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초보, 새해를 기념하기 위해 남한 최고봉에 오르다

 연말연시는 늘 그렇다. 매번 그러하듯, 지키지도 못할 무수한 계획들이 가득했던 올해를 반성하고 또 한 번 희망에 차 새해를 계획하는 우리. 물론 그냥 하는 것은 아니다. 정동진에 가거나 산에 올라 일출을 본다거나, 보신각에서 종소리를 듣는다거나, 적어도 동네 호프집에서 사람들과 같이 카운트다운을 외치는 식의 ‘의식’과 함께해야 한 해가 완성되는 느낌이랄까. 기자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지난 2013년에 학점관리, 다이어트, 토플, 독서 등 원대한 계획을 세웠지만 단 한 가지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 점을 채찍질하며 2014년 새해에는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다짐은 침대 위 전기장판보다는 정기(精氣)가 흐를 것만 같은 그럴싸한(?) 곳에서 더 잘 이뤄질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 주위에 가장 ‘높은’ 곳은 어떨까. 긴 고민 없이 기자는 남한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1950m)으로 향했다. 

 
“한라산 그까이꺼 뭐 대~충 올라가면 되는 거 아녀?”
 
 무식하면 용감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근 10년만의 등산 장소로 한라산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책상에만 앉아있던 입시준비기간과 술자리로 가득 찬 대학생활은 운동 혐오자(?)인 기자를 더욱 더 저질체력으로 만들어놓았다. 1시간 이상 걷는 것조차 벅찬 사람에게 왕복 9시간의 등산시간이라니! 전문 등산가들도 오르기 힘들다는 한라산 등반, 왠지 낯익게 느껴지는 산이라 선택했다고 하기에는 감당해야 할 고통이 너무 컸다. 
 높이만큼이나 거대한 넓이를 자랑하는 한라산은 정상까지 완주하는 코스가 7개나 있다. 거리가 짧은 대신 험난한 코스가 있는 반면, 길지만 완만한 코스도 있다. 정상까지 걸리는 시간도 2시간에서 4시간으로 다양한데, 시간이 짧다고 섣불리 2시간 등반코스를 선택하면 위험하다. 거리가 짧은 만큼 지형이 험난하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니면 등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때문에 예상시간의 두 배가 걸릴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웬만큼 등산에 자신이 없는 이들은 시간의 유혹을 이기고 9.6km로 가장 길지만, 가장 완만한 성판악탐방로를 선택하기를 추천한다. 코스는 [출발지-(4.1km)→속밭대피소-(3.2km)→진달래밭-(2.3km)→정상]으로 이뤄지는데, 정오까지 진달래밭 지점에 도착해야 정상으로 갈 수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낮12시에 진달래밭을 통과하지 못해 다시 아래로 돌아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니 ‘낙오자’가 되기 싫다면 새벽 즈음에 부지런히 출발하시길!
 연중 따뜻한 제주도지만 한라산은 좀 다르다. 늦가을부터 눈이 쌓이기 시작해 12월정도 되면 무릎 정도의 눈이 쌓이고 기온도 낮기 때문에 두툼한 등산복과 아이젠**이 필수다. 등산을 즐겨하지 않는 평범한 대학생이라면 이런 장비들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만, 한라산을 등반할 때는 빌려서라도 가져가야한다. 기자 역시 별 생각 없이 집에 있는 조금 작은 등산화를 신었다가 큰 일 날 뻔했다. 착용감이 불편해도 ‘별 문제 없겠지’라며 가볍게 넘겼는데, 등산을 시작한지 1시간 만에 발에 이상이 왔다. 발목이 자주 삐끗하는 것은 물론, 물집이 터지고 상처가 쓸리면서 피와 진물을 계속 닦아주어야 했기 때문. 아이젠도 처음에는 차지 않았는데, 눈과 얼음에 계속 미끄러져 중간에 매점에서 구입해서 착용했다. 덕분에 1.5배는 더 힘들었으니, 등산할 때는 반드시 제대로 된 장비를 장착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그리고 그때서야 등산가들이 왜 그렇게 등산용품에 집착하는지 드디어 알게 됐다.)   
 
 
끝없이 펼쳐진 하얀 오르막길
 
 초반에는 길이 워낙 완만했기 때문에 처음 1시간동안은 뛰는 듯 가볍게 걸을 수 있었다. 주변에 있는 까마귀와 청설모, 눈 쌓인 나무들을 여유롭게 구경하며 오르다보면 한라산 등반이 별 일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그 생각은 아마 첫 번째 표지판을 보면서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할 터. 숨이 조금씩 거칠어지던 때, 기자는 아직 정상의 1/10도 오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표지판을 보니 약간 겁이 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지금까지는 완만한 C코스였지만, 앞으로는 경사가 점점 심해지는 B코스와 A코스만 남았다고 알려줬기 때문이다. 한라산 등반의 진가는 B코스가 시작되는 속밭대피소부터 시작되는 듯 했다. 눈에 띄게 가파랗게 변한 등산로와 끝없이 펼쳐진 눈길들. 처음에는 아름답게 보였던 눈 덮인 나무들이 끝없이 반복되는 순간, 그것들은 더 이상 새롭지 않았다. 마치 쳇바퀴를 굴리는 다람쥐가 된 냥 걸어도, 걸어도 똑같은 풍경에 멀미마저 나는 기분이랄까. 다리 힘은 풀려왔지만 멈춰 설 수도 없었다. 등산로로 눈이 너무 많이 쌓여 길은 겨우 한 사람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폭으로 좁게 나있었기에 중간에 한 사람이 멈추면 뒤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정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결심했던 ‘등산하며 마음정리 하기’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생각할 힘도 없었던 그 때, 말 그대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로 겨우 발걸음을 옮겼고, 아침 10시 30분, 비로소 진달래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는 곳
 
 진달래밭에서 정상을 가는 길은 그 전 길보다 훨씬 더 가파르다. 그리고 기온이 급격히 낮아지며, 안개와 구름이 짙어져 시야 확보가 어려워진다. 발을 헛딛고, 미끄러지는 횟수도 많아지면서 기자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등산로에 만들어진 계단은 물론, 가파른 길을 오를 때 잡으라고 있는 보호줄과 길과 절벽을 구분지어 주는 나무들마저 눈에 파묻혔기 때문이다. 정상을 겨우 500m 앞두고 길이라곤 앞서 간 사람의 발자국 밖에 없는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안개가 심해져 앞이 뿌옇게 돼버렸다. ‘자칫 잘못하면 굴러 떨어져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에 다리가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발걸음을 재촉하던 뒷사람의 짜증이 없었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한걸음도 더 움직이지 못했으리라.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상에 도착했지만 가장 기대했던 백록담은 볼 수가 없었다. 역시나 구름과 안개 때문이었다. 겨울 한라산에서 백록담을 선명하게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라는 말마따나 ‘백록담’이라 써진 돌만이 백록담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희로애락이 담겼던 등반을 마쳤다는 뿌듯한 감정은 그 실망감마저 덮어주었다. 한동안 말없이 아래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도 다 같은 생각인 듯 보였다. 
 
내리막길이 더 힘든 이상한 산
 
 산은 올라가는 것이 힘들지, 내려오는 것은 편하다는 말은 한라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특히 겨울 한라산은 더더욱! 가파랗던 경사로가 얼음까지 뒤덮여 있으니 위험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아이젠이 있다하더라도 미끄러운 얼음길을 피할 수는 없었으며 미끄러지지 않으려 발에 힘을 주면 발목에는 더욱 부담이 간다. 그러다보니 등산 후에 으레 받아야 할 보상을 못 받은 기분에 화가 나기도 했다. 피로가 누적되다보니 신경이 예민해지고, 무엇보다 초콜릿과 같은 달달한 간식이 당겼다. 도저히 한걸음도 더 못 걸을 것 같아 벤치에 앉았는데 옆 사람이 초코파이를 너무 맛있게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생존본능’이라는 이름의 용기가 생겨나 그 사람에게 다가가 “너무 힘든데 초코파이 좀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라는 말을 했다. 불쌍해보였는지 그는 초코파이 3개를 건넸다. 이왕 낸 용기, 조금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귤을 먹고 있는 사람을 발견해 그 중 한 개를 그 사람의 귤 2개와 교환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귤 1개는 또 다른 사람의 사탕 4개와 교환했다. 평소 같으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뻔뻔한(?) 물물교환은 매점하나 없는 5km의 길을 더 걸어야 하는 등산객의 생존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리고 이런 본능은 한라산에서는 꼭 필요한 지혜가 아닐까. 덕분에 기자는 풍족하게 ‘하산(下山)’할 수 있었다.
 
 
한라산, 그곳에서 희망을 만나다
 
 등산 후에도 제주도에서는 어딜 가던 높이 솟아있는 한라산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웅장하고 거대한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여길 어떻게 올라갔지’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한라산은 그랬다. 너무나 친숙한 이름이기에 처음에는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어려운 것인지 모르고 계획하고 도전했지만, 하면 할수록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었다. 예상치도 못했던 장애물이 너무나 많았고, 쉬울 것이라 생각했던 내리막길조차 눈물 나게 어려웠다. 그리고 산의 위엄은 당시엔 느껴지지 않지만, 해내고 난 뒤 멀리서 오롯이 바라볼 때야 알 수 있었다. 
 문득 어쩌면 한라산 등반은 우리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결심했던 새해 계획들이 성공할 것만 같은 희망도 생겼다. 불가능하게 보였던 것들도, 중간에 쓰러질 만큼 장애물이 많은 일들도 이를 악무니 결국에는 할 수 있다는 당연하고도 값진 사실을 몸소 깨달았기 때문에. 
 
 
* 너무 늦게 정상에 도착하면 내려오는 길이 어둑해져 위험할 수가 있다. 따라서 한라산국립공원에서는 12시까지 중간지점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은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도록 하는 규칙을 제정했다.     
** 등산에 쓰는 용구. 강철로 된 스파이크 모양으로, 얼음 따위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등산화 밑에 덧신는다.
 
글•사진 오도영 기자 
doyoungs92@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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