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러시아계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친서방계 시민저항으로 축출된 이후, 2014년 3월 18일 러시아가 크림 공화국 합병을 공식 선언하기까지 미처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유럽연합과 미국은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시작하였지만, 러시아는 합병을 기정사실화한 가운데 군사행동을 할 의사가 없음을 천명한 채 관련국 간의 외교적 협상에 나서고 있다. 부동항 확보와 영토 확장이라는 러시아의 전통적인 남진전략과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깔려있고, 냉전 이후 다시 <러시아 대 서방진영>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어서 냉전의 부활 혹은 신냉전의 도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과연 크림반도 문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신냉전이란 용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냉전과 신냉전은 무엇이 다르고, 이와 무관하게 지속되는 분쟁과 긴장의 구도는 무엇인가? 그리고 크림반도 위기가 한국에 주는 영향은 무엇이고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이 있을까?

냉전의 기원과 종언

 냉전(Cold War)은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전개된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주도의 사회주의 진영 간의 군사적·이념적 대립 구도를 지칭한다. 즉, 뜨겁게 실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총성없는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차가운 동서 간의 이념 대립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1947년 3월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은 의회연설에서 세계적으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 자유와 독립을 지켜야 한다는 <트루만 독트린>을 선언하게 되었고 이는 동서 냉전의 시발점이 되었다. 트루만 독트린은 당시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로 있던 조지 케넌(G. Kennan)이 1947년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지에 익명으로 실은 논문(“소비에트 행동의 원칙”)이 철학적 배경이 되었다. 소련의 공산주의는 원래부터 세력을 확장하려는 본능을 갖고 있는데, 이의 확장을 서방이 계속 봉쇄하면 결국 내부적으로 붕괴할 것이라는 게 케넌의 논지였다. 이 같은 인식에 기반하여 미국의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이 시작되었고 그는 봉쇄정책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미국의 주도하에 1949년 4월 북미와 서유럽 국가들이 참여한 집단안전보장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결성되었고, 이는 1955년 3월 동구권 국가 8개국이 참여한 군사동맹기구인 바르샤바조약기구(Warsaw Pact)에 대항하면서 냉전을 주도하는 군사적 경쟁축이 되었다. 아시아에서는 미국이 아시아의 스위스로 건설하려던 대일본 전략을 전환하여, 일본과 한국을 새로 부상한 공산주의 중국에 대항한 반공의 보루로 건설하기 위하여 미일, 한미간 군사동맹을 결성하였다. 한편, 미국은 1947년 6월부터 먀샬 플랜으로 불리는 <유럽부흥계획>을 개시하여 전방위적인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통해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자 하였고, 한국과 일본에 대하여도 대규모의 원조 및 기술지원, 그리고 정치적 지지를 확고히 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냉전구도는 일본과 한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는데 큰 국제정치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이어 1991년 12월 25일 소련이 붕괴되고 동구의 사회주의 진영이 해체됨으로써 냉전이 끝나게 되었다. 1987년 6월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고르바초프, 이 문을 열고 장벽을 찢어버리시오”라고 행한 레이건의 연설은 냉전의 종언을 예고하는 역사적인 연설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소재 레이건 도서관을 들어서면 현관 입구에 전시된 모니터에서 이 당시의 연설 장면이 반복하여 흘러나오고 있고, 정원에는 무너진 베를린 장벽의 일부가 냉전의 종식을 상징하듯 세워져 있다. 하지만, 40여 년간 진행된 냉전 기간에 냉전만 있지는 않았다. 한국전쟁(1950-1953)과 베트남 전쟁(1959-1975)과 같은 대규모 열전(Hot War)이 있었고, 쿠바 미사일위기(1962)와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점령(1979-1989)과 같은 대치와 지역분쟁도 있었다.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서도 중소분쟁(1969-1986) 등이 있었고, 1971년 키신저와 주은래 회담으로 상징되고 1979년 미중국교정상화로 결실을 맺는 동서간 긴장완화(데탕트) 시기도 있었다.


탈냉전의 역설과 우크라이나 위기

 역설적이게도 냉전기간에 크림반도에는 긴 평화가 있었다. 1922년 12월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소련의 일원으로 편입된 이후, 1954년 우크라이나 출신 공산당 서기장 후르시초프가 크림반도를 우정의 표시로 우크라이나에게 넘겨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탈냉전이 시작된 지 23여 년이 지난 오늘 이념 등 냉전적 가치보다 더 오래된 분쟁의 요인들이 다시 부상하였고, 군사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보다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를 냉전의 유물로 보든 신냉전의 부상으로 보든, 오히려 냉전기에는 부각되지 않았던 더 복잡하고 위험한 갈등과 분쟁의 요소들이 탈냉전기의 국제질서를 괴롭히고 있다. 1989년 미국의 미래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에서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서방의 승리로 헤겔과 마르크스적인 역사는 종언을 고했다고 역설했지만, 탈냉전시기에 더 복잡한 역사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그럼, 과연 우크라이나 사태의 근본적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냉전시기보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열전에는 가시적인 전선과 전장이 있었고, 냉전에는 대립하는 동서 양 진영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탈냉전시기에는 전선도 없고 진영도 없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고 국가이익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전통적인 국제정치의 대명제를 넘어서, 특정 사안과 이해관계 별로 동일한 상대국이 동시에 적도 되고 친구도 될 수 있는 게 탈냉전시기의 국제정치이다.

지정학과 민족주의의 결합

 그러면 탈냉전기에 나타난 우크라이나 위기를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우선 오랜 역사적 뿌리와 지정학적 배경 및 민족적 갈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대립구도는 관련국의 정치체제는 달라졌지만, 1853년 10월부터 3년 여간 지속되었던 크림전쟁 전후의 유럽연합과 러시아제국의 대립 상황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그 때 전쟁의 대리자로 내세워졌던 오스만 제국의 역할을 현재의 친서방계 우크라이나가 하고 있을 뿐이다. 오스만제국을 지원하여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넘어가지 않기를 원한 유럽연합군의 전략과, 크림반도를 남진의 기점으로 삼고자 한 러시아제국의 전략이 충돌한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제국이 오스만터키를 물리치고 지중해로 진출하게 되면 유럽전체가 러시아제국의 위협 하에 놓이게 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유럽연합군이 승리하고 1856년 3월 파리강화조약 체결로 러시아의 전략은 한동안 좌절되었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각축장이 된 크림반도는 그 지정학적 가치에 의하여 끊임없이 지배자가 바뀌는 역사가 반복되었고, 오랫동안 유럽과 세계 질서의 축이자 위기의 진원지가 되었다. 가깝게는 나치의 히틀러도 러시아로 독일 인구를 분산하고 독일의 레벤스라움(Lebensraum: 생활공간)을 확대하기 위하여 크림반도를 집중 공략한 바 있다. 기원전 그리스의 식민도시로 시작한 크림반도는 로마, 비잔틴, 몽골, 오스만, 러시아, 오스만, 소련, 우크라니아 등의 순서로 그 지배자가 바뀌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이를 반영하였는지 우크라이나란 말의 어원도 경계지방이란 의미의 크레이(Krai)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한편, 13세기 징키스칸의 손자 바투는 타타르족을 무찌르고 이 지역에 킵차크 칸국을 세우면서 타타르족과 몽골족이 공존하였고 이후 많은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노예로 끌려와서 민족 간의 갈등이 싹트게 된다. 크림반도는 소련 하에서도 타타르 자치공화국으로 존재하였으나,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이주 정책에 의하여 30만이 넘는 타타르족이 희생당하면서 러시아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합병 동의 주민투표에서 95%의 주민이 러시아로의 합병에 찬성하게 된 데는 이 같은 민족적 갈등의 역사가 존재한다. 게다가 러시아와 인접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 산업시설과 자원이 집중되어 있고 민족적으로도 러시아계가 더 많다는 사실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갈등을 다음 단계로 악화시킬 수 있는 잠재 요인 중 하나이다. 신냉전이란 용어로 설명할 수 없는 역사적·민족적인 갈등이 현재의 크림반도 위기를 만들어 낸 것이다.

경제상호의존성과 누구도 원치 않은 신냉전

 냉전과 신냉전으로 설명하기 힘든 오래된 역사적, 민족적, 지정학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러시아-서방의 대결구도가 과연 신냉전 구도를 만들어 낼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신냉전적 현상으로 전개되기 어려운 정치경제적 조건들이 현재의 위기구조를 제어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조건들이 반드시 위기를 안정화시킬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우선, 냉전시기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경제적 상호의존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관련국 모두가 신냉전의 댓가를 지불하고 싶지 않을 것이며, 잘못하면 모두가 패자가 될 수 있는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첫째, 우크라이나의 위기로 인하여 2014년 2월 24일 월요일, 러시아 주식 지수는 하루 만에 12% 폭락하였다. 전체 금액으로는 600억 불 정도가 사라진 셈인데, 이는 이번 소치 동계올림픽을 위하여 러시아가 사용한 액수보다 큰 것이다. 1990년 고르바초프가 사유재산을 허용하기 위하여 최초로 설립한 러시아 주식시장의 개장 이래 최대 낙폭이다. 이는 러시아 경제가 글로벌 금융질서에 완전히 편입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1985년까지만 해도 러시아의 국내총생산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4%에 불과하였고 그나마 동구권의 사회주의 진영과의 무역이 대부분이었던 냉전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면 러시아 정부가 대주주인 최대 가스회사 가스프롬(Gazprom)은 런던 주식시장에 상장되어 있고, 이 회사의 주식은 뉴욕 소재 미국계 은행을 주관은행으로 하여 미국과 독일의 주식시장에서도 거래되고 있다. 그리고 이 회사의 절반 이상의 주주는 미국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푸틴의 러시아는 더 이상 17-18세기 짜르체제의 러시아 제국도 아니고 냉전시기의 소련도 될 수 없다.
 둘째, 서방 8개국 정상회의에서 러시아를 배제하는 등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고 있는 유럽도 딜레마에 봉착하고 있다. 독일은 국내소비 천연가스의 40%와 석유 35%를, 프랑스는 천연가스의 15%를 러시아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유럽이 장기적으로 수입선을 다변화하고 액화가스로 대체함으로써 러시아에 타격을 줄 수는 있지만 대안을 찾는 데는 적지 않은 시일이 필요할 것이다. 유럽이 러시아 가스 수입을 중단하면 러시아도 약 20%의 무역 축소가 예상되지만, 유럽으로서도 러시아 시장을 잃게 되는 현실을 무시하기 힘들다. 개별 유럽국가들 사이에서도 동일한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더 이상 해양세력 혹은 서방진영으로서의 단합된 유럽은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그렇다면 미국의 사정은 어떠한가. 오바마의 미온적인 대응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지만,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나 역량도 충분하지 않은 게 현실이다. 미국이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취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대안이고, 러시아 에너지 기업들을 제재하는 것이 가능한 한 방안이다. 하지만 이것마저 쉽지 않다. 러시아 에너지 산업에 엑손 모빌(Exxon Mobil) 등 대형 미국회사들과 많은 유럽회사들이 공동개발 등 다양한 형태로 대규모로 투자하고 있다. 영국의 최대 정유업체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ritish Petroleum)은 러시아 에너지 기업 로스네프트의 지분 19.6%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 에너지 기업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면 그 첫 희생자는 다름 아닌 미국과 유럽기업들이 될 수 밖에 없다. 오바마는 떨어지는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미국 기업들에게 손해를 가하는 선택을 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물론 미국과 유럽 사이에 이해도 갈릴 수 있다. 이념이나 진영논리가 경제적 이득보다 중시될 수 없는 시대이다.

국내정치 요인과 민주주의

 물론,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전통적 갈등의 소지를 모두 봉합할 수 있을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냉전시기에는 이념대립의 구도 속에서 잠복되었던 민족주의적 갈등이나 영토분쟁 등이 새로운 형태로 분출되고 있고, 각자의 국내정치적 역학관계와 결합되어 그 위험성과 복잡성이 더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위기도 이에 해당한다. 푸틴이 군사행동을 원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날, 러시아 주식시장이 6% 반등하였고, 이것이 주는 메시지를 러시아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별도로 관련국들이 갖고 있는 국내정치적 배경은 여전히 주요 요인으로 살아있다. 이번 위기에도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는 러시아의 경기침체와 정치적 부담에 대한 돌파구로서 소비에트 복원을 민족주의적 기치로 내세우고자 하는 유혹에 빠진 푸틴의 정치적 계산이 크게 작용하였다. 더구나 크림공화국 합병 이후 80%까지 치솟은 러시아 국민의 푸틴에 대한 지지율은 이 같은 유혹의 달콤함을 더해 주고 있다. 최근 동아시아 각국 간에 민족주의적 갈등과 영토분쟁이 분출하는 것도 탈냉전이 가져온 역설적 현상들이다. 가까운 예로, 냉전시기에는 한일간에 민족주의적 갈등과 영토분쟁이 지금처럼 심각하지 않았었다. 공동의 적을 둔 이념과 동서대립 구도에서 민족주의나 국내정치 등이 작용할 수 있는 공간이 그렇게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전시기에 러시아와 같은 진영에 속하였던 중국도 크림반도 위기에 대하여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크림공화국의 독립과 러시아에의 합병이 중국내 소수민족에게 미칠지도 모를 부정적인 정치적 영향에 대한 중국의 고민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최근 일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국제정치 갈등 현안에서 국내정치 변수가 크게 표면화되고 있다.
 그럼, 이 같은 탈냉전의 역설을 해결하면서 평화를 만들고 유지할 방안은 과연 없는 것인가? 평화 유지 기제로서의 민주주의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적지 않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보다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면 국내정치가 초래한 국제정치적 위기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 간에도 민족주의적 갈등이나 영토분쟁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비현실적일 수 있다. 더구나, 우크라이나 위기도 부패한 정권에 대한 민주적 저항운동의 예기치 못한 결과로 촉발된 점이 있는데다 크림공화국 병합의 명분으로 주민들의 민주적 선택이 강조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최소한 이번 위기에는 민주주의가 해결의 실마리를 더 복잡하게 만든 측면이 없지 않다. 당분간 탈냉전의 역설은 인류사회의 평화를 위협하는 도전요인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또 하나의 크림반도, 한반도

 마지막으로 우크라이나 위기가 한국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아직도 냉전의 먹구름이 가시지 않고 있는 한반도에서 생존게임을 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냉전의 굴레에 탈냉전의 위기가 겹친 형국이다. 한반도도 크림반도처럼 장기간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만큼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적지 않다. 2014년 3월 19일 외교부는 크림병합을 인정할 수 없다는 상당히 강경한 논조의 성명을 즉각 발표한 바 있다. 한미일 삼각관계의 틀 속에서 선택지가 많지 않은 한국이지만, 이 같은 성명이 얼마나 전략적이고 현명한 대응이었는지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10월 18일 서울에서 열린 유라시아 국제 컨퍼런스 기조연설에서 부산-북한-러시아-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잇는 대륙횡단 철도와 송유관 등의 에너지 네트워크 건설을 내용으로 한 <유라시아 구상>을 천명한 바 있고, 같은 해 11월에는 푸틴과의 정상회담에서 나진-하산 물류협력사업에 공동으로 참여할 것을 합의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 위기가 한국정부의 <유라시아 구상>을 실현하는데 예기치 못했던 장애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미국마저도 추가적인 합병만을 저지하는 선에서 마무리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너무 성급한 대응이 아니었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으로서는 냉전기보다 더 전략적이고 현명한 외교적 지혜와 역량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국제학대학원 류상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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