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를 만나다

새터민, 김일성대학 출신,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하루 5만 여명이 방문하는 블로그 운영자. 한 사람을 동시에 수식하는 단어들이라고는 믿기 힘든 이 단어들은 모두 주성하 기자를 향한 말이다. 그는 화려한 수식어에 걸맞게 인터뷰 도중에도 쉴 새 없이 걸려오는 전화에 회의실을 바쁘게 들락날락 거렸다. 약간 처진 눈매와 멋쩍은 미소로 ‘사람 좋다’는 말을 절로 부르는 인상 좋은 그의 얼굴 뒤에는 누구보다 큰 포부가 확실히 자리 잡고 있었다.

한반도, 하지만 너무 다른 남과 북

주성하 기자(아래 주기자)가 단순히 새터민이라는 사실 외에 큰 주목을 끈 이유는 그가 김일성대학 출신이라는 것이다. 북한 사회에서 김일성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은 사회 지도층으로서의 안정된 삶을 보장받는 것이나 다름없다. 기득권 세력이 김일성대학의 인재들에게는 고위직 위주로 자리를 ‘배정’해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기자도 북한사범대학의 교수 역할을 부임 받았으나 북한에서 고위직의 편안한 삶을 누리며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부와 명예를 뒤로하고 월남했다고 한다.  

 

 
이렇게 북한 최고 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고위층 자제들과의 접촉 또한 자연스러워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주기자 역시 그들의 화려한 일면을 보며 대학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농촌 출신이었던 그는 고향에서 상류층의 정 반대 세상 또한 볼 수 있었다. 그의 고향에서는 여기저기서 굶어죽은 시체들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기찻길에 비쩍 마른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심하게 마른 아이들은 추위는 추위대로, 더위는 더위대로 고통을 온 몸으로 겪고 있었다. 극과 극의 모습을 본 그는, 지도층이 말하는 ‘평등’이란 허황된 것이라고 깨달았고 북한 사회의 체제에 환멸을 느껴 탈북을 결심했다고 한다.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로 남한의 자본주의에 대해 깊은 탐구를 해 본 그는 남한의 체제가 북한의 것보다는 합리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늘 북한의 ‘모두 잘 살자’는 식의 기조는 지도층의 거짓된 약속일 뿐이라고 생각해왔다. 실제 생활상의 차이가 체제의 부조리함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잘 살려고 노력하고 발버둥쳐도 가난과 생활고에 시달리는 것은 여전했다. 자본주의는 노력하면 적어도 굶어죽지는 않는 ‘합리적인’ 체제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는 그 결심을 행동에 즉시 옮겨 38선 이남으로 발길을 돌렸다. 

 
기자로서 다하는 민족적 사명

주기자는 탈북과정에서 새터민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중국에서의 검문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 중국어도 원어민의 수준으로 연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타깝게 체포를 당했고 그 길로 바로 북송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 뒤 그는 6개의 감옥을 전전하며 열악한 생활을 했다. “남한의 감옥 생활은 북한의 것과 비교하면 천국이라 할 수 있어요. 북한에서의 수감 생활은 수감자의 인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시도 끝에 그는 탈북에 성공했지만 그의 가족은 체포돼 또다시 북한으로 보내졌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탈북했지만 남한에서의 삶도 그리 순탄치는 못했다. 그도 처음엔  ‘막노동’부터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8월, 어느 달보다 심한 무더위 속에서, 그가 남한에서 처음으로 얻은 직업은 와인 박스 하차 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첫 일당이 3만5천원이었는데 그걸 받는 순간 어찌나 기쁘던지……. 굶어죽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이다.

북한 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그 체제의 부당함을 알리겠다는 민족적 사명을 띤 채 월남한 그에게는 그 사명을 다할 수 있을만한 일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일엔 기자가 제격이었다.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그는 동아일보 입사를 결심했다. 2009년, 지원 당시 경쟁률이 무려 300:1 이었음에도  당당히 동아일보사에 합격한 그는 기자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글이나 기사들을 쓰다보니 6년간 대학 생활을 함께한 친구들과는 적대적인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들이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을지는 몰라도 부조리한 체제를 비판할 줄 아는 제가 승자라고 생각해요”라며 자신의 선택을 확신했다.

 


기자 생활을 하며 글의 힘이 놀랍다는 것을 안 주기자는 『서울에서 쓰는 평양 이야기』라는 블로그도 운영하며 새터민과 북한 주민들을 돕는데 앞장섰다. 특히 그는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 속에 지내는 북한 아이들을 구하는 데 열심이다. 실제로 그의 휴대폰에는 실시간으로 새터민들의 상황을 담은 문자가 온다. “지금 새터민들은 사천성에 있습니다”라며. 자신의 사비를 내놓으면서까지 그들을 돕는데 힘을 쓰는 그는 너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돈을 많이 벌어도 남는게 없어요” 라고.  


통일을 바라보는 젊은 우리들의 시선

“통일은 찬반을 논할 주제가 아니에요.” 통일을 찬성하냐고 묻자 남과 북, 두 곳에서 모두 살아본 경험이 있는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남과 북은 본래 한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은 개개인의 손에서는 떠난 ‘역사적 숙명’이자 ‘필연’이라고.

주기자는 현재 대한민국의 정책이 통일 지향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기득권이 이끄는 통일 정책에 젊은이들이 맹목적으로 따라간다면 통일로 향하는 길이 점점 멀어져만 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우리와 같은 젊은이들이 통일에 좀 더 적극적인 자세와 시각으로 접근한다면 ‘숙명’이자 ‘필연’인 통일은 우리 앞으로 한층 다가올 수 있을 거에요”라고 말한다.

북한에 가족들을 두고 온 주기자는 자신에게 개인적인 행복은 적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행복하다. 그가 느끼고 있는 행복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민족을 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행복이다.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께서 내 몫으로 마련해두신 역할’은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어려운 자들을 돕는 것이다. 마치 “그러한 역할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오다 보니 남한에서의 정착도 비교적 쉬웠던 것 같아요”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벌써 통일이 된 후의 새터민의 역할까지 내다보고 있다. “통일 후에 새터민들은 흔히 남북간의 위화감을 없애줄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되는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새터민들은 남한에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탓에 대개 ‘기초생활 수급자’와 다름없는데 남한 사람들은 그런 그들에게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런 위화감을 없애줄 열쇠는 바로 어린이 새터민들이다. “그들을 성공적으로 탈북시켜 질 좋은 교육을 통해 인재로 키운다면 남북간 이질감을 없애주는 데 크게 이바지 할거에요”


자신이 짊어진 민족적인 사명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주기자. 그에게 새터민 기자로서의 사명은 ‘짐’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함께할 ‘친구’같은 것은 아닐까. 

글 김지영, 박일훈, 정기현 수습기자 yondo@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