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자 나임윤경 교수의 이야기

 

나임윤경(대학원·성인교육학)교수는 우리대학교에서 ‘여성주의’하면 학생들이 떠올리는 교수들 중 한명이다. 나 교수의 저서인『여자 똑바로 읽기』, 『여자의 탄생』과 같은 책들의 제목만 봐도 무엇인가 느껴지지 않는가? 나임윤경이라는 그녀의 이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을 함께 쓴 것이라고 하는데, 이름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가르치는 것이 싫었던 교육학과생

여성학을 가르치는 그는 우리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한 동문이다. 교사를 꿈꾸는 여느 동기들과는 달리 그는 미래의 그가 교편을 잡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그는 학부 졸업 후 기업에 입사했지만 “기업 내에서도 위계적인 분위기를 경험했고 이를 감당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첫 직장에 사표를 내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그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건 사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업은 학교나 회사에 비해 상하관계에 덜 얽매이기 때문이었다. ‘사업 아이템으로 학원을 해볼까’라는 생각에 압구정에 위치한 한 외국어학원에 취직을 한 것이 그의 나이 29살 때였다. 그는 대학생들에게 토익과 토플을 가르치던 중 성적이 올라 기뻐하는 그들을 보며 뿌듯해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가르치는 일이 자신의 적성이란 것을 깨달은 그는 “교사 자격증이 없으니 대신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는 건 어떨까”라고 생각했다. 얼마 뒤, 교수라는 새로운 목표를 위해 미국 위스콘신주 행 비행기에 발을 내딛었다.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여성학자로서의 시작
 

여성학이라는 학문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 건 미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지만 여성주의라는 개념에 눈을 뜨게 된 건 “고등학생 때 체육 선생에게 부당한 체벌을 받게 되면서”라고 한다. 체육 선생님이 결근을 해 친구들과 교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 교수. 그러나 체육시간인데도 밖에 나와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른 반 체육 선생님은 운동장을 뛰라는 벌을 내렸다. 하지만 나 교수는 이를 거부했고, 이에 체육 선생님은 나 교수를 지하미술실로 데려가 주먹으로 때리는 등의 체벌을 가했다. “체벌을 받고 집에 돌아온 후 이상하게도 모욕감과 자기혐오가 가슴을 짓눌렀다”며 나 교수는 당시를 회상했다. 단지 맞아서 느껴지는 것이 아닌,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 향연처럼 그를 집어삼켰고 눈물이 한 없이 흘렀다. 체벌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어머니는 “운동장도 교무실도 아닌 어두운 지하 미술실에서 윤경이를 때렸냐”며 학교에 항의했다. 체벌의 이유보단 ‘지하실’이라는 공간의 부적절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공포감의 원인을 명확히 찾지 못하던 나 교수에게 어머니의 질문은 마치 한줄기 빛을 찾은 듯한 가슴 떨림을 느끼게 했다. 이 경험을 통해 나 교수는 어떤 현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에서 독창적인 ‘질문’을 구성하는 것의 중요성을 느꼈고, 이 경험을 떠올리며 공부하기로 결심한 것이 여성학이었다. 여성학이야 말로 ‘질문을 다르게 하는 학문’이라고 느낀 그는 대학원에서 여성학자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되었다.
 

교수가 되어 돌아오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나 교수는 타 대학에 정착하려 했다. 그는 학부생 시절 교수들에게 ”졸업한 후 결혼이나 할 너희를 제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모교에 대한 애정이 부족했다. 그랬기에 그는 우리대학교에서 여성학을 가르칠 교수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큰 욕심 없이 입사 지원서를 냈다. 부임 후 나 교수는 30년 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대학사회 속의 여학생들을 보며 “여전히 섬처럼 떨어져서 지내고 이리저리 휩쓸리며 내가 갔던 길을 가겠구나”라는 불안감을 마주했다. 여성으로서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과 더불어 반여성적인 생각과 방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등을 ‘자신이’ 가르쳐야겠다고 느꼈다. 나 교수는 이제 연세대학교가 자신의 몸에 꼭 맞는 옷이라고 말한다. “5년을 일하다보니 그런 맘이 생기더라, 이젠 모교라기보다 평생직장 같다”며 웃는 그녀의 미소에서 우리대학과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제 2의 직장, 논지당

나 교수는 우리대학교 여학생휴게실인 논지당의 소장이기도 하다. 그는 논지당을 운영하며 여러 논란과 마주했는데, 그 중에서도 ‘논지당 사건’은 여전히 화두에 오르고 있다. 사건의 전말은 어땠을까? 비가 퍼붓던 어느 날, 논지당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던 한 남학생이 여학생 휴게실을 들여다보자 안에 있던 여학생이 불편을 느꼈고, 이에 관계자가 주의를 줬다. 이에 남학생은 남학생 휴게실도 만들어달라는 요구를 했고, 갑작스런 요구에 당황한 관계자는 ‘남학생은 아무데서나 쉴 수 있지만 여학생들은 그렇지 못하다’란 발언을 했다. 그런데 이 발언이 마치 나 교수가 한 것처럼 둔갑됐고 학교 커뮤니티에 비난 글이 올라왔다. 조회수가 8000회가 넘어가며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이 그에게 쏟아졌고 나 교수가 반론글을 올리는 사태에 이르렀다. 논지당 사건 이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많은 오해가 존재한다. 그렇지만 나 교수는 “비난 현수막이 걸려도 사실 학생복지처에 얘기해 얼마든지 떼어낼 수 있지만, 이 또한 학생들이 배워나가는 과정이기에 이해한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다만 나 교수는 어떤 문제를 사유함에 있어 역사적인 맥락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학생들에게 강조했다. 여학생 휴게실인 논지당은 사실 한 여학생이 혼성 휴게실에서 담배를 피다가, 여자인데 흡연을 한다는 이유로 한 남학생에게 뺨을 맞게 되며 생겨났다. 나 교수는 “남학생들과는 달리 여학생들은 많은 공간에서 성차별적으로 배제되고 있기 때문에 여자휴게실이란 것이 생겨난 것”이라며 “고로 여성 휴게실과 남성 휴게실은 같은 맥락에서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무작정 남학생 휴게실 창설을 요구하기 전에, 여학생 휴게실이 왜 생기게 됐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 교수는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나 교수는 “약자를 위해 어떤 비판적 사유 체제를 가져야 하나 고민해야 한다”고 작은 조언을 건넸다. 대학은 결국, 모두가 평화 속에 공존하기 위한 방법을 배우는 곳이라는 것이다. “차이에서 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학생들이 비판적으로 보는 훈련을 이어나가길 바란다”며 나 교수는 말을 끝맺었다. 나 교수의 말대로 우리는 약자의 입장에서 늘 다각도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진정한 평등을 실천하는 세대가 되길 소망하며.


강대연, 나한아, 홍문령 수습기자
chunch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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