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충청도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전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으로 대형 태풍이 불어 닥친 듯 한바탕 회오리바람에 휩싸였다. 그야말로 자발적으로 참여한 그 수많은 인파와 환호성 못지 않게 참으로 많은 화제를 남기고 또 엄청난 화두를 던지고는 교황은 다시 로마로 돌아갔다. 이른바 ‘교황앓이’니, ‘프란치스코 현상’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진 것처럼 표현하기 어려운 기막힌 현상이 일어나고 말았다.
모든 방송, 신문 등 온갖 매체들은 교황 방문 동안 그에 대한 기사 아니고는 빛을 발할 수 없으리만치 대부분 그에 관한 뉴스로 도배했다.

“그는 작았다. 차도 작고 숙소도 작고 방명록에 남긴 글씨까지 작았다. 그럼에도 그는 컸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낮추는 겸손이 컸고 아픈 사람을 끌어안는 가슴이 컸고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크고 깊었다.”(중앙일보 백성호 기자) 이 하나의 문단 속에 4박 5일 교황의 행보와 인품이 모두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교황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저파(低派)’(경향신문 조국 칼럼)라는 색다른 주장까지 나오기도 했다.

교황, 참으로 대단한 화두를 던졌다. “이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기를 빈다”라는 염원이나, “막대한 부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라는 비판은 사회·경제적 약자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원없이 베푸는 것이었다. 격화일로에 있는 빈부격차, 소통의 부재로 갈수록 비참해지는 억울한 사람들을 모두 껴안아 주다가 교황은 떠났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런 화두를 던졌으니 앞으로 당신네 지도자들이 자신이 지적한 모든 것들을 제대로 해결하여 평화와 화합, 정의로운 세상을 이룩하는 실천을 행하라고 주문했다.

교황이 떠난 대한민국, 과연 무엇 하나라도 바뀌는 것이 있을까. 청와대나 여·야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변화하는 것이 없을 것만 같아 더욱 마음이 무겁다. 200년 전에도 위대한 실학자 다산은 교황에 못지 않은 의미 깊은 화두들을 우리에게 던진 바 있다.

“국량의 근본은 용서해주는 데 있다. 용서할 수만 있다면 좀도둑이나 난적(亂賊)이라 할지라도 아무 말 없이 용인할 수 있을 것인데 하물며 보통 사람에 있어서랴?”(『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라고 말하여 화해와 평화의 기저에는 용서가 있다고 한 것이다. 이 다산의 말씀을 교황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말했다.

용서를 통하여 난국을 타개하고 민심을 평정한 다산의 유명한 일화를 하나 더 소개해 본다. 다산이 곡산 부사로 부임할 당시, 이전 원님의 횡포에 대항하여 농민들을 주동한 이계심이라는 사람에게 체포령이 내려졌 있었다. 다산이 곡산 땅에 들어서자 호소하는 글을 들고 길을 막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계심이었다. 아전이 급하게 말하길 “이계심은 오영에 체포령이 내려진 죄인입니다. 법에 따라 붉은 포승으로 결박하고 칼을 씌워 뒤따르게 함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라고 하자, 다산이 물리치며 이계심에게 말하기를 “한 고을에 모름지기 너와 같은 사람이 있어 형벌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백성을 위해 그들의 원통함을 폈으니, 천금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너와 같은 사람을 얻기가 어려운 일이다.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한다”라면서 불문에 부쳤다. 용서와 화해의 힘은 이러한 것이다. 우리의 최근 정치사에서 이렇게 백성의 편에서 귀를 귀울인 미담을 들어 본 적이 있었는가?

한편, ‘저파’인 교황처럼 다산도 겸양만이 가장 큰 인간의 미덕임을 강조했다. “스스로 높다고 여기는 사람은 남들이 끌어 내리고 스스로 낮다고 여기는 사람은 남들이 들어올려준다.(自上者人下之 自下者人上之 : 『주역사전』·謙의 해석)”라는 천고의 명언을 남긴 것이다.

우리 지도자들은 대부분 다산의 말씀에 따르지 않았지만, 오직 교황은 다산의 뜻을 따르는 분 같아서 더 돋보였던 것이 아닌가. 실천이 없는 논리나 주장은 무용한 일이니 오직 실천에 옮겨야만 의미가 살아난다던 다산을 교황만은 따르고 있는 것 같아 더 존경스러웠다. 태풍처럼 몰고 온 교황의 화두, 다산과 교황을 본받아 행동으로 옮겨 정의에 바탕을 둔 화해와 평화의 세상이 오게 하면 어떨까. 이것이 교황방문을 계기로 더욱 절실해진 지도자의 덕목이다.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