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천국』의 배경, 소록도를 가다

“소록도에 간다고? 거기가면 문둥병* 옮아오는 거 아냐?”
섬 전체가 국립소록도병원으로 지정돼있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에 위치한 소록도. 이곳으로 간다고 하자 지인들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던진 말이다.
이러한 편견이 훨씬 심했던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까지를 배경으로 한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은 소록도를 주무대로 한다. 왜 ‘우리의 천국’이 아닌 ‘당신들의 천국’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소록도를 찾아 그들의 아픈 역사와 희망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섬 내에 많이 살고있는 사슴과 섬의 모양이 닮아 ‘사슴섬’으로도 불리는 소록도. 섬의 경관에 감탄하고 있을 때 사슴 한 마리가 기자의 앞을 순식간에 지나가기도 했다. 평화로워 보이는 이곳에 한센병 환자들(아래 한센인)이 살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누구를 위한 천국인가

일제강점기였던 1916년,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한센인들을 소록도에 감금하기 시작했다. 한센인들을 한 공간에서 일괄적으로 치료한다는 명분에서였다. 이후 소록도병원으로 부임해온 원장들은 하나같이 한센인들에게 천국을 선사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일단 한센병에 걸리게 되면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받는 것은 물론이고 가족들에게서도 버림받아 평생을 죄인처럼 홀로 쓸쓸히 살아가야 했다. 그런 한센인들에게 원장들의 약속은 삶의 유일한 희망이나 마찬가지였고 소록도개발을 위해 힘든 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센인들의 이러한 믿음이 실망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섬 안에 시설이 한 가지씩 늘어갈 때마다 그만큼 섬 전체가 천국에 가까워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지옥으로만 변해가고 있었듯이, 이번에도 이 섬은 공원이 하나 더 늘고 그곳에 바쳐진 자신들의 노력과 희생이 크면 클수록 그 노력이나 희생의 크기만큼 섬은 점점 더 낙원과는 인연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 『당신들의 천국』  中

소록도병원에 3번째로 부임한 일본인 수호 원장은 처음에는 소록도의 발전을 위해 등대, 선착장, 공원 등을 만들어 한센인들의 믿음에 화답하는 듯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는 일에 한센인들을 동원, 고된 노역으로 면역력이 약한 많은 환자들을 사망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높이 9.6m에 이르는 그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매월 20일마다 강제로 동상에 참배하게 하는 등 억압은 날로 심해졌다. 끝을 모르는 탄압과 혹독한 노역을 견디지 못해 탈출을 시도한 이들은 발목을 절단당하거나 공개처형을 당했다. 한 개인이 사욕을 채우기 위해 수많은 환자들의 믿음과 희망을 무참히 짓밟아버린 데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천벌이라 해도 너무나 가혹한 비극

동상이 서있었던 터를 뒤로 하고 감금실로 발길을 옮겼다. 감금실은 일제 강점기에 한센인들이 결혼을 할 경우 남성들에게 의무적으로 단종수술**을 시켰던 곳이다. 태어날 아이에게 가해질 유전이나 감염을 원천차단한다는 명목으로 한센인 부부들에게서 2세를 가질 자유와 행복을 박탈해버린 것이다. 또한 애초에 한센병 유전을 방지하기 위해 시행됐던 단종수술은 1936년부터는 감금실을 나오기 위한 강제시술 행위로 바뀌었다. 빛과 바람조차 잘 통하지 않는 형무소와 감금실을 둘러보는 내내, 일말의 변론의 기회조차 없이 갇힌 채 고통 받았을 한센인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도 상황은 크게 달리지지 않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과거 소록도에는 병사(病舍)지대와 직원(職員)지대를 나누는 경계선이 있었다. 한센인 부부가 낳은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부모들이 있는 병사지대에서 직원지대로 강제로 옮겨졌다. 또한 이 아이들은 병사지대와 직원지대 경계선 도로에서 한 달에 한번, 그것도 ‘안전거리’라는 명목으로 5미터 떨어진 거리에서만 부모를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슬픈 역사를 알고 나니 왜 장례를 치르는 소록도 주민들이 상여가 떠나는 것을 ‘발인’(發靷)이 아니라 ‘환송’(歡送)이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갔다. 이 땅에서 평생을 육신의 고통과 사회의 편견에 시달리다 이제 자유로이 천국으로 들어가니 기쁘게 보내주어야 한다는 의미였으리라.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소록도

한센인들의 한(恨)으로 얼룩졌던 감금실 바로 옆에는 소록도병원이 있었다. 의료인들과 자원봉사자들로 북적이는 오늘날의 소록도는 아픈 과거의 흔적을 알기 어려울 정도로 평화로워 보였다. 간호사 문명옥(31)씨는 “마음에 상처가 많은 분들이라 처음에 관계를 맺을 땐 힘들지만 그 후엔 정말 가족같이 대해주신다”며 “병이 있다고 해서 실망하고 포기하기보다 자신의 삶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시는 분들이 많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각지에서 모여든 봉사자들의 모습도 자주 눈에 띄였다. 목포가톨릭대 정여원씨는 “손녀에게 맛있는 음식을 손수 먹여주고 싶어도, 손가락이 없는 당신의 모습에 손녀가 놀랄까봐 그러지 못하시는 어르신을 뵐 때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방학을 맞아 미국에서 2주간 봉사활동을 왔다는 컬럼비아대 임연진씨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봉사했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소록도에 오게 됐다”며 “미국에는 이런 한센병촌이 없어서 앞으로 의사의 길을 가는 데 소중한 경험으로 남을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봉사자들도 소록도병원에서 묵묵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중엔 일제가 소록도에서 벌인 참상에 대신 사죄하는 의미로 소록도봉사에 참여하게 됐다는 일본인도 있었다. 모치다 케이꼬(54)씨는 “일본에 의해 갖은 고통을 받으셨던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어르신들이 멀리서 이렇게 와줘 감사하다고 말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지배와 피지배의 폭력이 난무하던 소록도에는 화해와 용서의 씨앗이 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과제

“원장님께서는 저들을 그냥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특수한 조건과 양보 위에 그것을 수락할 수 있는 문둥병 환자로서만 이해하려 하심으로써 오히려 저들로 하여금 원장님 자신의 문둥이 천국을 짓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센병에 대한 인식은 점차 개선되고 있지만  한센병을 여전히 천형(天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소록도 바로 앞에 있는 녹동에서조차 일부 가게들은 한센인의 출입을 막는다고 한다. 한 주민은 “다른 신체장애를 앓는 사람들은 취직이 돼도 한센병은 한번 앓았었단 사실이 알려지면 본인뿐만 아니라 그 자식들까지도 절대 취직을 못 한다”며 씁쓸해했다. 지난 2008년엔 한센인 출신이 최초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등 그동안 긍정적인 많은 변화들이 있었음에도 한센인에 대한 사회의 차가운 시선은 여전히 크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잠깐 길을 묻고 스쳐간 기자가 낯선 곳에서 길을 잃을까 걱정돼 오토바이를 끌고 다시 나타나는 아저씨가 있는 곳. 친손주를 떠나보내듯 슬퍼하며 다음에 또 보자며 두 손을 꼭 잡아주는 할머니가 있는 곳. 차이를 열등으로 규정하는 사회의 폭력에도 불구하고, 순수의 땅 소록도에는 여전히 때 묻지 않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당신들의 천국은 ‘원장’이 상징하는 지배자의 지위를 벗어버리고 일반인 여성과 한센인 남성의 결혼 주례를 맡는 조백헌 원장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작가 이청준은 한센인과 일반인,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타자’(他者)가 아닌 ‘우리’가 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문둥병: 한센병을 일컫는 속된 말
**단종수술: 유전성 환자의 생식기능을 없애는 정관수술

 

박일훈 기자
ilhoonlove57@yonsei.ac.kr
사진 김재경 기자
sulwondo21@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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