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희생자를 낳은 세월호 침몰사고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참사가 아닐 수 없다. 희생자 가족의 슬픔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고 여파로 인해 전 국민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4시간 생중계된 이 참사의 수습과정은 한국사회의 부끄러운 맨얼굴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말았으며, 그것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 와중에 일각에서는 혼란의 장기화가 미칠 부정적 영향을 우려해 조속한 ‘정상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정상화’의 정상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정상화’를 가장 조직적으로, 가장 대규모로 부르짖은 사례는 1차 대전 후 미국이었다. 1920년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웨렌 하딩(Warren G. Harding)은 전쟁에 지친 국민이 전쟁발생 전의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굳게 믿었다. 결국 그는 ‘정상으로의 복귀(Return to Normalcy)’를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하지만 대기업의 이익만을 우선시하는 산업장려정책과 자신의 집권을 도와준 친인척의 부패가 폭로되며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미국의 대공황을 초래하여 세계적으로 엄청난 재앙을 불러온 인물로 지목되기에 이른다. 하딩이 부르짖은 ‘정상’이란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를 알지 못한, 특권층의 향수어린 ‘정상’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세월호 사건 이후 우리가 되찾아야 할 ‘정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비단 사고의 수습과 세월호 이전의 일상으로 고스란히 복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근원적으로 이런 일을 초래하게 된 잘못을 찾아내고 바로잡아 진정한 정상성을 수립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동안 비정상을 정상으로 여겨져 오게 만든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부패와 구습을 타파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선 정부와 관련책임자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통렬하게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며, 그에 따른 책임과 처벌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잘못된 관행을 교정할 수 있는 구체적인 법안, 기구 및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것들이 잘 가동되는지를 철저하게 감시할 청렴하고 효율적인 감독체계 역시 필요하다.
 그것이 다가 아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정부와 사회가 거듭나게 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강력한 기억의 장치도 필요하다. 세월호 생존자의 심리치료를 담당한 전문가들은 어린 학생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란 다름 아닌 이 사건이 잊혀져 버리는 일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흥청망청한 일상으로의 복귀가 결국 자신들만을 영원히 고통 받는 고립된 희생자로 전락시킬 것이라는 무기력한 두려움이다. 따라서 세월호 사건의 사회적 의의나 희생자의 넋을 기릴 수 있는 실제적인 상징물이 필요하다. 추모비나 기억의 터 조성 등 표면적인 움직임도 필요하겠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법령이나 기구 등에 당신들의 희생이 우리 나라를 이렇게 바꾸었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반드시 각인되어야 하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주어야 한다.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이 있다. 이번 참사는 무능하고 낡은 정부와 그보다 훨씬 발전된 사회 간의 간극을 선명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실종자 가족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자원봉사자 수칙>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중구난방 매뉴얼은 민간영역의 성숙한 대응과 정부의 미흡한 대처 사이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정부는 그런 민간영역의 발전된 양상들을 온전히 수용하여 효율성뿐만 아니라 품격 있는 통치를 위한 행정력의 제고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사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엄청난 규모의 정부가 있는 나라에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만큼의 자원봉사란 원칙적으로 필요가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세월호 이후 사회의 정상화를 재촉하기 이전에 우리 사회에서 당연시해 온 정상성을 재검토하는 일, 그리고 진정한 정상성을 세우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결코 과거의 그 정상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어야 할 수많은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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