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숨결을 하동에서 느끼다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 …(중략)… 이 바람에 고개가 무거운 벼이삭이 황금빛 물결을 이루는 들판에서는, 마음놓은 새떼들이 모여들어 풍성한 향연을 벌인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 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여름의 막바지인 8월의 끝에 서 있을 즈음이었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드넓은 평사리 땅을 찾아 떠나는 그날은 하늘에 짙은 구름이 가득했다. 한순간에 모든 걸 잃고 평사리를 떠나야만 했던 서희의 마음이 그러했을까.
긴 여정이기에 새벽같이 일어나 카메라 하나만을 단출하게 들었다. 무거운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뒤로한 채 기자는 여정을 시작했다. 경상남도 하동행 버스를 타고 4시간쯤 걸려 하동터미널에 도착해 내리자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한적한 시골의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 평사리 공원까지 버스로는 갈 방법이 없어 택시를 잡아탔다. 하늘이 파랗지 않다고 투덜거리는 기자에게 택시 아저씨는 “길 따라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네~”라며 구수한 사투리로 말을 걸어 오셨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유역에 사는 하동 사람답게 아저씨의 말에는 두 지역의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경상도 말씨가 더 강하긴 했지만, 억양이 강한 두 지방의 말이 섞여있어 그런지 어조가 한층 강하게 들렸다.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평사리 공원에 도착해 있었다.

 

▲ 하동군 악양면에 위치한 평사리

사실 기자에게 하동은 처음 온 곳이 아니다. 어린시절 부모님을 따라 벚꽃이 만개하던 봄날, 이곳을 찾았던 기억이 있다. 섬진강 앞에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니 하동은 다시 찾아도 꼭 처음 찾았던 그 봄날 같았다.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는 언제 봐도 편안하다. 기자는 섬진강변에 드러눕고 싶은 마음을 접고 걸음을 옮겼다.

“월선아! 니는 내 목구멍에 걸린 까시다. 우찌 그리 못 살았노. 못 살고 와 돌아왔노.”
…(중략)…
“생각지 말자. 그만두자. 무슨 수가 있겄노.”
목소리를 떨어뜨리며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 월선을 별안간 꽉 껴안았다.
“월선아!”
“야.”
“우리 어디 도망을 가까?”

여행의 시작은 지금은 고즈넉한 개치나루터에서부터였다. 한때는 강과 강 사이를 넘나들었을 나룻배가 지금은 잔디 위에서 오랜 휴식을 취하고 있다. 하동읍과 화개장터 가운데쯤 위치한 개치나루터는 화개장터로 가는 장배가 드나들던 곳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평사리를 떠나거나 돌아오는 길목이 됐던 곳. 봉순이와 길상이가 읍내로 오광대 구경을 가고, 용이가 사무치게 그리웠던 월선이 막배를 타고 섬진강을 넘었던 곳이기도 하다.

‘만석지기 두엇은 능히 낼만하다’

평사리 공원을 넘어 도로를 따라 쭉 걸어가다 보면 마침내 평사리의 드넓은 들판과 마주하게 된다. 박경리 선생이 만석지기 두엇은 능히 낼만하다고 묘사한 그곳. 여름의 끝이라 황금 물결 대신 푸른 일렁임이 기자를 맞이했다. 예전에 평사리 들판을 찾았을 때 봤던 황금 들녘과는 또 다른, 여름의 끝자락에 서 있는 싱그러운 들판의 모습이었다. 아무도 없는 탁 트인 푸른 들판에 서 있으니 모든 잡념이 사라지는 듯했다. 1960년대 말 박경리 선생은 딸과 함께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 드넓은 평사리 들판을 발견하고 소설 『토지』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 영감을 느껴보기라도 하듯, 기자는 아무도 없는 들판 옆의 길에 드러누워 한참동안 하늘을 바라봤다.
다시 걸음을 옮겨 걷다 보니 들판 한가운데 나란히 선 커다란 소나무 한 쌍을 만났다. 서희와 길상이 또는 월선이와 용이 소나무라고도 불리는 악양*의 상징인 부부송이다. 사실 누가 이것을 어떻게, 왜 심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부부라는 이름답게 나란히 선 소나무를 바라보면 무언가 애틋한 마음이 자연스레 피어오른다.

▲ 나란히 서있는 부부송

들판을 지나 최참판댁 마을로 올라가는 길에는 작은 호수인 동정호가 있다. 중국의 동정호만큼 아름답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정호를 바라보니 이인로의 연작시 「송적팔경도(松廸八景圖)」 중 하나인 「동정추월(洞庭秋月)」이 생각났다. 이 조그만 동정호에 잠겨 있는 가을 달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밝은 달이 떠오른 가을밤에 마주하지 못해 아쉬울 뿐이었다.

▲ 비가 그친 후 운치있는 동정호의 모습

洞庭秋月(동정추월) / 이인로

雲端澰澰黃金餠 구름 끝 잔잔한 황금병
霜後溶溶碧玉濤 서리 뒤에 출렁이는 벽옥의 물결
欲識夜深風露重 밤 깊어 바람 이슬 무거운 줄 알고자 하거든
倚船漁父一肩高 배에 기댄 어부의 한쪽 어깨 높아라

최참판댁도 식후경

최참판댁 마을이 시작되는 길목에 들어서면 『토지』의 배경임을 알리는 초석이 웅장하게 서있다. 최참판댁과 평사리 사람들을 만나기 전, 기자는 출출해진 배를 채우기 위해 아무 가게에나 들어섰다. 평일이라 그런지 문을 연 가게도 별로 없고, 마을 자체가 한산했다.

▲ 박경리의 작품 『토지』를 기리는 기념비

“놀래라. 나는 놀음판이 끝난 줄 알았구마.”
“끝은 안 나도 술손님은 왔인께 술이나 주소.”
가겟방으로 올라간 용이는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켠 뒤 안주를 집을 생각은 않고 술잔만 내밀었다. 두 잔, 석 잔, 넉 잔을 마시고도 술사발을 내밀었다.

“아주머니! 감자전 하나, 파전 하나랑 막걸리 주세요. 막걸리 맛있죠?” 아주머니는 “막걸리가 시원하니 아주 맛있어~”라며 군침이 도는 전과 함께 가져다 주셨다. 함께 간 동료 기자와 함께 술잔을 계속해서 기울이니 읍내를 구경 온 봉순이와 길상이인 마냥 신이 났다. 용이는 월선이 생각에 안주를 집을 생각을 하지 않고 술만 들이켰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전을 먹어댔다. 그런 우리를 보고 아주머니는 서비스로 이것저것을 권한다. 우리는 전을 몇 장을 더 먹고 나서야 식당을 나왔다.

모든 일은 그곳에서 시작됐다

소설 『토지』의 모든 사건은 최참판댁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면 길 중턱에 거대한 최참판댁이 자리하고 있다. 실컷 먹어 한껏 부른 배를 부여잡고, 최참판댁 마루에 드러누워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있자니 ‘여기가 천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최참판댁은 소설 속의 묘사를 그대로 옮겨다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참판댁의 기둥인 최치수가 기거했던 사랑채, 윤씨부인과 서희가 지키던 안채, 길상이와 다른 하인들이 살았던 행랑채, 사건의 첫 시작인 별당 아씨가 잠시 머물렀던 별당 등 소설이 그대로 살아난 듯했다. 특히 기자는 버드나무가 길게 드리워진 아름다운 별당에서 오래 머물렀다. 아리따운 별당 아씨가 머물만한 예쁘고 한적한 공간이었다. 사랑을 찾아 떠난 별당 아씨와 구천이가 생각났다. 월선이와 용이만큼 안타까운 사랑이다.

▲ 별당아씨가 기거했던 아름다운 별당

그날 밤 누가 도장문을 열어주었는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중략)…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러갔는지 달이 떠 있었다. 이름조차 기억하기 싫은 북쪽 끄트머리 어느 깊은 골짜기에 별당아씨를 묻었던 그날 밤의 달이, 얼음조각 같이 써늘해 보이는 달이.
…(중략)…
‘여보? 나 명년 봄까지 살 수 있을는지...’
‘......’
‘산에 진달래가 필 텐데 말예요. 그 꽃 따 화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최참판댁의 높은 마루에 올라서면 지금까지 지나왔던 모든 길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끝없이 넓은 들판부터 그 가운데 서 있는 부부송, 작은 동정호와 그 뒤로 펼쳐진 산맥, 산맥 따라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까지. 저녁노을이 조금씩 물들어가는 시간에 바라보는 그 풍경은 잊을 수 없는 장관이었다. 기자는 카메라에 담는 것도 잊은 채 바라보았다. 뒤늦게 카메라에 담긴 모습은 눈이 담아낸 모습을 따라가지 못했다.

최참판댁을 나와 주위의 여러 초가집들을 들렀다. 토지 속 주요 인물들인 평사리 주민들이 살던 집들이다. 끝내 용이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강청댁의 집, 최치수를 죽인 살인자의 아내로 몰리게 된 임이네, 욕심 많은 김평산과 착한 함안댁이 살던 집 등 소설 속 인물들이 곧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들의 집을 구경하고 언덕 끝에 오르니 김 훈장의 집이 있었다. 김 훈장의 집 앞에 있는 나무 그네에 앉아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아래로 최참판댁 마을이 한눈에 보여 기자가 올라온 길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었다. 시간이 꽤 흘러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기자는 올라올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물방앗간과 삼신당을 발견했다. 대숲과 꽃나무 등으로 우거진 모습이 귀녀와 칠성이의 밀회를 보여주는 듯했다.

▲ 귀녀의 모의가 시작됐던 물레방앗간

그것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의 경우보다 더 각박한 행위였었다. 더러는 물방앗간에서, 풀숲 혹은 바위 뒤켠에서, 그러나 보다 빈번히 삼신당을 이용하여 귀녀와 칠성이는 제각기 간절한 기대와 야망에 불타는, 육체적으로는 불모지와 다름없는 관계를 계속하고 있었다.

‘바람은 서러운 추억의 현을 가만가만 흔들어준다’

최참판댁 마을을 나와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길에 터미널로 데려다 줄 버스마저 오지 않았다.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지나가는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섰다. “학생들 어디까지 가! 태워줄게” 기자는 환호성을 지르며 차를 얻어 탔고, 화개장터 터미널로 가는 길까지 차 주인인 아주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몇 년 전에 서울에서 하동으로 이사 오셨다는 아주머니는 하동의 한적함이 좋다고 말하셨다. “복잡한 서울이랑은 삶이 다르지. 이제 나이도 들었고, 조용한 곳에서 취미생활 하는 것만큼 행복한 게 없어” 기자는 맞장구를 치며 이야기를 들었다. “박경리 선생이 왜 이곳을 사랑했는지 알 것 같아” 기자는 겨우 두 번 방문을 했지만 이곳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했다.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 덕분에 화개장터에 무사히 도착해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서희가 윤씨부인을 따라 자신의 땅을 둘러본 것과 같이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설 『토지』와 처음 만났던 추억을 하동 평사리에서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귀한 시간이었다.『토지』의 인물들은 추억 속에 갇혀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여전히 그곳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쓸쓸하고 안쓰럽고 엄숙한 잔해 위를 검시(檢屍)하듯 맴돌던 찬바람은 어느 서슬엔가 사람들 마음에 부딪쳐와서 서러운 추억의 현(鉉)을 건드려주기도 한다.

*악양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의 악양

 


글 김은샘 기자
giantbaby112@yonsei.ac.kr

사진 강달해 기자
dalhae7070@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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