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사회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사실이나 해설을 널리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한 정기 간행물 <자료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사건에 대한 소식을 전달하고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해온 신문은 이미 사람들의 일상 속에 일부가 됐다. 지나고 보면 신문 하나하나가 역사가 돼왔음에도 막상 신문이 어떤 시절을 지내왔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4월 7일, ‘신문의 날’을 맞아 우리 신문에서는 신문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신문의 등장

‘신문’을 뜻하는 어휘가 존재하기도 전에 이미 소식을 전달하는 종이들은 많이 존재했었다. 서양에서 뉴스가 될 만한 사건이 인쇄돼 나오기 시작한 것은 인쇄물이 발전한 15세기 후반 최초의 부정기 인쇄 신문 독일 「플루크블라트」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부정기 인쇄 신문에는 다양한 뉴스를 다루고 연속적으로 발행한 네덜란드의 「코란토」가 있다. 또한 1605년에는 세계최초의 주간 신문인 「렐라치온」이 독일에서 간행되기 시작했다. 초기의 뉴스 간행물은 지리적으로 광대한 지역에 걸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는 수단이었다.

동양에서는 신문을 발행하는데 필요한 기술적 조건들은 갖췄음에도 신문의 발달은 늦었다. 19세기가 돼서야 유럽의 상인들과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인해 중국이나 일본이 공개적으로 뉴스를 인쇄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신문이 어떻게 발달해왔을까?

 

우리나라 최초 신문 「한성순보」

그리고 최초 민간신문 「독립신문」

▲한성순보

1883년 우리나라의 최초 신문인 「한성순보」가 등장했다. 물론 그 이전까지만 해도 법이 바뀌거나 발령사항 혹은 고위 공직자 재산 변동 등을 알려주는 ‘조보’라는 매체는 있었지만 정기적으로 발행되는 신문은 처음이었다. 이 신문은 한성판윤(현재의 서울시장) 박영효의 요청으로 고종이 정부기구 내에 박문국을 설치해 만들게 한 것이다. 「한성순보」에서 ‘순(旬)’자는 열흘을 의미한다. ‘순보’는 열흘에 한 번 나오는 신문이었다. 「한성순보」는 순한문 신문으로 ‘나라의 문호 개방과 국민 계몽’을 편집이념으로 했다.

최초의 필화*사건도 「한성순보」에서 등장한다. 「한성순보」가 약방에서 청의 병사에 의해 일어난 살인사건을 보도하자 청나라가 조선 정부에 대해 “허위가 있어서는 안 되며 확실한 증거 없이 쓰여서는 안 된다”라는 공문을 보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 기사 작성에 관련됐다고 알려진 일본인 이노우에는 「한성순보」에서 손을 떼고 일본으로 귀국하게 된다. 이 후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불타면서 「한성순보」는 간행을 멈췄고, 뒤에 「한성주보」로 바뀌어 간행됐다.

▲독립신문

「한성순보」가 우리나라 순한문으로 쓰여진 최초의 근대적 신문이라면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구성돼 있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은 1896년 4월 7일 독립협회의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이다. 이 신문은 조선정부와 일본 공사의 지원을 받아 발간됐으며 우리나라 최초 한글, 영문판 신문이기도 하다. 「독립신문」에는 우리대학교를 설립하는 데 기여한 헨리 아펜젤러 목사가 발행인으로서 참여하기도 했다. 정부는 정치, 시사, 국제정세를 국민에게 알기 쉽게 소개한 이 신문을 매수해 1899년에 폐간시킨다.

신문과 광고

현재 신문사의 자금수입에 있어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광고. 조선 후기에도 다른 매체의 발달에 비해 신문의 발달이 컸고 그만큼 광고와 신문 간의 연관성도 컸다. 우리나라 근대 광고의 효시는 「한성주보」에 실린 독일 회사 세창양행의 광고다. 당시에는 ‘광고’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고백’이라는 용어를 썼다. 자사의 제품이 이렇게 좋다며 마치 애인에게 사랑 고백하듯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10년 후에 광고에 관심이 많았던 서재필 박사에 의해 만들어진 「독립신문」에서 ‘광고’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신문에 어느 나라 제품의 광고가 실리는 지에 따라 당시 조선의 상황을 알 수 있고 조선에 불기 시작한 소비문화에 대해 알 수 있는 척도가 됐기 때문에 광고는 큰 의미를 지녔다.

일제 치하의 신문들

민족의 수난 속에서 신문 역시 고난을 피할 수 없었다. 1910년 8월 30일 조선 총독부는 구한말 민족지였던 「대한매일신보」를 매수해 제호를 「매일신보」를 바꾸고 기관지로 만들었다. 「매일신보」는 조선통치를 미화하고 독립운동을 조소하는 기사 등을 많이 실어 내선일체 정책에 앞장섰다.

1920년에는 민간신문이 허용돼 '신문명 진보의 주의'를 사시로 하는 「조선일보」와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를 사시로 하는 「동아일보」가 창간됐다. 이런 민간신문들은 농촌계몽과 문맹 퇴치 운동을 벌이는 한편 독립운동에 관한 기사를 싣기도 했다. 민간신문들은 일제로부터 계속된 검열과 통제를 받았으며 결국 1940년 모든 민간신문들은 폐간되기에 이른다. 폐간 이후 광복 전까지 민간신문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해방 후의 좌우 이념대립과 미군정

신문마다 논조의 대립은 언제나 있는 일이다. 해방 직후 좌우의 이념다툼이 팽배하던 시절, 좌우대립은 더욱 극명하게 나타났다. 먼저 여운형을 지지하던 「조선인민보」등이 등장했고 그에 맞서 우익계 신문인 「조선일보」나 「중앙일보」도 속속히 복간했다. 양측 신문은 신탁통치와 선거 등 중요한 이슈에 대해 대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에 따라 미군정은 좌익계 신문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남한이 미군정으로 들어선 이후 초기에는 무간섭, 무검열 정책을 펼쳤다. 신문의 내용이 치안을 방해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신문 및 기타 출판물의 자유로운 등록을 보장했다. 그러나 1946년부터는 5월 군정법령을 통해 신문 발행을 허가제로 바꾸고 용지난을 이유로 또다시 새로운 신문의 출현을 억제했다. 또한 그 해 하반기, 군정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조선인민보」, 「중앙일보」, 「현대일보」 등을 발행 정지시켰다.

신문만화의 정착과

고바우 필화 사건

▲만화 <고바우 영감>

1909년 이도영에 의해 첫 만평이 등장한 이후 1950년대 신문만화가 정착되면서 정치적 시사문제를 날카롭게 다루는 만평과 사회적 이슈와 함께 서민들의 애환을 그려내는 4컷 만화들이 활약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문제를 날카롭게 다루다보니 이에 따라 발생된 유명한 사건도 있다. 그것이 바로 고바우 필화사건이다. 만화 <고바우 영감>은 이승만 대통령이 살던 경무대의 청소부를 등장시켜 권력기관의 위세를 풍자했고 이 만화를 그린 김성환은 경범죄 처벌법 위반으로 과태료 450환의 처벌을 받았다.

4·19와 언론 사실보도의 승리

 

▲4.19 혁명

자유당 정권과 이승만이 등장하면서 좌익계 신문은 사라졌지만 우익계 신문들도 정부에 대한 비판을 가할 때마다 탄압당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여당지와 야당지로 나뉘는 경향도 생겼다. 이승만 정권은 말기로 갈수록 부정부패가 심해졌고 3·15 부정선거가 터지기에 이른다. 군중시위 도중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됐고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시위의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다.

언론의 자유 수호 운동

우리나라 언론의 수난은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도 계속된다. 박정희 정부는 9차례 긴급조치를 발동해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기사를 일절 금지시켰다. 그러자 1973년 기자들은 언론 자유 수호 운동을 펼치며 언론 통제에 저항하고 나섰다. 중앙정보부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에선 광고가 사라지고 백지 격려광고가 이어졌다. 1979년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고 다시 쿠데타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 전두환은 ‘언론통폐합’을 시작했다. 언론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던 중 언론인들을 들고 일어서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1987년 박종철 군이 경찰의 고문에 의해 사망한 것이다. 신문은 이 사건을 연이어 크게 보도했고 6월 민주항쟁 발생의 큰 역할을 했다. 그 후 6·29 민주화 선언을 통해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는 일부분 회복됐다.

미디어 산업으로의 성장

▲미디어 산업 속 신문

1987년 민주화 운동과 함께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자 뉴스와 신문의 지면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또한 군부시절동안 언론현업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국민주 모금 방식**으로 「한겨레신문」(현재 「한겨레」)을 만들었다. 이외에도 「국민일보」, 「세계일보」, 「문화일보」등 다양한 신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인터넷에서도 PDF 파일로 신문을 볼 수 있게 됐고 온라인에서만 활동하는 신문사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역사 속의 연세춘추,

그대 가는 길이 역사다

▲연전타임즈 창간호

1935년 9월 1일, 우리신문인 「연세춘추」의 전신이자 국내 최초의 대학신문 「연전타임즈」가 창간됐다. 당시 기존의 신문과 다른 대학생의 시각으로 새로운 신문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의의를 가졌다. 또한 「연세춘추」는 냉엄한 일제강점기에서 젊은 지식인의 삶을 표출하는 창구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연전타임즈」는 창간호를 제외하고 한국전쟁 당시 모두 유실되고 말았다. 창간호는 해방 후 우리대학교 김윤경 전 총장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었기에 현재까지 그 원본이 남아있다. 창간호는 현재 우리대학교의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그 사본은 현재 백주년기념관에 남아있다.

「연전타임즈」는 1952년 「연희춘추」로 제호를 바꿔 6·25 전쟁 당시 포화 속에서도 다시 펜을 들었고 이 후 「연세춘추」로 제호를 변경해 유신이나 군사정권과 같은 역사 속에서 비판적인 언론의 역할을 하며 함께해왔다. 지금도 우리나라 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쓰이고 있는 「연세춘추」는 앞으로도 우리나라 역사와 함께할 것이다.

암울한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도 신문은 꿋꿋이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동안 기성신문의 역사와 「연세춘추」를 살펴보면 언론의 역할을 지킨 자랑스러운 기사들도 있는 반면 탄압 속에 부끄러운 기사들도 있었다. 김대현 (사학·박사2학기)씨는 "역사를 살펴보면 언론이 탄압받던 시절 기사는 정돈돼 나오기 때문에 마치 세상이 잘 돌아간다는 착각을 준다"며 "시대상을 잘 반영해 먼 훗날에 읽어봐도 부끄럽지 않을 신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확실한 것은 신문이 사람들에게 주는 소식은 역사 속에서 큰 역할을 했으며 그것이 단순한 소식전달의 역할을 넘어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이다.

 

*필화 : 언론 매체 등에 당시의 집권 세력을 비판하거나 풍자한 창작물을 게시했을 때, 그 창작자가 처벌 등의 불이익을 받는 것

** 국민주 모금방식 : 국민 모두가 주식을 사는 형식으로 한겨레의 창간 방식

박진형 기자

pjhy928@yonsei.ac.kr

<자료사진 신문박물관, http://pixabay.com/, http://commons.wikimedia.org/, https://www.flickr.com/photos/ 한국언론진흥재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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