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11월 24일자 신문에 고3학생이 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보도가 신문에 실렸다. 이 학생의 살해 동기는 전교 1등을 강요한 어머니의 폭력이었다. 평소에도 그리 나쁜 성적은 아니었던 A군은 “꼭 서울대 법대를 가야한다”, “전교 1등을 해야한다”라고 말하며 성적이 좋지 않으면 잠을 못 자게 하거나 밥을 안 주는 등 평소 성적에 대한 압박을 심하게 가한 것으로 경찰에 진술했다고 한다.

약 3000년 전, 맹자가 살았던 시대는 중국의 격동기 중 제일 혼란스러웠던 춘추전국시대였다. 이때는 왕실의 힘이 약화되고 봉건제가 무너져 감에 따라 각각의 제후국들은 철제 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발전시키고 인재를 등용했다. 중요한 것은 제후국들의 군대에는 무당의 힘의 절대적으로 강했다는 점인데, 무당은 현재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개념보다는 병을 치료하는 의사의 성격이 강했다. 또한 주술을 행해 병력에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그러기에 무당들은 상당한 대우를 받는 직업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이었다. 현대사회로 치면 명문대를 들어가기 위해,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으뜸’이라는 관념을 가진 현대사회와는 달리 춘추전국시대에는 선비란 가장 하찮은 직업으로 생각했다. 이런 시대에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를 선비로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노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인 것이다.

맹자가 어머니와 처음 살았던 곳은 공동묘지 근처였다. 놀만한 벗이 없던 맹자는 무당이 곡을 하는 등 늘 보던 것을 따라 놀았는데 이 광경을 목격한 맹자의 어머니는 안 되겠다 싶어서 이사를 했다. 두 번의 이사를 걸쳐 마침내 글방 근처로 이사한 맹자는 글과 예법을 익히는 놀이를 주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맹자를 보고 어머니는 마침내 이사를 멈췄다고 한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맹자는 유가(儒家)의 뛰어난 학자가 되어 아성(亞聖)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맹자 어머니는 고금에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으뜸으로 꼽히게 되었다.

현재의 눈으로 바라보면, ‘아, 그래. 역시 공부를 잘하는 게 제일이야. 역시 사람은 공부를 잘해야해.’라고 생각하겠지만, 전혀 맞지 않는 해석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춘추전국시대에는 선비가 가장 천대받는 직업이었다. 오히려 공동묘지에 살았을 때 맹자는 무당이 되어 그 시대에 걸맞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맹자의 어머니는 당시 직업의 유행을 뿌리치고 다가올 미래를 바라보며 맹자를 선비로 교육시켰다. 때문에 맹자는 지금까지 이름을 떨치는 훌륭한 학자가 됐으며, 그의 이념인 유교의 ‘사농공상’의 제도는 수천년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했다.

우리의 부모들은 맹자 어머니의 이념을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자식들이 돈을 많이 벌기 바라면서 어쩌면 제일 돈을 벌지 못하는 공부를 강요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부모 세대들이 살았던 80, 90년대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학을 나오면 좋은 직장에 취직해 안정적으로 잘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회는 그렇지 않다. 그 어느 때보다도 격동하고 있는 시대이다. 자신들의 세대가 경험한 잣대를 그대로 자식에게 들이대는 어리석은 생각은 버려야 한다. 부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오해하지 말고 10년, 20년 뒤를 생각하며 자식들의 교육에 힘써야 할 것이다.

글 류은채 기자 blingbling1004@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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