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영 기자의 부기자 일기

대학 입학 후 첫 여름방학. 수습기자라면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기간, 부기자가 되기 위한 관문인 ‘원주세미나’가 나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중문과 학생인 나는 당시 전공 진입을 위해 한어수평고시(汉语水平考试,HSK)를 준비하느라 한창 바쁜 시기였다. 시험은 한 달 전에 접수를 하지만 원주세미나 일정은 세미나가 시작되기 3주 전에야 통보됐다. 겹쳐버린 일정.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번 시험이 내게 지니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 여러 번 심사숙고했다. 결국 나는 원주세미나에서 마지막 날 일정은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내 상황과, 이러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국장에게 말했다. 하지만 나에게 돌아온 대답은 “안 돼”. 수차례 설득 끝에 내가 꺼낸 최후의 카드는 HSK를 보지 못한다면 ‘춘추를 나간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수습기자에게 원주세미나란 자신이 남은 기간 동안 활동할 부서가 배정되는 중요한 시기다. 하지만 이로 인해 나는 첫째 날과 둘째 날의 세미나에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서 배정에 대한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어졌고, 장학금도 삭감됐다. 이 제안을 쉽게 수용하긴 힘들었지만, 그래도 춘추에 남아있고 싶었기에 패널티를 받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첫 여름방학은 시험공부와 원주세미나 과제로 시작됐다.

반갑지 않은 손님

평소 기획취재부에 가고 싶었던 나는 기획취재부 과제를 특히 열심히 했다. 기획취재부 부장에게도 직접 내 의사를 표현했다. 하지만 부서지망권이 없어진 내게 더 이상 원주세미나는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그럼에도 원주세미나 과제를 끝까지 수행하지 못한 수습기자들도 자신이 희망하는 부서로 배정받은 사례가 있기에, 나는 가고 싶은 부서에 배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렇게 믿으며 동기들보다 하루 일찍, 세미나에서 나와 다음날 시험을 준비하며 잠들었다. 새벽에 울리는 전화 벨소리. “세영 오빠! 오빠 사진부 됐어!” 순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음날 치는 시험조차 떠오리지 않을 정도로 내 머릿속은 이미 하얘졌다. 꼭 기획취재부가 아니더라도 기사를 쓰고 싶었던 내게 사진부는 뜬금없었다. 그렇게 나는 방중일정을 시작하기도 전에 난 춘추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봤고, 혼자서도 많은 고민을 했지만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나는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정인 만큼 후회 없이 열심히 해보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들춰진 트라우마

어느덧 시간이 흘러 벌써 학기말이 찾아왔고, 나는 부기자 일기를 쓰고 있다. 부기자 일기를 어떻게 써야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다른 기자들의 부기자  일기를 읽어봤다. 그 중 한 동기의 부기자 일기를 읽게 됐다.

‘취재1부 A, B’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원주세미나 마지막 밤, 일자로 앉아 부서 배정을 기다리던 그 긴장감, 이름이 불리기까지 숨죽여 기다리던 순간들, ‘취재1부 A’라고 불린 뒤 짧은 순간 동안 속으로는 ‘아니겠지,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B’라는 이름을 불러주길 얼마나 간절히 바랐었는지. 지금도 가만히 앉아 그 순간을 돌이켜보면 가슴이 뛰는 것 같다. 그렇다. 그렇게 나는 취재1부 부기자가 됐다.

얄밉다. 정말 얄밉다. 그는 나보다 과제 이행률은 낮았다. 그러나 ‘끝까지’ 참가했다는 이유로 그는 자신이 배정받고 싶은 부서의 기자가 됐다. 이와 달리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부서에 배정받았다. 방대한 양의 원주세미나 과제에 내 방학을 희생한 게 물거품이 된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원주세미나 때 끝까지 남아 있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 때 내가 기획취재부 부기자로 배정 받았다면 이런 고민들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

이렇게 기자생활을 이내 해내던 중 97기 사진부 동인을 만나게 됐다. 그분은 내게 왜 사진부에 왔냐고 물었고 나는 앞에서 설명했던 말들을 말해줬다. 그러자 갑자기 그분이 놀라며 “나도 너처럼 원주세미나 도중에 나왔지만 장학금이 삭감되지도 않았고, 원했던 사진부에도 배정받았다”고 말했다. 순간 다시금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왜 그토록 시달리고 고생했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었다. 나는 “국장이 원래 춘추에서는 원주세미나를 참여하지 않으면 잘리거나, 패널티를 받는다고 하던데요”라고 말했다. 그분이 웃으며 대답한 그 한마디를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다.

“원래란 없어.”

충격이었다. 난 여태까지 춘추의 모든 것들이 ‘원래부터 그래왔으니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원래란 없었다. 단적인 예가 있다. 현재 부기자들은 토요일에 자신의 기사가 제대로 실렸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침 10시 조회에 출석해야 하며, 1차 판을 확인한 뒤에야 귀가할 수 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런 제도는 ‘없었다’.
자신이 믿었던 사실이 깨지는 순간 밀려오는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엄청난 충격을 수반한다. 여태껏 내가 생각했던 춘추의 꽉 막힌 모든 것들이, ‘원래’부터 그래왔고 다들 경험해 왔던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더 이상 ‘원래’라는 명분으로 나를 위로할 수가 없다. 이렇게 나는 춘추에서 태엽이 풀려버린 무기력한 장난감이 됐다.

글 정세영 기자 seyung10@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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