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뉴스 간판 앵커가 되기까지, 조금은 외로웠던 그의 대학시절 이야기

“외롭고, 심각하고, 불안하고, 가난한 대학생이었다”
이 말이 KBS 9시뉴스 간판 앵커이자 지난해 한국방송대상 앵커상을 수상한 민경욱 동문(행정·82) 입에서 나온 것이 맞나. 1인자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리는 민씨는 그의 대학시절에 대해 ‘맥주도 마음껏 못 마실 정도로 가난했지만 매사에 열심이었던 고학생’이었다고 회상한다. 우리대학교 행정학과와 국제학대학원을 졸업한 뒤 KBS 보도국 정치부에서 기자생활을 하고, 워싱턴 특파원으로도 활약했으며 7시뉴스, 8시뉴스를 거쳐 9시뉴스의 앵커자리를 꿰찬, 왠지 탄탄대로를 걸었을 것만 같은 그. 그의 대학생활이 궁금하다.

인천촌놈, 서울에 오다

당시만 해도 위성도시에 불과하던 인천의 촌놈이 연세대에 왔다.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전교 2등과 모의고사 점수가 20점씩이나 차이 날 만큼 독보적인 전교1등이었지만, 뜻밖의 계기로 재수를 고민했다. 민씨는 “자매결연을 한 대만학교로 열흘 간 다녀온 뒤로 ‘그동안 공부가 밀려 뒤쳐졌을 테니 내년에 잘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런데 집안 형편상 재수를 못해 그대로 우리대학에 입학하게 됐다. 학교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는 민씨. 그의 1학년 때 학점은 2.15, 1.63으로 학사경고를 간신히 면했다. 그는 “까만 운동화만 신고 다니다 비싼 나이키 신발을 양쪽 색깔 다르게 두 켤레씩 신고 다니는 친구들을 보는 것도 신기했다”며 “문화충격을 받았다”고 당시의 느낌을 전했다. 한편 행정학과에서는 과 특성상 친구들은 고시준비를 한답시고 마치 ‘고4’, ‘고5’가 된 마냥 답답한 분위기를 풍겼고, 여자동기도 거의 없어 사춘기의 외로움을 달랠 길도 없었다. 외롭지만 꿈은 컸다는 민씨는 공부대신 연세애널스, 합창, 연극, 웅변대회, 통역봉사 등의 다양한 활동들을 하면서 대학교시절을 보냈다. ‘좌충우돌’. 그의 대학생활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이럴 것이란다.

외롭고 힘든 생활, 하지만…….

인천에서 통학하다보니 버스에서 졸아 종점을 돌기도 하고, 막차를 놓치기도 하는 등 바쁘고 힘든 생활을 이어나갔다. 또 연세애널스 활동을 하면서 외국에서 살다온 상류층 자제들과 어울리는 것도 힘들었다고 한다, 민씨는 “영어만은 자신 있었는데 그 친구들은 5개 국어를 하더라”며 “덕분에 독일어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던 그의 외로움과 어려움의 분출구는 여느 대학생과 같이 ‘짝사랑’이었다.
민씨는 그때도 연애는 ‘빈익빈 부익부’였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는 안타깝게도 전자였다. 미팅과 소개팅은 합쳐도 10번을 넘기지 못했지만, 소개받은 사람마저 민씨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미우학사에 앉아서 시도 지어보고, 여학생이 있을 창가도 바라보고. 속상해 하면서...” 지금보다는 조금 더 순수하고 감성적이지만, 그도 우리와 같은 20대를 보냈단다.
 

보내지 못한 편지

그 중에는 얘기하자면 몇 시간을 해도 다 하지 못할 인상적인 러브스토리도 하나 있다. 상대는 첫 번째 미팅을 했던 숙명여대생이었다. 첫 만남 후 주소를 교환했고, 학보가 몇 번 왔다 갔다 했다. 그러던 중 그녀에게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슬프다는 내용의 편지가 왔다. 편지에는 ‘정성스럽게 쓴 편지가 먼지 속을 뒹굴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프다. 봤으면 봤다고 동그라미 하나라도 해서 보내 달라’는 말과 함께 관제엽서가 동봉됐다. 동그라미 하나만을 원하는 그 소망이 매우 예뻐 얼마나 슬프겠냐고 위로해주는 답장을 썼다. 또 가지각색의 동그라미를 그리다보니 1천280개나 되는 동그라미도 그렸다.
그런데 그는 편지를 보내지는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사랑의 아픈 기억 때문에 생긴 ‘책임지지 못할 감동을 주지 말자’는 그만의 개똥철학 때문이었다. 다음해쯤 군대를 가려고 편지들을 정리하다가 그 편지를 발견하고는 다시 답장을 썼지만 같은 이유로 못 부쳤다. 그리고 학교 축제에서 그녀를 우연히 발견한 뒤 집에 돌아와 ‘봤지만 인사하지 못했다. 군대간다’며 쓴 편지 또한 다시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부쳐지지 못한 이 세 통의 편지들을 보내게 된 것은 군대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용산에서 청파언덕을 바라보다, 그녀가 졸업하면 부칠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마지막으로 펜을 들었다. “4년 동안 맡아뒀던 당신의 물건을 돌려드립니다. 게으름과 주저함으로 늦었는데, 이 물건이 내것 같지 않습니다. 국문학과인 당신 습작의 어쭙잖은 소재라도 되면 좋겠습니다.”

1280개의 동그라미, 그녀

한동안 답은 오지 않았다. 속상해하고 있던 그에게 군대로 숙대신보가 한 부 도착했다. 숙대신보에서 주최하는 범대학 백일장에서 단편소설부문에 가작으로 그녀의 이야기가 당선된 것이었다. 1280개의 동그라미라는 말이 신문 여기저기 쓰여 있는, 그녀 나름의 답장이었다. 당선소감은 이랬다. “녀석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에 우표를 붙여준 셈이다. 답장을 할 수 있게 된 것……. 다행으로 생각한다. 올 겨울은 따뜻하길 빈다.” 1986년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약 13년 뒤, 1999년에 미국에 가서 특파원으로 활동하던 시절 문득 궁금해져 이름을 검색해봤더니 그녀는 1,2년 전에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가가 돼있었다. 그 이후 한 번의 만남이 있었고, 첫 만남 때 꿨던 전철비도 근 20년 만에 갚았다. 민씨는 “이뤄진 사랑이야기는 아니지만 쉽게 가질 수 없는 사연”이라며 “로맨틱한 사건들을 빼고 줄거리만 이야기해도 이 정도”라며 웃었다.

성실의 아이콘

군입대전 여러 활동들에 힘을 쏟던 민씨는 제대한 후 학과수업에도 열심이었다. 학점도 만점이거나 이에 가깝게 받고, 부전공이었던 영문학과 강의는 이수학점도 초과해서 열심히 들었다. 그는 “교수님조차도 경고할 만큼 ‘빡센’ 수업에서조차 영문학과 학생들 틈에서 A학점을 챙기는 바람에 그 친구들이 저를 미워했다”고 귀띔했다. 또 한때는 ‘공보처 출근, 해장국과 쪽잠, 연합통신 번역일, 해장국과 쪽잠, 공보처’로 이어지는 48시간주기로 쉴 틈 없이 돌아가는 생활을 하면서도 버티며 열심히 살았다. 항상 남들보다 2~3배는 열심히 살던 습관은 쭉 이어졌다. 꼭 기자가 되겠다고 20번이나 시험을 보던 중에 운명처럼 합격한 KBS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민씨는 “꿈이 있었다”고 답했다. 늦게, 간신히 뛰어넘은 KBS 기자라는 문턱이었기에 다시 넘어 돌아갈 생각을 감히 못했다고. 그는 “사건사고에 항상 내가 있었다는 점, 우리나라의 역사에 내 역사가 녹아들어있다는 점에 감사하며, 힘들었으나 불평할 게 없다”고 말했다. 

두드리면 열린다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고, 길이 열린다. 내가 증거다”
민씨는 원래 참으로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초등학생 시절, 하루는 옆집 동생이 브라보콘을 먹고 있었는데 정말 먹고 싶었지만 자존심에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아이가 갑자기 ‘형 먹어’라고 하는 말에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놀라 안 먹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아이는 달다며 그 브라보콘을 도랑에다 던져버렸다. 그때서야 민씨는 동정하느라 준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흙 묻은 아이스크림을 발라서 먹었다고 한다. “불쌍해서 준 게 아니면 먹을 수 있었다”며 말이다. 이렇게까지 어렵게 살았던 그도 이틀에 4시간 꼴로 자면서 계속 달려와 보니 KBS 간판 앵커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그 때도 길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의 길을 쉼 없이 찾았고, 안되면 더 열심히 한다는 생각으로 했더니 어느새 꿈은 이뤄져 있더라고.
우리 모두 스무 살의 민경욱과 다를 바 없이 외롭고, 심각하고, 불안하고 가난한 대학생이다. 사랑도 해보고, 열등감도 느껴보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느라 잠도 설쳐보고 말이다. 그러니 이 같은 시절, 치열한 삶을 살아내고 꿈을 이룬 그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겨보는 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다. “치열하게, 꿈은 더 크게, 용기 잃지 말고 열심히!”
 

김신예 기자
shinyekk@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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