 인문학의 물적·인적 인프라가 점차 약화되고 있다. 문과대의 B 교수는 “문과대와 이공대의 연구비 비중 차이가 1대 2천에 달하고 있다는 통계도 있을 만큼 문과대 교수들의 경우 연구에 어려움이 많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처럼 특정 분야에 대한 연구비가 줄어들면 그 분야에 대한 양질의 교육이 이뤄지기 어렵기 때문에 이로 인한 피해는 오롯이 학생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B 교수는 “우리대학교 문과대는 교내에서 가장 학생 수가 많은 단과대학 중 하나임에도 학교로부터 제대로 된 지원을 못 받고 있다”며 현실을 꼬집었다.
이러한 현실이 피부로 느껴지기 때문일까, 인문학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이은주(국문·12)씨는 “확실히 요즘에는 공학이나 경영학과 같은 실용적인 학문들이 더 인기가 있는 것 같다”며 “인문학적 지식만으로는 취업하기 어려운 현실 때문에 실용적인 학문들을 복수전공하거나 부전공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한편, A 교수는 “회사에서도 채용 시에 인문계열 출신 대학생들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인다”며 대내뿐 아니라 대외적 분위기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대학계열별 취업현황 (출처 교육통계연구센터)


지난 2013년 교육통계연구센터가 발표한 「대학 계열별 취업 현황」에 따르면 인문계열의 취업률은 50.6%로, 총 7개의 계열 중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한 예체능계열의 취업률(46.1%) 다음으로 가장 낮았다. 오지원(중문·11)씨는 “취업 준비를 시작하면서 인문학의 위기를 가장 크게 실감 한다”며 “주변에도 인문학 전공을 살려 취업을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고 전했다. 상대적으로 높은 취업률을 기록하는 의약계열(70.8%), 공학계열(65.6%), 자연계열(57.9%) 소속의 학생들조차 취업 시장에서 인문계의 위축을 인식하고 있다. 김민성(기계·08)씨는 “이공계가 인문계에 비해 취업에 있어서는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 한다”며 “요즘은 사회가 먹고 사는 데만 급급하다보니 인문학이 다소 등한시되는 것이 현실”이라고 전했다.
 

어쩌다가 ‘문송’해졌을까?

최근 인문계열 학생들 사이에서는 ‘문송합니다’라는 신조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뜻의 이 신조어는 인문계열 학생들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문과대 ㄱ아무개씨는 “처음 이 단어를 들었을 때 굉장히 안타까웠다”며 “모두가 마케팅을 할 줄 알아야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직무가 외국어에 능통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으레 그런 능력을 함양해야 생산적인 노동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씁쓸할 뿐”이라고 전했다. ‘인문계 구십 프로(90%)가 논다’는 뜻의 ‘인구론’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날 지경이니 인문학의 위기는 단지 웃어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렇듯 인문학이 위기에 처하게 된 원인에 대해 우리대학교 문과대 소속 C 교수는 “인문학의 위기는 결코 개인이 아닌 사회의 책임”이라며 “인문학을 등지고 지나치게 기술이나 실용성만을 강조하는 우리 사회는 결국 국민들을 우민화하는 셈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C 교수는 “이런 식의 사회풍토는 개발독재와 천박한 자본주의에 기인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인문계열의 자체적인 반성도 필요하다는 주장도 일고 있다. 오씨는 “이런 신조어가 생겨나는 사태에 대해 문제의식조차 없는 인문계 학생들도 많다”며 “제대로 된 인문학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해 전문성도 의식도 없는 인문학도들이 양산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전했다.
이에 B 교수는 “학생들이 이런 위기 상황을 자각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할 강단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며 “상당수의 인문계 학생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B 교수는“인문계열 출신 학생들을 ‘파리 목숨’과도 같이 만든 우리 사회에서 철학과 졸업생들은 논술 첨삭강사 밖에 길이 없다”며 삭막한 현실을 개탄했다.

서가의 인문 영역에 꽂혀 있는 책들

인문학에 대한 외면은 인간에 대한 외면

그렇다면 인문학은 본질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인문학의 위기가 불러올 사회적 문제는 무엇일까?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봉착하고 있는 여러 문제들과 관련이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잔혹범죄 사건들은 인간성의 상실을 의심케 하고, 세월호 사건 등을 통해 우리는 공동체적 공감능력과 국가의 공공성의 한계를 느껴야 했다. 이러한 사회 속에 살아가는 국민들은 궁극적으로 불행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지난 2014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간한 「국민복지 수준의 국제 비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국민행복지수는 34개의 OECD회원국 중 최하위인 3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처럼 불행한 사회의 저변에는 인문학에 대한 천대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C 교수는 “개인의 행복은 인문학의 영역인 자기성찰과 타인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통해 얻을 수 있다”며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개선하고 장기적인 비전을 갖기 위해서라도 인문학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인문계열의 부활을 꿈꾼다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이런 말을 했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인간이 되는 것이 낫고, 만족스러운 바보가 되기보다는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다”

풍족한 생활보다는 생각하고 사유할 줄 아는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밀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엔 배부른 돼지도, 배고픈 소크라테스도 존재하지 않는다. 풍족한 생활을 하는 돼지일지라도 정신적 허기를 느끼고 있으며, 탐구하는 소크라테스는 물리적 궁핍 속에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대학교 문과대 D 교수는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면 인문학은 경제적 여력이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학문이 된다”며 “결과적으로 취미로 하는 인문학만이 살아남아 저항성이나 날카로운 분석능력과 같은 인문학의 본질을 잃게 될 것은 물론, 우리 사회는 그 깊이와 가능성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A 교수도 “단순한 취업에 대한 문제의식만이 아니라 인문학 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고 전했다.

소크라테스의 초상


얼마 전, 기자는 지인으로부터 “100년 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분야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기자는 머릿속에 그려본 100년 후의 세상에는 신체의 일부처럼 느껴지던 스마트폰도, 노트북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민을 거듭하던 기자는 A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서 비로소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A 교수는 “이 세상에서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은 말과 글”이라며 “결국 모든 첨단의 테크놀로지도 사회 전반에 전달되기 위해서는 말과 글을 통해야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말과 글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다면 어디서든지 써먹을 수 있는 자신만의 무기가 생기는 셈”이라고 인문계열 학생들을 격려했다. 우리나라에 ‘통섭’ 열풍을 불러일으킨 주역인 최재천 교수도 “모든 학문은 결국 인문학에서 시작해서 인문학으로 마무리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학문이란 결국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들의 지적 활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테크놀로지가 얼마나 더 발전하든 그것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바꿔놓지는 못할 것이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에 대해 공부하는 인문학이야 말로 인간사회에 영원히 남을 학문인 것이다. 바야흐로 죽어가는 소크라테스를 살리고 돼지에게 소크라테스가 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다.

글 강달해 기자
dalhae7070@yonsei.ac.kr
사진 유자헌 기자
jyoo29@yonsei.ac.kr
<자료사진 교육통계연구센터, 데비앙아트 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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