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대학교 김모임 명예교수를 만나다

 


기자가 찾아갔을 때 김모임 명예교수(간호대·간호행정학)는 제주도에서 작은 텃밭을 가꾸며 그림 그리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노년의 전원생활 같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제자들 덕분에 김 교수의 하루는 짧기만 하다. 쟁쟁했던 직위들을 모두 내려놓고 제주도에 들어갔어도 후배들과 제자들에게 김 교수는 여전히 든든한 후원자이자 스승님이 되어주고 있다. 연세인의 스승이자 여성들의 멘토이신 우리대학교 김모임 명예교수를 만나봤다.

간호대학에 재산을 기부한 김 교수

땅은 없어도 집이 많아 행복하다

지난 1955년에 우리대학교 간호대학에 입학한 김 교수는 사실 전 보건복지부 장관, 전 대한간호협회 회장, 전 연세대학교 간호대학 학장, 제11대 국회의원, 여성정치연맹 부총재,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등 어마어마한 이력의 주인공이다.

우리대학교의 자랑스러운 동문인 김 교수는 얼마 전 우리대학교 간호대학에 26억 원을 기부하는 등 일생을 우리대학교의 발전을 위해 힘써왔다. 가진 재산들은 학교에 기부했지만 김 교수에게는 ‘제2의 집’들이 있어 허전하지 않다. 그녀는 자신이 일생을 바쳐 일한 우리대학교나 한국여성개발원 등과 같은 옛 일터를 지날 때마다 “나는 이렇게 집이 많아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낀다”고 말했다.


병마를 이겨내고 백의의 천사가 되기까지

6·25전쟁 직후, 김 교수는 어렵사리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실습과정에서 병원감염으로 인해 결핵을 앓았다. 김 교수는 “그때는 워낙 일손이 부족해서 학부생들도 병원에서 일해야 했다”며 “나 또한 병원에서 일하다 결핵에 걸리고 말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몸이 따라주지 않아 간호사의 길을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초지일관의 결심은 투병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녀로 하여금 학업에 계속 매진하게 했다.
하지만 병환이 점점 깊어지자 김 교수는 22살의 나이에 폐절제술이라는 어려운 수술을 받아야 했다. 김 교수는 “수술을 받을 때 수술이 성공해서 살게 되면 더욱 열심히 공부할 것이고 만약 죽게 된다 해도 여생을 고통 속에 사느니 인생이 끝난 것을 즐겁게 생각하겠다는 마음으로 임했다”며 그때의 심경을 전했다. 이 후 그녀는 50년을 남들의 70% 정도의 폐기능으로 살아가면서 천식이나 감기 등으로 인해 고생해야 했지만, 그 속에서도 고통을 이겨내고 간호계의 한 획을 그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간호사의 길을 고집했던 이유에 대해 김 교수는 “간호사라는 직업은 거짓말을 못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김 교수는 “간호사는 물건의 가치를 부풀려서 이윤을 창출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인 데다가 남을 도와주는 일이기 때문에 계속 그 길을 걷고 싶었다”며 “희생과 봉사를 실천하는 간호사로 살아가면 인생을 마무리하는 순간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희생과 봉사의 리더십을 실천하다

우리대학교 간호대가 간호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김 교수는 “우리대학교 간호대는 간호계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한 곳이기에 간호계의 역사가 곧 연세대학의 역사라고 생각한다”며 “오늘날까지 그 영향력을 끌고 온 주체가 바로 우리학교의 학생들이고, 나도 그중의 하나”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우리대학교는 어떻게 이토록 간호계에 큰 영향력을 지닐 수 있게 됐을까? 이에 김 교수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희생봉사를 강조하셨던 스승님들의 교육 덕”이라고 대답했다. 이어 김 교수는 “우리대학교 전체를 통틀어 대한민국 사회 내에서 독보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는 단연코 간호라고 생각한다”며 간호대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앞으로도 우리대학교의 영향력이 계속되기를 바란다는 김 교수님께서는 여전히 간호대 후배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고 있다.


경계를 넘나드는 선한 영향력

김 교수는 세브란스 병원을 위해서도 애를 많이 썼다. “일류병원으로 평가받는 병원을 만들기 위해서 가정간호사업소, 호스피스, 직장 내 어린이집 등을 신설했다”는 김 교수는 간호대뿐 아니라 우리대학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나 우리나라 최초의 직장 내 어린이집인 ‘세브란스 어린이집’은 김 교수의 주도적인 지휘 아래 설립됐다. 이에 김 교수는 “간호사는 보통 5년이 지나야 이윤을 창출할 수 있을 정도의 인력으로 성장하는데, 그때쯤에는 결혼과 출산을 이유로 일을 그만두는 간호사들이 많았다”며 “여성 간호사들이 계속해서 전문 간호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려면 직장 내 어린이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그 외에도 김 교수가 여성의 지위 신장을 위해서 한 일은 셀 수 없이 많다. 국회의원 재직시절, 김 교수는 헌법에서는 남녀가 동등하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헌법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법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김 교수는 『한국여성개발원법』을 발의해 행정, 연구, 국제관계 등에 여성들이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이렇게 국회의원으로서 입법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경력은 김 교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간호대 입학 전에 김 교수는 한때 법대에 진학해 법조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부모님의 권유로 간호대에 입학하기는 했지만, 법대에 입학한 친구들을 바라보며 가끔 스스로 낙오자가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는 김 교수는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법학을 공부하지 않은 나에게 오히려 국회의원으로서, 장관으로서 법을 만들 수 있는 복을 주셨고 그 결과 법과 가깝게 살아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나,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의 김 교수

우리대학교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냐는 질문에 김 교수는 “연세대학교는 곧 나 자신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렇기 때문에 비록 많지는 않지만 연세대학교에 기부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학교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드러냈다. 얼마 전, 개인 재산 26억 원을 기부한 김 교수는 “적은 돈이지만 인류와 국민의 건강에 이바지할 수 있는 곳에 쓰였으면 좋겠다”며 “나아가 간호학이 더 발전하는 데 기여했으면 좋겠다”는 소감을 전했다. 사실 김 교수가 우리대학교에 기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과거에도 김 교수는 세브란스와 간호대학에 10억 원을 기부한 바 있다.

이처럼 학교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김 교수는 후배들을 향한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후배들이 무엇인가를 짧은 시간 내에 이룩하기 위해서 몸을 버릴 정도로 과욕을 부리지 않으면 좋겠다”는 김 교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에 충실하다 보면 반드시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건강”이라는 애정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제주도의 현무암 담장과 틈에 핀 꽃 한 송이

제주도에서는 여기저기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 돌멩이, 현무암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김 교수와 함께 아침 산책을 하던 정원에도 그 새까맣고 볼품없는 돌멩이들이 담장을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구멍이 나 있지 않았다면 담장이 쓰러졌을지 모른다”며 “구멍을 통해 바람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담장이 매서운 바람에도 견딜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김 교수를 보면서 어쩐지 그녀가 이 현무암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여성, 전쟁세대, 결핵 환자, 그리고 간호사라는 어려움으로 인해 무너지기보다는 오히려 그 영역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어줬던 듬직한 담장이자 스승이 돼주신 김모임 교수. 그로 인해 시작된 훈훈한 바람들이 더 세차게 세상을 감싸안기를 바란다.

 

 

글 강달해 기자
dalhae7070@yonsei.ac.kr
사진 조주연 기자
piseek@yonsei.ac.kr

<자료사진 우리대학교 간호대학 홈페이지, 동문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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