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꽃 스튜디오를 만든 이선철(사회·86)·여상범 동문(철학·86)을 만나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두 시간 반. 아직은 한산해 시원스러운 영동고속도로를 달리고 굽이굽이 산길 국도를 지나면, 허름한 시골 버스 정류소가 한 채 덩그러니 서 있다. 여느 시골과 다름없는 그곳에서 하루에 네 대 있는 버스를 기다려 몸을 옮긴다. 휙휙 지나가는 풍경도 이내 지루해질 때 쯤, 산 속에서 보기 힘든 ‘이상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를 연상시키는 현대 건축물을 실록이 겹겹이 둘러싼 형세다.
이곳에서는 김창완 밴드와 아흔 지긋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함께 춤을 춘다. 엇나가있던 시골 아이들은 관악기와 밴드 연주를 하며 미래를 위한 꿈을 찾는다. 전교 1등 ‘범생이’부터 만년 꼴등 ‘찌질이’가 함께 모여 국악 오케스트라를 만든다. 아담하게 노랗고 하얀 감자꽃처럼 수수하고 조용하게, 그러나 평범한 시골 마을을 문화가 흐르는 창조의 땅으로 변화시키는 그곳. ‘감자꽃 스튜디오’를 만들어낸 이선철 동문(사회·86)과 여상범 동문(철학·86)을 만났다.

이선철, 문화로 공동체를 변화시키기까지

감자꽃 스튜디오 대표인 이 동문. 그가 감자꽃 스튜디오가 있는 이곳, 평창의 주민이 된지는 햇수로 10년째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기획사 폴리미디어 대표로 일했던 그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자우림, 이적, 노영심, 롤러코스터를 발굴해 음반을 발매했고, 대학로에서 수많은 공연들을 직접 기획하고 운영해오던 문화 기획가였다.
그 누구보다 바쁘게 살았던 이 동문, 그래서일까. 그는 뇌경색에 걸려 앓아눕게 된다. 그제야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그는 무작정 시골 폐교로 향한다. 그러나 천상 기획가인 그는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터. 그는 폐교를 폐교로 마냥 두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감자꽃 프로젝트’는 당시 문화관광부와 지방정부의 지원으로 속력이 붙었고, 건축가 이종호의 설계로 허름했던 시골 폐교는 어엿한 현대 건축물로 재창조됐다.
그리곤 그 안에 콘텐츠를 채워 넣기 시작한다. 평창중학교 음악 선생님에게 대뜸 찾아가서는 유례없는 전교생 ‘국악 오케스트라’ 제안을 했다. “처음에 서울에서 온 문화 기획자라고 말하니까, 교재 팔러 온 잡지사 직원인줄 알았나 봐요. 그렇게 시큰둥하시던 선생님도 이제는 평생의 소원이 이뤄졌다면서 잘 때 허벅지를 꼬집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이 국악 오케스트라는 평창초등학교까지 확대됐고, 한국 문화 예술 교육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평창고등학교에서는 ‘문제아’로 낙인 찍혔던 아이들을 모아 ‘대일밴드’라는 록밴드와 관악 연주를 하는 브라스 밴드를 결성했다. 이들에게는 서울 홍대 밴드 기획하던 시절 인맥을 총 동원해 밴드의 모든 것을 가르쳤다. 시골에서 접할 수 있는 선택지가 한정돼 있는 상황에서 이 학생들은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암담하게 고민하고, 방황했다. 그러나 7년 가까이 지난 지금 세상에 대한 시야가 좁아 항상 무엇을 할지 고민했던 이들이 실용음악과 등 다양한 곳에서 공부해 문화 커뮤니티 리더로, 실용음악 전문가로 어엿하게 성장해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된 폐교가 그의 상상력 하나만으로 많은 것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가 만든 ‘감자꽃 스튜디오’는 산골 마을의 문화 패러다임을 변화시켰다.
어떻게 이런 발상이 가능 했던 것일까? 이 동문은 “20대, 30대의 경험들이 모여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문화 기획자로서 이 동문의 경험은 가히 대단했다. 4학년 재학생 시절부터 김덕수 사물놀이 공연기획실장을 맡았고, 30대에는 인디밴드 레이블의 대표로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는 아티스트들을 발굴했다. 그가 감자꽃 스튜디오를 통해 해냈던 이야기들은 그가 그의 꿈을 위해 준비해온 삶 때문에 가능했던 일들이었다. 살아왔던 경험들, 교훈들, 그리고 확신이 모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여상범, 평창의 매력에 빠져들다

우리대학교 문과대 동기로 함께 공부했던 이 동문과 여 동문. 이들이 함께 감자꽃 스튜디오를 꾸리게 된 것은 그들이 함께 걸었던 궤적들 때문이었다. 졸업을 해서도, 두 동문은 김덕수 사물놀이패에서 각각 공연기획실장과 교육부장으로 함께 일했다. 사실 폐교를 활용한 감자꽃 스튜디오의 활용 방안 역시 김덕수 사물놀이패에서 충청남도 부여에 사물놀이 교육원과 경기도 양평에 한울림 공방을 폐교를 활용해 지었던 경험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생각과 성격은 다르지만, 문화에 대한 신념과 뜻을 같이 했기에 시간이 흘러 감자꽃 스튜디오로 뭉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 동문이 폐교를 거처로 삼기로 하자 여 동문은 주저 없이 이 동문과 함께 강원도 곳곳을 다니며 최적의 공간을 찾았다. 너무 번잡스럽지도 않고, 읍내와도 적당히 가까우면서 아늑한 마을의 폐교를 고르고 또 고르기를 수십 번. 그렇게 찾아낸 것이 바로 지금 자리 잡은 이곳이다.
여 동문의 꿈은 줄곧 풍물 연주자였다. 대학 시절부터 철학 공부보다는 풍물패 활동에 열심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배움을 게을리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연주자로서의 역량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해본 적 없는 일들에 도전하는 것은 예사였다. 꿈을 가진 대학생들이라면, 토익 점수나 학점 경쟁보다 더 근본적으로 대학에서 배워야할 것이 있다고 강조하는 그였다. “학부 수준의 교육은 그 학문을 활용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배우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철학도면 철학으로 사고하는 방법, 경영학도면 경영학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말이죠. 때문에 제가 해본 적 없는 것들에 도전해 그런 다양한 관점을 가져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호남좌도 농악 필봉마을 풍물굿의 인간문화재 양순용 선생에게 풍물을 배울 정도로 그 분야에서 욕심을 보였던 여 동문. 어찌 보면 서울 토박이인 그에게 시골 생활은 퍽 답답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괜한 걱정이다. 미국 알래스카로 두 차례 국악 교육 파견을 갔던 시절을 제외하면, 여 동문은 항상 감자꽃 스튜디오와 함께해왔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 살던 시골 처녀와 만나 결혼까지 할 정도로 완전히 평창 사람이 다 돼 있었다. 뭔가 특별한 시골 생활의 모델을 만들기 보다는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추면 자연스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떠오른다는 그다. 여 동문은 그 일들 중 하나를 실행에 옮긴 것이 감자꽃 스튜디오에서의 생활이고, 이 선택이 지금의 그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전한다.

꿈에 대한 관점을 바꿔라

이선철과 여상범. 이들을 첩첩산중 산골로 들어오게 만든 그 ‘꿈’은 과연 무엇일까. 두 동문은 입을 모아 ‘무엇이 되겠다’ 혹은 ‘무엇을 하겠다’와 같은 버킷리스트는 꿈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꿈은 이들에게는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다. 여 동문은 말한다. “단순히 대통령이 되는 것이 꿈이라면 대통령이 되면 그 꿈은 끝나겠죠?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얼마나 힘들까. 마찬가지예요. 그 자리에 오르는 순간 그 꿈은 깨지고 무기력해지거든요. 여러 가지 꿈을 꾸고, 그 과정에서 다른 꿈이 생기고… 그 꿈들이 모여 나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여 동문은 동아리 MT에서 10년 후 나의 꿈을 쓰는 자리에 ‘연주자’라고 적었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는 10년 후 호암아트홀에서 ‘사물천둥’의 창단 공연을 하게 된다. 그 꿈을 찾아 나가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 많은 꿈이 생겼다는 그는 지금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 모든 꿈을 세울 수 있는 자양분을 얻으려면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그의 꿈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근자열원자래, 하루하루의 꿈

감자꽃 스튜디오의 대표, 이 동문의 꿈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근자열원자래(近者悅遠者來)*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도 찾아온다는 말이다. 이 동문은 오늘 하루 가까운 누군가에게 만족을 주었다면, 그것으로 오늘 꿈을 이뤘다고 여긴다고 전한다. 하루 하루 만족을 주면서 사는 일도 사실은 퍽 버겁다. 사실 대학교 재학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히 문화기획자로서 하루도 편할 날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친다고 해도 이 근본적인 삶의 모토를 꺾을 수는 없었다. 어려운 상황의 연속에서도 줄곧 이 믿음 하나로 주어진 임무를 성공해 나가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이 벼랑 끝에 몰릴 때에는 가장 가능성 높은 것을 꽉 잡게 되잖아요. 그렇게 누군가에게 만족을 주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다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면, 삶의 이야기들이 하나의 ‘모델’로 만들어져 있더라고요.” 30대 젊은 나이에 죽을 고비를 넘기려다 우연히 감자꽃 스튜디오를 창립하고, 산골 평창을 변화시킨 문화 창조자로 자리매김한 것 역시 그의 꿈의 방향과 다르지 않아보였다.

꿈을 만드는 사람으로, 꿈을 키우는 공장으로

감자꽃 스튜디오의 역사는 더 이상 모두가 버린, 희망이 없는 ‘폐교’가 아니라 소리를 통해 꿈을 만들어 내는 창조의 공간이다. 사시사철 락 밴드와 함께 마을 축제가 열리고, 세대와 지역을 넘어 음악을 통해 공감한다. 농사 아니면 ‘노가다판**’ 이라는 시골 문제아들의 공식을 깨고 음악을 통해 이들은 커뮤니티 리더가 되고, 실용음악 전문가로 성장했고, 이제는 산골 소년 소녀들이 꿈꿀 수 있는 모델로 자리매김했다. 국악 오케스트라로 하나 된 학교는 이제 다양한 관점을 포용할 수 있는 ‘서번트 리더(Servant Leader)’를 만들어내는 문화 교육의 상징이다.
이선철과 여상범은 감자꽃 스튜디오를 통해 이러한 모델을 끊임없이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문화를 통해 꿈을 심어주고, 그 꿈의 모델이 다시 다른 이들의 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포부다. 비록 꿈 하나, 소리 하나는 작지만 이 작은 것들이 모여 전체를 바꿀 수 있다고 일깨워 주는 곳이 바로 감자꽃 스튜디오다. 이곳 작은 꿈의 공장에 이들이 심어놓은 작은 도전이 어떤 미래를 만들어낼지 사뭇 궁금해진다.

* 먼 곳에 있는 백성도 그 소문을 듣고 흠모하여 찾아온다는 말. 공자가 춘추전국시대에 자기 나라를 떠나는 백성들을 보고 한탄하는 제후에게 남기고 떠난 여섯 글자의 말이다.
** 막일 판의 속말

 이민주 국장 mstylestar@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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