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 사학과 공교육 속 우리나라의 역사왜곡, 그 실상을 파헤치다

오랫동안 반복돼 온 일본의 역사왜곡에 더불어 최근에는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자국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동북공정까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왜곡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높아졌다. 실제로 지난 2006년에는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정부차원에서 ‘동북아역사재단’을 만들기도 했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높아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또한 역사를 왜곡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은 부족한 편이다. 우리나라가 역사를 과장하거나 은폐한 부분은 전혀 없는 것일까?

 

 


역사를 내 입맛대로 뻥튀기하다 ‘유사 역사학’, 그 위험에 대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이나 중국 등과 같이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 역사를 과대포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 중 『환단고기(桓檀古記)』와 ‘대륙삼국설’이 이에 속한다. 이러한 견해들은 우리나라 일부 재야사학자들이 신봉하는 학계의 대표적인 논란거리다.

우선 『환단고기』는 우리민족의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 아니라 BC 7197에 세워진 ‘환국’(桓國)이라고 주장하는 역사서다. 이 책에 따르면 환국은 세계 최초의 국가로 그 땅의 넓이가 남북으로 5만 리, 동서로는 2만리에 달했으며 총호구수는 1억 8천만에 달했다고 한다. 『환단고기』는 심지어 수메르문명과 잉카문명 등도 한민족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모든 인류의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은 한민족에게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한편 대륙삼국설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영토가 한반도를 넘어 중국대륙과 일본의 영역 대부분을 지배했다는 가설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엔 홍수가 났는데 백제에는 가뭄이 닥쳤다’는 기록이 있다. 대륙삼국설을 지지하는 재야사학자들은 만약 한반도의 영토가 기존 학계의 주장과 같다면 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와 대륙삼국설은 주류 역사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유사 역사학’으로 분류되고 있다. 유사 역사학은 그 주장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비논리적이고 비역사적인 근거로 역사학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역사학의 한 갈래를 말한다. 『환단고기』는 원본이 존재하지 않아 그 출처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역사책이 집필된 시기보다 후대에 등장한 용어와 학설들이 본문에 빈번하게 등장한다. 또한 중국 당나라 전성기에도 그 인구수가 5천만 명에 불과했다는 점에 주목하면 그보다 훨씬 이전인 신석기시대에 우리나라가 광활한 영토와 엄청난 인구수를 자랑했다고 여기기엔 그 논리가 취약하다. 이는 ‘비판적 검토 없이 역사가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 주장과 상충되는 경험적·논리적인 증거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유사 역사학에 해당한다.

한편 대륙삼국설은 ‘고대의 문헌을 선택적으로 이용해 자신의 주장에 적절한 것만을 인용하고 자신의 주장과 맞지 않는 것은 무시하거나 부정한다’는 유사 역사학의 특징과 부합한다. 이러한 유사 역사학에 대해 우리대학교 왕현종 교수(인예대·역사문화학)는 “논리적인 근거를 무시한 채 상고사의 영토크기를 왜곡하는 등, 유사 역사학적 주장들은 역사의 올바른 인식을 방해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진실을 은폐하고 역사를 부풀리는 이러한 행태는 비단 일부 재야사학계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다. 가령 우리나라의 역사 공교육에서도 역사인식의 문제점이 나타난다.

 

진실의 역사가 아닌 ‘보여주기 위한 역사’

 

현행 국사교과서는 우리나라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승리한 사건에 대해서는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자세하게 설명한다. 반면 우리나라가 크게 패배했던 사례들은 아예 설명하지 않거나 간략하게만 제시하여 은폐하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때 5만 명의 조선군이 1천600명의 일본군에게 참패한 용인전투나, 병자호란 때 조선군 4만 명이 청나라 기병 300기에 살육 당했던 쌍령전투와 같은 사례들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다. 이는 이스라엘이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로마군에게 전멸당한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자세와 대비된다. 이스라엘은 2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어린아이들을 요새에 오르게 한 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마라”고 복창시키고 있다.



국사교과서의 백제 해외진출과 관련한 서술에 있어서도 문제점이 드러난다. 해당 부분을 보면 백제가 요서지방, 산둥반도, 규슈지방에 ‘진출했었다’는 표현이 있다. 물론 ‘진출’이라는 단어자체는 해당 지역을 ‘점령’, 혹은 ‘지배’했다는 것과는 다른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문제는 이 ‘진출’이라는 표현이 이미 역사적으로 검증된 백제의 한반도 내 영토 확장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동일하게 쓰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사 교과서에서 말하는 백제의 요서, 산둥, 규슈 진출은 해당지역을 점령하고 지배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왕 교수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백제와 이들 지역은 무역, 외교 등의 교류가 이뤄지는  정도였을 것”이라며 “해당지역에 대한 군사적인 행동이 있었다고 해도 일회적인 움직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렇듯 해당지역을 점령하고 통치했다는 내용이 명확히 검증되지 않은 상태임에도, 국사교과서에서는 백제의 요서, 산둥, 규슈 ‘진출’을 ‘영토 확장’의 측면에서 다룬 것이다.

 

근현대사 속 ‘역사 지우기’

이와 유사한 문제들은 근현대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약산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때 백범 김구와 함께 의열투쟁에 있어 양대산맥을 이뤘던 인물이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 둘의 위상은 크게 차이난다. 김구는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며 존경받고 있지만, 김원봉은 그 이름을 아는 사람조차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이다. 이는 해방 후 월북한 김원봉의 전력 때문에 그동안 우리 역사교육에서 그 이름이 거의 다뤄지지 않은 탓이다. 이외에도 여전히 수많은 독립운동인사들이 해방 후 월북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역사교육에서 배제되고 있다. 이에 대해 왕 교수는 “남북분단으로 인한 사상대립 때문에, 월북인사들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없었던 시대적 환경 탓에 발생한 비극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한국군에 대한 교과서 서술 역시 문제점을 갖고 있다. 한국군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게 된 이유와 그로인해 파생된 경제적 효과, 그리고 현지에서 국군이 떨쳤던 활약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히 서술돼있다. 그러나 현지에서 국군이 저지른 문제들에 대해선 외면하는 경향이 짙다. 때문에 국군이 민간인을 베트콩으로 오인해 69명의 사상자를 낸 ‘퐁니·퐁넛사건’과 같은 문제나, 국군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라이따이한’이 베트남 현지에서 문제시 되는 불편한 역사는 공교육을 통해서는 접할 수 없다.

 


올바른 역사인식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예측해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있다. 우리나라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역사를 부풀리거나, 과거의 오점을 가리기에 급급하여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이러한 연구의 존재의의를 무색하게 만든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역사에서 수치심이나 우월감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이를 성찰의 계기와 행복의 디딤돌로 활용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역사인식의 자세가 아닐까?

 

박일훈 기자
ilhoonlove57@yonsei.ac.kr
자료사진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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