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앞 272 타고 떠나는 혼자만의 일탈, 지금 출발합니다!

겨울방학이 다가온다. 생각이 많아지는 추운 계절, 집에 꽁꽁 숨어있지만 말고 찬바람을 맞으며 나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혼자 떠나는 여행에서 나의 또 다른 면을 만나는 뜻밖의 수확을 거둘 수 있다. 여행이라고 해서 한 짐 짊어지고 떠나는 긴 여행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운동화 끈을 질끈 매고, 도심 속에서 즐기는 조금 특별한 여행을 계획해보자. 그것도 학교와 가까운 곳에 명소들이 자리 잡고 있어 공강 시간을 활용할 수도 있다면 금상첨화다. 이제, 정문 앞 버스 정류장에서 272번을 타고 다 함께 출발해 볼까? 

기자와 함께 떠날 경복궁 옆 명소

보너스! 그 근방의 갤러리

헌 책방 가가린(gagarin)

갤러리 ‘팔레 드 서울’

카페 MK2

갤러리 쿤스트 독, 갤러리 팩토리, 갤러리 차

아트선재센터

국제 갤러리, 전시 공간 16번지,

갤러리 ‘학고재’

트렁크 갤러리, 아라리오 갤러리 서울, 갤러리 현대, 갤러리 인

 이제 버스에서 내릴 준비를 하자. 경복궁 역 3번 출구부터 시작되는 골목길 사이사이에서 뜻밖의 명소를 만나볼 것이다.  

 

추억을 파는 곳, 헌책방 가가린

 

경복궁 역에서 내려 영추문 근처의 통의동 골목길에 서있으면 시간이 유난히 더디게 흐르는 느낌이 든다. 80년이 넘는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은, 한국의 수많은 문인들이 거쳐 간 곳이기도 하다. 길 한 편에는 1930년대 서정주 시인을 비롯해 김동리, 오장환 시인 등이 함께 묵었던 ‘보안여관’이 세월의 흔적을 안고 그대로 남아있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라는 이상의 시 ‘오감도’에 나오는 바로 이 구절의 ‘막다른 골목’도 여기 통의동 골목길이라고 하니, 골목길 그 자체로 많은 문인들에게 영감의 원천을 제공한 셈이다. 조금 더 걸으면 ‘세종대왕 나신 곳’이란 비석도 보인다. 이정도면 이 근방을 문화예술의 요람이라고 할 만 하다.

문인들과 역사를 함께해온 골목이라서인지, 개성 있는 공간들이 눈에 띈다.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한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이름을 딴 ‘가가린(Gagarin)’은 누군가의 물건을 맡아 팔아주는 독특한 형태의 책방이다. 물론, 헌 책방이라고 해서 책만 거래되는 것은 아니다. ‘개성’ 있고 ‘팔릴 만 한’ 소장품이라면 무엇이든 위탁할 수 있다. 중고 서점이라고 하면 먼지 휘날리는 골목길 한켠에서 깐깐한 할아버지가 문 앞을 지키고 서있는 모습이 떠오르지만 이곳은 평범한 헌책방이라기엔 ‘조금’ 특이하다. 작은 공간에 눈길을 끄는 미술 잡지들부터 포스터, 음반, 비디오, 장난감, 심지어는 직접 담군 고추장까지 각종 아이템을 찾아볼 수 있다. “평생회원 가입비 5만 원, 연회비 2만원을 내면 자신의 물건을 위탁 판매할 수 있고 가격도 직접 책정하면 된다”는 것이 책방 ‘죽돌이’ 차승현씨의 설명이다.

이곳의 평생 회원권을 신청하면, 마치 정리 안 된 내 방 서랍에서 보물을 찾듯, 책방의 서랍을 한 칸 한 칸 열어보며 아이템을 고를 수 있다. 어렸을 때 갖고 놀던 장난감, 빛바랜 ‘산수’ 노트, 작고 아기자기한 그릇들, 그리고 건담 비디오 까지...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녹슨 철제 필통 하나를 열어보니 위탁자가 직접 책정한 가격, ‘1000원’이 적혀있다. 어떤 추억이 담겨있는 필통일지, 왜 필통에 1000원이라는 값을 매겼는지, 주인이 남자였을지 여자였을지 등, 필통을 들고 이곳에 와서 물건을 건네주고 갔을 ‘원래 주인’을 맘대로 상상해볼 수 있는 가격도 1000원에 포함돼있다. 번질번질한 새 필통이 아닌 누군가의 손을 거쳤을 녹슨 필통을 사니, 그 사람의 추억도 같이 산 것 같아 즐겁다. 그리고 때마침 기자가 방문했을 때 ‘위탁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디자이너로 보이는 두 사람이 찾아와 직접 만든 크리스마스 느낌이 나는 가방을 맡기고 갔다. 이곳에서는 저 가방이 이제 누구의 품으로 가게 될까, 크리스마스 전에 주인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옆에 있어 더 빛을 발하는 두 이웃, 가가린과 MK2

  

이렇게 추억까지 사고 팔 수 있는 ‘가가린’은 수익성을 얻기 보단 중고 시장을 통해 서로서로 안 쓰는 물건들을 교환하자는 취지에서 생겨났다. 중고임에도 자꾸 눈이 가는 이유는 누군가의 애정이 담긴, 사람냄새 나는 소품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규칙이 있다. 헌 책방답게 고전적인 결제 수단인 오로지 현금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현금이 얼마 없어 고민하는 손님에게 주인아저씨는 꼭 필요한 것 아니면 빼라고 늘 충고한다. 가게에서 물건 사라고 재촉은 받았어도 사지 말라고 충고 하는 건 처음이다. “소비를 조장하고 싶지는 않아요”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단순히 많이 파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꼭 사지 않더라도 손 때 묻은 잡동사니를 요리조리 구경하다보면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가가린 책방을 들렸다면 꼭 함께 가 봐야할 곳이 있다. 가가린 책방을 함께 열었던 바로 옆 카페 MK2이다. 간판 하나 없이 심플한 디자인의 이 카페는 사진작가 이종명씨와 조명 디자이너 이미경씨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다. 예술가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다 보니 그 내부 인테리어도 감각적이다. 넓은 창과 디자인 서적들, 바에 올려 진 근사한 1960년대산 수동 커피머신 ‘파메아(Famea)’, 그리고 선반에 진열된 빈티지한 가구들까지. 앉아있는 의자부터 선반에 진열된 것들 모두 주인 부부가 10여 년간 해외에서 수집한 가구들이다. 이렇게 감각적이고 유서 깊은 가구를 눈으로만 보기 아깝다면 앉아있던 의자나, 선반에 진열된 마음에 드는 가구를 사갈 수 있다. 선반 위에 진열된 가구들도 모두 판매 대상이다. 자세히 보면 가구마다 초록색 스티커에 가격표가 붙어 있다. MK2에 찾아갈 때마다 인테리어가 달라지는 것은 손님들이 종종 마음에 드는 가구를 집어가기 때문이다. 어느덧 12월, 이곳에서 겨울맞이 인테리어 아이디어도 얻을 겸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가구도 구경하면 ‘일석이조(一石二鳥)’다.

 

 북촌 길 곳곳에서 펼쳐지는 예술 이야기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다가 272번을 타고 15분 정도 지나 풍문여고 앞에 내리면 ‘북촌 한옥 마을’로 잘 알려진 북촌길이 나온다. 한국 미술의 오랜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이곳은 국내 대형 갤러리들의 모여있어 ‘경복궁 갤러리 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갤러리 촌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곳이 ‘아트선재센터’다. 이 곳은 하나의 건물에 전시장, 로비, 소극장이 두루 갖춰진 복합 문화 공간이다. 아트선재의 트레이드마크는 바로 1층 라운지의 독특한 북 카페다. 주인이 직접 선정한 책들만 파는 ‘셀렉트 북숍(Select book shop)’이라 서점보다는 누군가의 서재를 구경하는 느낌이다. 판매되는 책들은 사회경제학 도서는 드물고 대부분이 독립잡지, 1인 잡지, 미술 분야의 잡지다. 진열된 책을 통해 주인의 관심사가 드러난다.

재밌는 것은 오랜만에 이곳에 찾아간다면 잘못 찾아왔나 착각하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여기도 올 때마다 라운지 공간 인테리어가 달라져 주인이 계속 바뀌나 오해하게 된다. 이 곳 라운지는 주기적으로 예술가들이 개입해 인테리어를 바꾼다. 아트선재 측에서 매년 아티스트를 초청해 라운지 공간을 작가의 프로젝트에 따라 변화 시킨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는 학술 강연, 독립영화 상영, 큐레이터 교육까지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니, 이것이 바로 복합문화공간의 매력이다. 아트선재 앞에는 천진포자, 북촌 칼국수 같은 몇 십 년 전통의 맛 집들이 즐비한 먹자골목이 있어 주린 배도 채울 수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북촌 길에서는 마음의 양식 뿐 아니라 위장의 양식까지도 책임진다.

 

 전통과 현대의 숨결이 이어지는 곳

 

아트선재에서 나와 광화문을 향해 조금 더 걸으면 갤러리 ‘학고재’가 나온다. ‘학고재’는 가장 ‘한국적인 거리’라는 북촌 길의 위상이 무색하지 않게 한옥의 예스러움과 양옥의 세련됨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그 이름은 옛것을 배워 새것을 창조해 낸다는 뜻의 ‘학고창신(學古創新)’에서 따왔다고 한다. 전통과 현대의 숨결이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는 이곳의 분위기와 꼭 맞는 이름이다. 요즘은 학고재 소장품 전시가 한창이었다. 특히, 이곳에서도 19세기 서예가로 유명했던 해강 김규진 선생과 ‘흥선 대원군’으로 알려진 석파 이하응의 글, 그림 솜씨를 엿볼 수 있었다. 근현대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눈앞에서 과거의 문인들의 솜씨를 직접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멀리 떠나야만 좋은 여행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번 쯤은 구불구불한 골목길과 세월의 흐름을 안고 멋스럽게 낡은 옛집들 사이사이로 걸어보자. 한두 번 가다보면 이 곳 지도가 머릿속에 그려지고, 나만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휴일 떠난 짧은 도심 속 문화 기행이 당신의 삶에 어떤 전환점이 될지 모른다. 평일 내내 지친 심신에 닳아 버린 몸과 마음을 그 추억으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김기윤 기자  munamuna@yonsei.ac.kr
사진 정세영 기자 seyung10@yonsei.ac.kr

자료사진 가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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