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지 아무리 좋아해도 언젠가는 질리기 마련. 술자리라면 빠지지 않는 애주가인 나에게도 어느 날 회의가 찾아왔다. 소주와 맥주를 앞에 두고도 ‘먹어봐야 내가 아는 그 맛일 것이다’*는 절주 아닌 절주의 생각이 든 것이다. 술과의 권태를 극복해보고자 술에 요구르트, 홍초, 심지어는 커피까지 넣어가며 나름대로 노력해봤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외갓집에서 보내준 복분자주를 맛보고 머리가 번뜩했다. 단 것을 좋아하는 엄마의 취향을 100%반영한 설탕가득 복분자주.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술이라 그런지 맛이 색달랐다. 만드는 사람의 취향과 정성이 담겨 있어 더 매력적인 모습에서 나는 권태를 이겨낼 방법을 찾은 듯해 가슴이 설렜??

“그래, 내가 한 번 만들어보자!”
 
 
“술 나와라 뚝딱” 아니거든?
 
 ‘1일 술 빚기 체험’을 하려고 여기저기 수소문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던 차, 약식으로 술을 만들어 볼 수 있다는 전주 전통 술 박물관을 찾았다. 술 빚기 체험을 진행하는 선생님은 “술은 카페에서 커피를 뽑아내듯 그렇게 빨리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며 “술 하나를 제대로 만들려면 누룩 빚기부터 시작해 적어도 3개월은 걸린다”고 말했다. “이모~ 여기 소주 한 병이요!”라고 말하면 바로 술을 꺼내주는 것에 익숙해진 탓일까? 술이 발효주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하루 만에 술을 만들려 하다니, 보쌈고기를 삶으면서 김장하는 격이다. 그래도 뭐, 겉절이라도 제대로 만들면 되지! 의욕이 앞서 팔 걷어 부친 내게 선생님은 “이 술 만들어서 남 주면 안돼요”라며 약속을 권했다. 현행 주세법에 따르면 집에서 술을 만드는 것은 허용되지만 그 술을 남에게 주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 ‘술을 공짜로 받지 않았더라면 술을 사먹었을 것이고, 자연스레 세금을 내고 사 먹었을 것’이라는 논리다. 한마디로 ‘술은 사먹으라’는 것. 야박하기 그지없지만, 별 수 있겠는가! “저 혼자만 홀짝 홀짝 마시겠습니다~”라는 영혼 없는 서약을 한 뒤, 선생의 설명을 들으며 술 빚기 체험을 시작했다. 
 
 
누룩, 술 맛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요소  
 
술 빚기의 시작은 누룩** 만들기다. 깨끗이 씻어 말린 통밀과 밀가루, 물을 섞어 누룩 반죽을 시작했다. 부드러운 수제비 반죽만 해오던 터라 거친 느낌의 누룩반죽은 익숙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누룩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술의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누룩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누룩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룩이 ‘빵을 만드는데 쓰는 것과 같은 효모의 일종’이상으로 생각되지 않는 나에게 선생님은 “지금은 효자 상품이 된 막걸리가 처음에는 해외시장에서 문전박대 받은 이유가 바로 누룩 때문”이라며 누룩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막걸리를 처음 맛 본 외국인들은 “한국의 술은 곡식 썩은 내가 날 뿐만 아니라 먹으면 머리가 아프다”고 말했다고 한다. 문득 신촌에서 마셨던 동동주에서 나던 시큼한 냄새와 다음날 두통으로 수업을 빠졌던 일이 떠올랐다. 맛있기만 한 김치에서도 마늘냄새가 난다며 몸서리치는 그들이, 토종 한국인인 나조차도 시큼했던 막걸리를 접했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술에는 기다림이 필요하다
 
 누룩 반죽을 끝낸 뒤에는 면보를 깐 누룩 틀에 반죽을 가장자리부터 꼼꼼하게 눌러 담았다. 그 다음 면보를 잘 여미고 신문지를 위에 깐 뒤 누룩틀을 계속 밟았다. 간단한 일이었지만 굉장히 지루했다. ‘이만 하면 됐겠지?’라고 생각할 때마다 “뒤집어서 다시~”라는 선생님의 말이 메아리처럼 계속 됐다. 장장 1시간 동안 누룩틀을 밟고 또 밟고 나서야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누룩메주’가 완성됐다.
 이렇게 고생해서 만든 누룩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다음 단계를 기다리는 나에게 다가온 선생님은 “이렇게 만든 누룩은 약 열흘 동안 발효과정을 거친 뒤 쑥국과 섞어야 술을 빚을 때 이용되는 누룩물로 쓰일 수 있다”며 내가 만든 누룩을 발효실로 가져갔다. 조금은 허탈한 마음으로 누룩과 눈물의 작별을 한 뒤 (다시금 술은 결코 하루 만에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알맞게 발효된 누룩물을 받았다. 이 누룩물에 찹쌀밥으로 지은 고두밥을 넣어 치대기 과정을 시작했다. 치대기 과정은 우리가 밥을 씹어 먹는 과정과 비슷한데, 치댈수록 밥 안에 있는 단맛이 강화돼 술이 발효하는데 도움을 준다. (맞다,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 ‘아밀라아제’ 반응이다!) 손에 주렁주렁 달려있던 반지와 팔찌, 시계를 푸른 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25분이 경과하자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손이 시리고 굽은 허리가 점점 아파왔다. 술을 직접 만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떠올렸던 것은 고운 한복을 입고 예쁜 도자기를 만지는 모습이었는데, 누룩반죽을 만들고 치대기를 하면서 내 상상은 와르르 무너졌다. 술을 만드는 것은 고된 노동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무아(無我)의 상태로 치대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누룩물이 거의 사라졌다. 드디어 완성된 부의주***를 통에 담고 「.zip」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zip酒'라고 이름 붙였다. 
 이렇게 만든 ‘zip酒’는 3주의 발효기간을 거치면 탁주, 즉 막걸리가 된다. 옛날 서민들이 집에서 만들어 먹곤 했던 바로 그 술이다. 여기에 각종 과일을 곁들이면 더욱 맛있어진다고 하니, 정말 ‘나만의 술’인 것이다. 1주가 지난 지금, zip酒의 맛이 너무 궁금해 뚜껑을 열어봤다. 발효가 거의 다 돼 부드럽게 변해있어야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밥알이 퉁퉁 부은 채 떠다니고 있었다. 아차, 집으로 가져간 뒤 뚜껑을 열어 공기가 통하도록 해줘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을 잊은 채 일주일 간 뚜껑을 꽉 막아놓았던 것. 역시 술은 만드는 사람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느꼈다. ‘zip酒’는 그냥 좋은 추억으로 남겨야만 할 것 같다.



거를수록 좋아지는 전통주, 그 속에 담긴 지혜를 보다
 
 누구나 집에서 만들어볼 수 있는 가양주와는 달리 제조 방법을 국가에서 지정할 정도로 유서 깊은 가양주도 있다. 이런 전통술에 통달한 호산춘 명인 이연호 선생에게 삼양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흔히 좋은 술을 가리켜 ‘명주(銘酒)’라고 하고, 맛과 향취가 좋은 고급술을 가리켜 ‘춘주(春酒)’라고 한다. 춘주는 술빚기가 세 번에 걸쳐 이뤄지는 삼양주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두 번 빚는 이양주에 비해 술맛이 뛰어나고 향도 독특하며, 술 빛깔도 더 맑은 것이 특징이다. 쉽게 말해 와인이 오래 될수록 그 진가가 높아지는 것처럼 우리 술도 여러 번 거를수록 더 좋아진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한번 걸러먹으면 될 것을 왜 여러 번 거르게 된 것일까? 옛날 농민들은 농사짓느라 바빠 시간이 없어 술을 한번만 걸렀지만, 사대부나 왕족은 상대적으로 여유로웠기 때문에 술을 여러 번 걸러보다가 ‘발견’했다는 설도 있지만, 누룩 때문에 생기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누룩이 꼭 필요한데, 막상 들어가면 냄새가 나 술맛이 안 좋았다. 요즘에야 누룩이 아닌 인공 효소를 쓸 수 있지만, 과거에는 선택권이 없었다. 오랜 연구 끝에 우리 선조들은 미생물, 즉 효소를 더 ‘키우는 것’을 해결책으로 내놓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것 참 인간적이다. 이씨의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미생물을 사람의 관점으로 바라봤다. 미생물도 생물이니 부드러운 것을 더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아플 때 죽을 먹는 것처럼 효소도 죽을 먹으면 힘이 날 거라 생각해 죽으로 누룩 물을 만들었단다. 참 귀여운(?)생각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하자 절반의 양으로도 전과 같은 효소 증식효과가 나타났다니 효소가 조상들의 마음에 감동받은 모양이다. 이렇게 죽으로 만든 누룩 물로 단양주를 걸러서 만들어 진 것이 바로 이양주이며, 이양주를 다시 한 번 거른 것이 바로 삼양주다. 술을 여러 번 거를수록 미생물 숫자도 점점 늘어나는데, 마치 ‘일꾼이 점점 많아지듯’ 당을 먹고 알코올을 토해내는 효소가 많아져 술은 점점 고도주가 된다. 이렇게 탄생한 삼양주는 누룩의 양도 적을뿐더러 발효되는 시간이 길어 머리도 덜 아프게 된다고 한다. 술을 만들고 무작정 기다리기보다 더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 결코 쉽지 않은 거르기 과정을 계속한 조상들의 모습에서 지혜가 엿보였다. 
 
 
술, 사람을 부르는 마음
 
 이야기가 끝난 뒤 이씨는 “술꾼 집에 왔는데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지~”라며 갓 발효된 호산춘을 한 병 선물해줬다. 한 손에는 내가 빚은 zip酒, 다른 손에는 호산춘을 들고 있어 양손은 무거웠지만 서울로 돌아가 친구들과 술파티를 할 생각에 마음만은 가벼웠다. 술을 빚는 내내, 그리고 술이 발효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는 ‘이 술을 누구와 먹을까?’라는 생각뿐이었다. 나 혼자의 만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즐거운 시간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술을 빚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아닐까.  
 
*먹어봐야 내가 아는 그 맛일 것이다: 가수 옥주현이 다이어트를 하면서 했던 유명한 말
**누룩: 술을 만들 때 사용하는 발효제로 술을 만드는 효소를 갖는 곰팡이를 곡류에 번식시킨 것이다
***부의주: 밥풀이 동동 뜨는 맑은 찹쌀 술
 

 
오도영 기자
doyoungs92@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