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늦는다는 것’과 ‘성공한다는 것’의 기준은 ‘상대적’이다. 그러나 그 ‘시기’ 만큼은 결코 상대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직장에서 열 다섯 번이나 해고를 당하고, 마흔 여섯에 남들이 다 말리는 일에 뛰어든 이사람. 그의 행동을 단순히 ‘패기’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무모해 보인다. 하지만 예외는 언제나 존재한다. 바로 소리꾼 장사익이다.


나는 가수다

장사익은 가수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리꾼 장사익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부른다. 그의 이름은 사람들에게 퍽 생경하다. 그가 공연을 통해서만 관객들과 소통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난 2006년 EBS 스페이스 공감 1000회 특집 ‘최고의 공연’이 처음으로 장사익이 TV를 통해 관객과 소통한 순간이었다. 가수라면 특별한 무엇이 있을 법도 하지만 장씨는 “특별한 열정보단 그냥 노래가 좋아서 부르고 다녔죠”라 답했다. 결국 그의 일상생활이 가수라는 특별함이 된 것이다.

장씨의 음악은 국악에 바탕은 두고 있지만 국악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를 소리꾼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장사익은 “소리꾼들께 굉장히 송구스럽다”며 “나는 이 말을 소리꾼의 길로 올바르게 가라는 의미라 생각하며 항상 엄하게 그 말을 받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황송하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내게 붙어 다니는 수식어는 늦깎이

장사익은 늦깎이다. 그는 가수가 되기 전엔 오랫동안 단순히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상업고등학교 출신이었던 그는 고등학교 3학년 2학기에 보험회사에 취직했다. 막연히 ‘가수가 돼 볼까?’라는 생각에 퇴근 후 서울 낙원동에 위치한 노래학원에 다녔다. 그러나 직장과 노래를 병행하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그는 “솔직히 가수라는 꿈을 접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군 시절 문선대*에 합격해 노래도 해보았지만, 제대 후 형편이 안 좋았던 그는 다시 직장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상고출신이었기에 언제나 감축 1순위가 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때마다 직장을 전전했다. 마지막 직장은 그의 매제가 운영하던 카센터. 좌절에 빠질 수도 있었지만, 그 해 12월 31일 그의 인생이 변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 국악

장사익과 불가분의 관계가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국악. 전주대사습놀이 장원을 차지했던 그는 80년대에 직장을 전전하면서도 국악과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지난 1993년 12월 31일 새해가 밝기 전 그도 여느 사람들처럼 자신의 삶을 반성했다. “세상에 나온 이유가 이렇게 대충 살다가 떠나라는 것이 아닐텐데” 이것저것 생각하다 문득 떠오른 마지막 패는 ‘태평소’였다. ‘이것만 3년 열심히 하면 즐겁게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1월 3일 카센터 일을 그만두고 김덕수 사물놀이패에서 꽹과리를 치는 이광수를 찾아갔다. 이씨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 끼워만 달라고. 태평소가 사물놀이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악기는 아니었지만, 그는 즐겁게 태평소를 불렀다.

출중한 태평소 실력도 돋보였지만 그의 진가는 사물놀이 뒷풀이에서 드러났고, 지난 1994년 나이 마흔 여섯에 ‘딱 한번만 해보자’는 생각으로 홍대 앞 극장을 빌려 공연했다. 11월 6일과 7일 100석 남짓의 작은 극장에 처음으로 돈을 받고서 2회 공연을 했다. 2일간 총 800여명의 관객이 장사익을 찾았다. 드디어 ‘장사익’이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장사익. 찔레꽃과 한복

장사익의 대표곡은 「찔레꽃」이다. 어느 5월 잠실에서 사람들이 몰라주는 곳, 눈을 향하지도 않는 곳에 소복하게 핀 하얀 찔레꽃이 내뿜는 향기를 맡고 이 노래를 작곡했다. 세상에 내비치지 못하는 이 ‘병신’같은 것이 본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그래서 ‘찔레꽃처럼 울었지 / 찔레꽃처럼 춤췄지 / 찔레꽃처럼 노래했지’라는 가사가 붙었다고. 참 소박한 가사다. 그의 가사에는 미사여구가 붙지 않는다. 함축적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한 ‘한편의 시’ 같다.

실제로 그는 그가 작곡한 노래 가사에 주로 시를 활용하고 있다. “좋은 가사를 활용하는 가수들도 멋지지만 아름답게 나와 있는 것을 활용하는 것이 기본”이라며 “시대를 대표하는 노래라면 노랫말부터 좋아야한다”고 전했다. 아름다운 시를 활용한 그의 음악은 처음 다가가기는 힘들지만, 그 멋을 느끼면 참다운 아름다움의 가치를 맛볼 수 있다.

또한 장씨하면 한복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공연복장은 매우 간소하다. 새하얀 한복, 고무신이 전부다. 물론 양복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도 하나의 이유지만 스스로 한복만큼 멋진 옷이 없고, 우리 옷을 입어야 한국인답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서란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백의민족이라 하는데, 흰색 옷 입고 나가서 공연하면 품위도 있어 보이고 스스로 당당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장사익은 젊은이들에게 “모든 것을 규정하려고 하지 말라”고 한다. 특히 그는 노래의 장르가 노래를 즐기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강조한다. 새로운 것에 대해 규정하는 것보다 도전하고 노력하고, 사람들이 즐거워할 수 있게 보여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소리’라는 말이나, 대중가요나 장사익이라는 장르로 그의 노래를 규정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소리, 대중가요, 장사익과 같이 자신의 노래 장르를 규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 신념은 노래에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는 공연에서 마음 가는 데로 노래를 부르기도, 심심하면 박자도 맞춰가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자연이 호흡에 따라 오듯 저도 호흡에 따라 ‘자유스럽게’ 노래해요” 그가 국악, 트로트, 클래식, 대중가요 등 모든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도 이런 자유로운 방식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자기의 문화에 대한 자신감과 문화의 수준을 판단할 수 있는 소양을 제대로 된 문화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의 밑바탕으로 꼽았다. 그는 좋은 문화를 알아보는 안목이 더 좋은 문화를 탄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전 뒷풀이 자리에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보다 장사익을 더 높게 평가했던 초등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장씨는 말한다. “내 노래가 훌륭하다고 자찬하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의상을 입고 춤추는 것보다 노래 자체를 향유하는 그 아이의 문화적 소양을 말하고 싶은 겁니다”라고.

더불어 그는 요즘 젊은이들의 각박한 삶을 안타까워했다. 다들 최고의 자리에만 오르려다보니 눈앞에 보이는 낮은 직장보다 더 나은 곳에 취직하려고만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미래가 없어 보인다’는 것. 때문에 숨가쁘게 살더라도 때에 맞게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살길 바랐다. “사람이 때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으니, 대학생들은 하고 싶은 공부에 전념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15번의 해고, 그리고 최후의 패로 꺼내든 태평소, 마흔 여섯 늦은 나이에 주변의 부추김으로 해본 공연, 가수가 되기 위한 벽돌을 자신도 모르게 쌓아 왔던 그의 삶. 그리고 온갖 평지풍파 속에서 자신에 대해 회의감을 가져본 적이 없는 장사익. 그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살아있는 교훈이지 않을까?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노래 실력뿐만 아니라 그의 삶 전반을 걸쳐 이렇게 부른다. 불세출의 가인(歌人) 장사익.

* 문선대 : 연예인, 가수, 배우, 예술 방면 등에 유능한 사람이 모여 부대를 홍보하고 장병을 위해 위문공연도 하는 부대

 


김광환 기자 radination@yonsei.ac.kr
사진 배형준 기자 elessar@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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