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케이블TV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방영된『코스모스』, 모두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30여 년 전인 1980년대 방영된『코스모스』보다 더 생생해진 CG와 칼세이건 대신 천체 물리학자인 닐 타이슨의 해설로 총 14회 방영되었다. 그 중「다중 우주론(Multi Universe Theory)」이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우주를 여행하다가 블랙홀 속으로 빠져들면 또 다른 세상이 창조된다는 이론. 결국 지금 우리의 은하계도 블랙홀 속일 수 있다는, 우리가 그동안 고민해온 타임머신의 모순 문제도 해결되는 듯 했다. 또 다중 우주 속에는 또 다른 지구의 '나' 와도 만날 수 있는데, 인간을 구별짓는 유전자 조합은 유한하지만, 또 다른 우주는 무한히 생성되므로 같은 유전자 조합을 가진 나를 무한명 만날 수 있다는 논리는 수학적으로도 명쾌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현재 ‘다중 사회’ 속에 살고 있다.

미디어가 만들어내고, 국가도 만들어 내고, 우리 스스로도 만들어 내는 다중의 가상사회(假想社會)를 볼까. 아프리카에는 불룩 튀어나온 배, 눈물로 범벅된 얼굴에 파리 떼가 달라붙은 어린이들이 있다. 북한의 시장은 왜 그렇게 더럽고 진흙탕 바닥인지, 주민들은 왜 그렇게 초코파이에 열광하는지 불쌍한 생각이 든다. 미국에는 슈퍼마켓을 터는 난폭한 모습의 흑인들이 몰려다니며 이슬람 사람들이 옆에 오면 언제 자폭할지 몰라 불안해한다. 미디어 속 늘씬한(?) 백인 모델을 보며 동양인은 콤플렉스를 가지게 된다. 타집단에 대한 이런 고정관념(Stereotype)은 미디어가 만들어 낸 오래된 가상사회의 단면이다.


우리 주위를 좀 더 볼까. 여성들은 영화배우처럼 보석으로 치장하고 예쁘게 눈을 떠 올려보며, 장동건 닮은 친구가 멋진 이벤트를 마련하고 구혼을 할 거라 믿는다. 남성들이 ‘썰매 타고 알래스카 횡단하기’ 같은 버킷리스트를 가지게 된 것도 미디어가 만들어 낸 모방의 가상 사회의 산물일 것이다.


국가가 만드는 공포의 가상사회도 있다. 어느날 한 일간 신문은 ‘작은 결혼식’을 기사화 하며 우리 결혼문화의 잘못된 점에 대해서 의제설정을 하기 시작했다. 꽃장식에만 3천만 원이 넘는다느니, 부모님 퇴직금도 모자라 대부분 은행 빚까지 떠안게 되었고 결국 혼수 문제가 이혼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생생한 사례를 들어 가면서 기사화 했다. 이어진 의제는 교육계의 촌지 문제였다. 다음으로 교실내 왕따 문제를 다루었다. 청년 취업문제가 마치 교육의 낭비로 이어지고, 대학의 책임인 것으로 간주된다. 또한 서울역 노숙자 문제에서 시작하여 동네 주폭(酒暴) 문제를 대서특필하였고, 이어 동네 사이코패스까지, 이런 기사들이 우리 사회를 살기 힘든 끔찍한 세상으로 몰고 갔다. 이렇게 사회의 불안과 공황 사태까지 몰고 갔던 이 신문의 어젠다는 경찰력이나 행정력이 동원되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래 전 영국의 한 문화이론가가 말한것처럼, 국가를 대신해 보수언론은 의제설정을 통해 공황사회를 연출하면서 국가권력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정부는 대중적 동의를 확보하고 국가의 사회적 통제력과 지배적 위치를 강화한다. 배후에는 물론 경찰, 검찰, 그리고 국가가 있고 미디어는 그저 이차적 연출자일 뿐이다.


우리 스스로도 가상사회를 만든다. 신문은 읽지 않고, 온라인속 익명의 가상사회 속에서 증오의 댓글을 달며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카카오톡이라는 가상사회(Virtual Community)를 만들어 그 속에서 욕구를 충족한다. 또 ‘내 옆의 친구는 나의 친구가 아니다. 나는 더 좋은 학교를 다녔을 텐데, 지금 여기는 내 세상이 아니라 잠시 머물고 있을 뿐’ 과 같은 형식으로 죽는날까지 자신이 만든 가상사회(Pseudo-Environment)를 벗어나지 못한다.


진짜 세상은 어디일까? ‘사랑하는 이 순간’,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이라고 말하는 시인도 있다. 어쨌든 칼 세이건은 자신의 책『코스모스』첫 장에 아내에게 다음과 같이 헌사했다. ‘이 순간 당신과 함께 산다는 것이 나의 기쁨이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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