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스타일」에 세계인이 미친 일은 아무래도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앞은 제껴지고 뒤는 꼬인 기묘한 음색의 도입부가 말머리처럼 생겼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그게 말춤의 모든 비밀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사람들은 그저 몸으로 감탄사를 발하고 있을 뿐이다. 가수는 알까? 왜 자신이 떴는지?
지난 주 한국과 미국의 한국학자들이 모인 심포지엄에서 「강남스타일」에 대한 미국 미디어의 이해를 다룬 발표가 있었다. 나는 거기서 소개된 미국 내 반응이 신기했다. 중국 문화 전문가가 TV에 나와 “이런 음악은 통제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며, ‘사이’의 음악은 기성사회에 대한 풍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이’의 음악은 불온한 정신을 용납할 만한 민주적인 토대가 갖추어진 공간에서 현실비판의 감정을 마음껏 발산하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정말 그럴까? 과연 가수가 자신의 음악이 반사회적 일탈이라는 것을 밝히는 게 종종 보였다. 이번 노래만 해도 ‘시건방춤’이라는 이름을 하고 노골적인 커밍아웃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시건방진 모든 게 사회에 충격을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사회 내부의 스텍타클이 되어 사회로부터 이윤을 잔뜩 뽑아내는 탈사회의 가면무는, 기껏해야 풍자하는 자신의 모습을 즐기는 것이지 풍자 받는 대상을 욕하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 그보다는, 저 노래와 춤을 풍자로 해석하고 싶어 하는 집단 무의식이 사회 내부에 형성이 된 게 아닌가? 요컨대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간을 발길질하고 싶은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서 그럴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는 참에 미국 대중 ‘코믹스’의 맹한 악당처럼 생긴 아시아인이 알 듯 말 듯 하지만 엇비슷한 물건을 내놓으니까 그걸 자신들이 찾던 먹이로 유권해석해서 덥석 물어버린 건 아닌가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2008년 이래 ‘월가를 점령하라’는 시위가 터졌는가 하면, 얼마 전 작고한 노시인의 ‘분노하라’는 명령이 세계적으로 뜨거운 호응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그런데 저 유권해석에는 ‘분노’의 독기만 있는 건 아닌 듯하다. 말춤의 묘미는 의미란 아랑곳 않고 폴싹거리는 저 동작의 몰입성에 있는 게 아닐까? 즉 사회에 대한 강력한 풍자인 듯싶다가도 불현 듯 이건 풍자도 뭣도 아니고 그냥 춤이다, 라고 능청을 떠는 게 저 말춤의 은밀한 흡인력이라는 것이다.
이쯤해서 좀 더 근본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쳐들어 방울뱀처럼 소리를 내고 싶어진다. 어떤 상황에서든 노래로써 해야 할 일과 방법은 무수히 많겠지만 문제는 그 윤리성에 있을 것이다. 인류의 바람직한 변화에 실질적인 밀알이 될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일을 최우선의 원칙으로 삼는 것 말이다. 또한 가수는 가수대로 자신의 시건방을 헛발차기로 날리지 않기 위해 ‘시껍하는’ 데까지 몰고 가 봐야 하는 게 아닌가? CNN과 인터뷰할 때 보니 착한 사람 같던데, 뜬금없이 짐 모리슨이, 박현준이 생각나는 건 뭔가가 아쉬운 탓이다.

정명교 교수(문과대·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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