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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있는 배우, 하정우를 만나다
  • 김유빈, 이예진 기자
  • 승인 2012.03.18 21:45
  • 호수 163
  • 댓글 0

강남의 한 카페. 문이 열린다. 한 사람이 들어온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진회색 코트와 붉은색 스카프. 검은 뿔테 안경. 살짝 기른 턱수염과 슬쩍 말아 올린 앞머리.
이 남자, 느낌 있다.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범에서 국가대표 스키선수, 나이트클럽 삐끼, 거액의 변호사, 건달 계 보스에서 찌질이 소설가에 이르기까지 수십 가지의 캐릭터 속으로 완벽하게 녹아 들어간 인물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강렬한 아우라가 아닐까. 지난 9일 오후 2시, 기자들에게 주어진 1시간의 시간을 ‘픽션’으로 만들어버린 이 남자, 하정우. 그와 함께 했던 ‘멋진 하루’를 소개한다.


하정우의 꿈, ‘살아있네’
(살아있네 -범죄와의 전쟁 中)

사람들은 그에게 묻는다. 하정우, 당신 정도면 이룰 만큼 다 이룬 배우 아닙니까. 하지만 그가 가졌던 ‘꿈의 사이즈’는 이 정도 크기가 아니었다. 20대에 뉴욕에서 가졌던 가슴 떨렸던 꿈이 그를 영원히 ‘현실에 만족할 수 없게’ 붙들어버린 것이다.
뉴욕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거리의 악사들과 타임스퀘어 퍼포먼스 공연들, 뮤지컬 공연들은 20살 하정우의 배우로서 잠재된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꼭 여기 다시 와서 영화를 찍어야겠다, 그래서 세계적인 배우가 돼야겠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시간이 지나 그는 다시 한 번 뉴욕을 찾는다. 배우가 되어 영화 「시간」을 촬영한 후다. “이 영화가 배우로서 좋은 시작이 되겠구나 싶었어요.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고, 뉴욕에서 얻은 감정을 잊고 싶지 않아 혼자 갔었죠.”

김성훈을 하정우로 성장시킨 것은 비단 20대에 막연히 갖게 된 야망 뿐만이 아니었다. 강한 집념과 배우에 대한 확신 역시 일조했던 것이다. 재학 당시 연극 「오델로」에서 맡게 된 주인공 ‘오델로’ 역에 자신을 이입시키기 위해 하정우가 들인 노력은 대단했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서적을 모조리 찾아보며 얻은 매뉴얼을 캐릭터에 대입시킨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자기 자신을 완벽히 ‘캐릭터화’ 하고 캐릭터를 완벽히 ‘하정우화’하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쉬워 보인다.

내 과거의 사랑은 비록 끝났지만 아직도 갈 길은 유효하다
(내 과거의 사랑은 비록 모두 실패로 끝났지만 아직도 사랑은 유효하다 -러브픽션
中)

무쇠 같은 하정우라고 항상 맑은 날만 있겠는가. 하지만 비온 뒤에 땅이 굳듯, 궂은 날들이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배우들이 카메라 앞에서 긴장할 때가 있어요. 긴장하는 모습이 보이는 이유는 긴장을 숨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긴장하는 것은 당연하니까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버리면 어느 순간 긴장이 사라집니다.”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궂은 날을 이겨내는 방법은 ‘그냥 슬퍼하는 것’이다. 아플 때 충분히 아파하면 어느 순간 아픔이 잊혀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가짐 하나로 극복해내기 힘들 때 그가 항상 찾는 것이 있다. 바로 문화생활이다. “일만 하는 사람을 만나면 지루해요. 별로 나눌 대화도 없죠. 하지만 어떤 사람이 미술이나 음악에 엄청난 조예가 있다면 그 사람과 대화하고 싶고 친해지고 싶죠.” 그는 이렇게 말한다. ‘완벽한 상상으로 현실을 잊는 것’ 하정우에게 문화적인 소양과 교양은 현실을 극복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촉매제’와도 같다는 것이다.

나는 그림도 방울방울해
(나는 너를 방울방울해 -러브픽션 中)


지난 2006년 미국에 갔을 때의 일이다. 직업란에 'actor'라 적으니 그를 불법체류 위험인물로 분류해 취조실에 끌고 갔다. 그 이후 그는 직업란에 'painter'라 적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정말 화가가 된 것 같았다.
이미 앞에서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화가 하정우. 그는 지금까지 개인 전시회를 3번이나 열 정도로 화가로서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었다. “배우와는 다르게 화가는 창조적이에요. 영화에서 배우는 감독의 오브제일 뿐이죠. 그러나 화가는 온전히 자신만의 세계에서 작업할 수 있어요.” 그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그냥’이다. 그는 그냥 그림을 그린다. 그림은 영화처럼 앙상블을 이뤄가며 해야 되는 작업도 아니고 영화처럼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다. 그림이란 오로지 ‘김성훈’의 세계인 것이다.

이쯤 되면 배우 하정우와 화가 김성훈이 어우러진 결정체가 궁금하다. 과연 감독을 해볼 생각은 없을까. “생각은 있는데 계획은 없어요. 창조의 욕구가 밖으로 뛰쳐 나오면 움직이겠지만 지금 당장은 배우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이 되는 것 같아요.”

건달은 싸워야 건달이고, 배우는 연기를 해야 배우입니다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학생이고, 건달은, 싸워야할 때 싸워야 건달입니다 -범죄와의 전쟁 中)

카멜레온 같은 그이지만, 그래도 그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연기할 때가 아닐까. 하정우의 배우 철학은 확고했다. 그에게 연기를 못한다는 말은 ‘넌 쓰레기야’라는 말과도 같단다. 그는 연기 근처엔 얼씬도 해보지 못한 신출내기 기자들에게 캐릭터 창조의 과정을 하나하나 설명해줬다. 다음은 그가 찍은 영화들 중 가장 애착이 간다는 캐릭터, 「멋진하루」의 조병훈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이다. (1679호「연세춘추」12면 참고)

캐릭터가 창조되기까지는 마치 한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듯, 인내심을 갖고 캐릭터를 관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물이 어떤 헤어스타일을 좋아하겠다, 수염에 자국이 있을까 없을까 등의 세밀한 부분까지 모두 의상팀과 의논해서 정합니다.” 실제로 하정우는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형배라는 캐릭터를 소화해내기 위해 전신에 문신을 했다. 뿐만 아니다. 「러브픽션」에서 찌질남 구주월로 변신하기 위해 있던 근육까지 없앤 ‘열혈배우’였던 것이다.

이렇게 힘겹게 탄생한 캐릭터가 ‘살아있기’ 위해선 본격적으로 감독과 함께 영화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먼저 감독과 목표를 조율합니다. 나의 초기 목표는 이건데 감독의 초기 목표는 무엇인지를요.” 서로의 목표를 조율한 후엔 시나리오 작가의 대사 수정 작업이 진행된다. 이렇게 해서 ‘촬영 직전’에 이르기까지가 무려 2~3개월이 소요된다. “그 다음부턴 촬영에만 집중하면 돼요. 보통 한 씬에 10컷 정도가 되는데 한 컷 당 기본 셋팅 시간이 30분정도 걸리니 한 씬을 촬영하는데 총 7시간 30분(15컷X30분) 정도가 걸립니다.” 이것도 실수 없이 진행될 경우에만 가능하다. NG가 나는 경우, 두 세배로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으므로 보통 한 씬 찍는데 꼬박 하루가 걸리는 셈이다.

사랑과 정열의 20대를 위하여!
(사랑과 정열을 위하여! -비스티 보이즈 中)

시간이 지났다. 중간에 ‘빠글빠글’하게 머리를 펌한 매니저가 들어왔고, 커피한 잔과 음료수 두 잔이 들어왔고 뜨거운 커피 때문에 차가운 물 한잔이 들어 온 것 외엔 지극히 고요했다. 한 사람은 타이핑을 했고 한 사람은 받아 적었으며 한 사람은 그 둘을 관찰했다.
하정우, 그는 20대에게 이렇게 전했다. 한 그릇이라도 학생식당에서 밥을 더 먹으라고. 교문을 벗어나자마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음침한 사막의 공간이 나타난다며. 하지만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너무 쪼들리지 말라고. 마음가는대로 행동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시절은 20대 뿐이라며.
결국 선택은 자기 몫일 것이다. 20대의 고민이 한 사람을 배우로, 화가로 만들었다. 오델로 역을 소화해내며 터득한 연기력이 지금의 국민배우를 있게 한 것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20대 청춘이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고민할만큼 고민하면 결국 그 고민도 풀리기 마련이니까. 하정우, 그와의 ‘멋진 하루’를 여기서 마친다.


김유빈, 이예진 기자 alphagirl@yonsei.ac.kr

김유빈, 이예진 기자  eubini@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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