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열혈청년의 호주 아이들 돌보기

 2012년 1월, 나는 여느 복학생이 그렇듯 세상을 내 뜻대로 할 수 있을거란 생각과 달리 현실은 그저그런 학점에 웬만한 대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영어점수 하나 없는 ‘無’스펙의 소유자였다. 진로에 대한 목표도 없이 목적지를 모르는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영어라는, 거대한 짐을 덜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라는 고민 끝에 해외어학연수를 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그 결정의 큰 장애물은 ‘돈’이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스친 것이 군대에서 들었던 ‘워킹홀리데이’였다. 일도 하면서 영어도 배우고 해외여행도 할 수 있는 그야말로 내가 찾던 이상적인 해결책이었다.
 그래서 본적격인 워킹홀리데이 준비가 시작되었다. 난생 처음 떠나는 해외 여행이었기에 설렘과 기대감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유경험자들의 글들을 보며 새로운 경험과 만남이 있을 호주에서의 삶을 그려보며 긴장과 흥분의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새 출국 날짜가 다가왔다.


첫발을 내딛다


 2012년 6월 5일, 인천공항을 출발해 홍콩을 경유해서 10시간 가량의 비행 끝에 호주 케언즈에 도착했다. 공항을 빠져나온 순간 처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조용하고 한적한 거리였다. 이국적인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었고 신선한 공기가 코끝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호주에서의 삶이 시작됐음을 실감하기에 충분했다.
 케언즈에서의 한 달은 정신없이 빨리 지나갔다. 초기 정착을 위해서 핸드폰 개통, 은행계좌 개설, TFN을 신청하고 쉐어하우스를 구했고, 계획 했던대로 어학원을 등록했다. 다양한 국가의 친구들과 주말이면 라군에서 바비큐 파티를 했다. 그토록 동경해왔던 외국에서의 삶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생계를 위해 일을 찾아야만 했다. 출국 전부터 계획했었던 ‘오페어*’를 하기위해 인터넷을 뒤졌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고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두 소년의 ‘오페어’가 되다


 불안감에 집 근처 몇몇 레스토랑에 이력서를 돌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한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 시드니의 한 가족으로부터 오페어 관련 사이트에 올려놓았던 프로필을 보고 자신들의 아이들을 돌봐줄 수 있겠느냐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메일을 보는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꼈고, 그동안의 불안감은 자신감으로 변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답장을 보낸 끝에 마지막 전화 인터뷰 후 시드니의 호주 가정집의 오페어로 가기로 결정됐다. 
 시드니는 케언즈보다 쌀쌀한 날씨였다. 하지만 공항에 마중 나온 두 아이의 열렬한 환영에 금새 추위도 잊었다. 그렇게 시드니에서의 3개월 동안의 오페어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돌아오면 같이 놀아주고, 간단한 가사일을 도와주는 정도의 일을 했다. 영어가 서툴러서 언어적 장벽에 가끔 부딪치긴 했지만 오히려 영어를 매일 듣고 말할 수 있어서 영어향상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요리를 전혀 할 줄 몰랐지만 한국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인터넷을 찾아 한국음식을 만들어 주곤했었다. 주말에는 시티로 나가 사진으로만 보던 ‘오페라 하우스’도 보고 그 앞 펍에서 하버 브리지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며 낭만을 즐겼다. 하지만 시드니에서의 꿈에 그리던 달콤했던 시간도 잠시, 겨울이 끝나갈 무렵 나는 그 곳을 떠나야 했다.


잠시 낭만적인 삶을 접어두다


 멜버른은 고풍적인 느낌의 고층빌딩들이 도시를 메우고 있었다. 나는 잠시 호주에서의 낭만적인 삶을 접어두고 돈을 모으는 것에 열중했다. 힘겨웠던 두 달이 지나고 다소 두툼해진 통장잔고를 보며 다시 한 번 오페어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운 좋게 브리즈번의 한 가족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첫 오페어에서 남겼던 아쉬움을 이번에는 되풀이 하지 않으리라 마음 먹고 브리즈번으로 향했다.

 

다시 얻은 기회, ‘카이’를 만나다

 카이는 8살 축구와 파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자신의 방에 파티장을 꾸미고 나를 초대해 광란의 강남스타일 댄스를 추곤 했다. 첫 오페어에서 아쉬웠던 부분들에 대해 카이의 부모님에게 이야기했다. “저는 영어를 잘 못하기 때문에 대화를 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호주의 문화를 체험하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 왔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당신들과 함께 다양한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카이의 부모님은 카이에게 이런 나의 마음을 전했고 카이 또한 나를 많이 이해해주었다. 함께 가까운 비치로 여행도 가고 축구경기도 함께 보러갔다. 즐거운 추억들을 쌓다보니 어느덧 이별의 순간이 찾아왔다. 정들었던 가족들과의 이별을 뒤로 하고 말많고 탈도 많았던 10개월 동안의 호주 생활을 무사히 마무리하는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현실로 돌아왔을 때


 10개월 뒤 돌아온 한국은 나의 빈자리가 무색할 만큼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복학을 했고 취업전쟁에 뛰어들었다. 육안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 자신은 워홀을 통해서 많은 것들이 변했다. 다양한 국가의 친구들을 만나고, 호주 곳곳을 여행하면서 넓은 세상을 경험했다. 또 학점, 취업 등 한국의 숨막힐듯 치열하고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여유를 만끽할 수있었다. 낯선 땅에서 혼자 힘으로 부딪치며 살다왔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그 무엇보다도 큰 자신감을 불러 일으켰고, 워홀을 통해 얻은 모든 것들이 나의 인생의 스토리가 되었다. 
 다만 얻은 것이 많긴 하지만 처음 내가 목표했던 것들에 대해서 얼마만큼 충분히 성취했는가를 따진다면 그리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영어를 최우선 목표로 했었지만 만족할 만큼의 영어 향상은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주 워홀은 목적지없이 항해하던 나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든든한 ‘노’같은 경험과 함께 좀 더 확실해진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게 해주었다. 27년 나의 인생에 있어서 10개월의 호주 워홀은 눈을 뜨면 사라지는 일장춘몽이 아니라 20대의 나의 인생을 풍성하게 채워주었고, 앞으로의 삶 또한 빛나게 해줄 값진 시간들이었다.

*오페어(Aupair) : 외국인 가정에서 일정한 시간동안 아이들을 돌봐 주는 대가로 숙식과 일정량의 급여를 받고, 자유시간에는 어학공부를 하고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일종의 문화교류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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