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눈물의 시드니 정착기>

‘영국 청년들은 갭이어(gap year) 라는 것을 보내.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잠시 학교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서 꿈을 찾기 위해 다른 일을 해 보는 거야. 나는 워킹홀리데이(아래 워홀)로 나만의 갭 이어를 보냈어. 내가 워홀을 가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평소의 나로 살았을 거야. 그건 매우 끔찍한 일이야!’
지난 2013년 1월, 10년지기 친구와 약속을 했다. ‘우리 올해의 마지막인 12월 31일은 에펠탑 앞에서 보내자!’
이게 바로 내가 워홀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하여 2013년 6월 25일, 다른 대학생들과 다를 바 하나 없었던 나는 영어, 도전, 돈, 여행 등의 목적을 한 번에 이루기 위해 워홀 길에 올랐다. 마침 친오빠가 호주에서 성공적인 워홀을 보내고 있었기에 나 역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한 워홀은 순탄치 않았다. 남반구인 호주의 7월은 한겨울이었고 관광지로 먹고 사는 도시답게 고용의 수요가 현저히 줄어있었던 상태였다. 어떻게든 겨울만 버텨보자는 식으로 7월 내내 직업을 구하기보다는 외국인 친구들과 어울리며 영어공부를 한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그리고 8월 초, 도저히 직업이 구해지지 않자 기분전환을 위해 뉴질랜드로 10일 동안 여행을 다녀왔다. 그곳에서의 기억은 아직까지도 생생할 만큼 너무나도 행복했다. 그러나 여행경비로 수중의 돈을 대부분 써버렸기 때문에 나는 정말 빈털터리 신세가 됐다. 이제 정말 일을 해야만 했다. 시드니로 돌아온 후, 일단 당장 다음 주 방값이 없었기에 필사적으로 일거리를 구하기 위해 정말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오프라인, 온라인을 넘나들며 하루에 50군데씩 지원도 하고, 매일매일 초조한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은 구해지지 않았다. 당일 알바로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가는 식이었다. 그때 당시 내 경제적 어려움을 토로하자면 일주일 동안 식비로 지불한 돈이 겨우 5불, 한화로 5000원 정도였다. 얼마나 처절했는지 상상이 가는가.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다행히 한 호텔에서 연락이 왔고, 면접을 보러오라고 했다. 가까스로 내가 구한 잡은 바로 시드니 5성급호텔의 하우스키핑이었다. 면접 당시 취미가 뭐냐는 질문에 요가를 직접 보여줬을 만큼 필사적으로 그 일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 결과였다. 하우스키핑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시급 2만 원에 가까운 돈을 받으며 일을 할 수 있다는게 그저 좋기만 했다. 8~3시면 끝나는 일이라 오후에 일할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었다.

<2막-하드워커(hardworker)란 이런거야 >

나는 두 달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하우스키핑과 한인식당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주에 1000달러씩 벌었다. 워홀러의 로망이라는 ‘주 천불’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기쁨에 쉬지 않고 일했고 정말 바빴던 주에는 1300불(한화 130만원)을 벌기도 했다. 이렇게 돈을 번 결과, 두 달간 통장에 제법 많은 돈이 쌓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건강을 잃었다. 눈은 항상 실핏줄이 터져있고 손가락은 다 갈라져서 지문은 남아있지도 않고 난생 처음 쌍코피도 흘려보았다. 심한 감기에 걸려 죽을 듯이 기침하다가 새벽 4시에 토하기도 했었다.
물론 다음 주 방값이 없었던 그 시절보다는 힘든 지금이 백배는 행복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음 주에 지불할 방 값이 없었던 무직자의 생활보다는 훨씬 나았고, 그 밑바닥을 두 번 다시는 경험하기 싫었기에 이 악물고 하루에 4시간씩 자며 12~15시간을 일했다.

<3막-홀리데이(holiday)를 찾아서>

그 때 느꼈다. 돈과 행복은 어느 정도 비례관계에 있지만, 어느 수준 이상의 돈을 넘어서면 행복은 정체되고야 만다. 아무리 써도 통장에 쌓여 만가는 돈과는 달리, 행복감은 어느 순간부터 정체됐으며 귀국충동까지 일으킬 만큼 워홀에 고비가 오게 됐다. 결국 일만 하는 삶에 지친 나는 더 이상 이건 아니다 싶어 세컨잡이었던 웨이트리스를 그만뒀다.
이때가 바로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시점이었다. 돈이 많아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내 생각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린 것이다. 일단 일을 그만두니 일주일 중 쉬는 날이 생기며, 삶에 여유가 생겼다. 쉬는 날에는 시드니 근교로 여행도 다니고 맛집도 많이 다녔다. 정말 너무 행복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워홀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드니에서 더 이상 안 먹어본 음식이 없을 만큼 많이 돌아다녔다. 일주일에 백만 원 넘게 벌었기에 사고 싶은 것들을 정말 다 살 수 있었고, 언젠가의 금의환향을 생각하며 귀국 선물들을 차곡차곡 쇼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국할 당시 내 통장에는 천만 원 가량이 남아있었다!)

<4막-더 큰 꿈을 향해 떠나다>

하지만 쇼핑으로도, 음식으로도, 술로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타지에서의 외로움은 그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었다, 외국인 친구, 한국인 친구, 동료들…. 무수히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지만 군중 속의 고독은 항상 존재했고, 나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돈은 행복의 첫 번째 조건이 될 수 없었어. 부자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닌, 필요한 것이 적은 사람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와 닿았던 순간이었지. 돈이 많다고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나봐. 워홀을 통해 남들보다 그걸 빨리 느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상을 함께 하는 것…. 그게 그렇게 그립고 눈물 나더라’
이렇게 6월 말 호주로 떠났던 나는 12월 중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2월 말, 목표했던 대로 친구와 한 달간의 유럽여행을 떠났고 2013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에펠탑 앞에서 무사히 2014년을 위한 카운트 다운을 할 수 있었다.

나에게 워홀에 대한 소감을 묻는다면 다음과 같다.
‘워홀을 가기 전까지 나는 행복한 삶에 대해 이렇게 알고 있었어.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장을 잡아 돈을 많이 벌고, 내 집과 내 차를 갖는 것. 그래서 그걸 좇으며 살아왔어. 하지만 호주에 가보니 세상은 그렇지 않더라. 내 앞에 펼쳐진 길은 생각보다 너무 다양했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보다 가진 것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어. 그들은 대학을 가지 않았고, 대기업 임원도 아니고, 내 집과 내 차가 없었지만 누구보다 여유롭게 살고 있었지.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는 내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이 매우 씁쓸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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