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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꼬마아이
  • 센치한 솔방울
  • 승인 2011.11.28 02:28
  • 호수 158
  • 댓글 0

‘이 선수, 빠른 몸놀림으로 참 유명하지요? 네, 그렇습니다. 키는 작지만 이 전광석화와 같은 돌파력 때문에 세간에 주목을 받는 인사이지요. 자, 돌파 시도하나요? 한 사람, 두 사람. 이야, 역시 이거 막을 수가 없네요. 이제 남은 것은 센터 한 사람! 등지고 몸싸움, 아 길어지면 안되죠. 이건 거의 삼손과 골리앗의 싸움과 같아요. 탕탕, 두 번 공을 튀기고, 이제는 과감하게 슛을 날릴 타이밍입니다. 상대편 선수들이 서포트하러 달려오네요. 아, 이때 왼쪽으로 한 번 페인트 모션을 한 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상대의 마크를 떨어뜨리고 높이 점프합니다. 그렇죠!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터닝 슛~!’

하지만 어림없는 볼. 6살? 혹은 7살? 아직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듯한 꼬마 아이에게는 너무나도 높은 저 골대. 제자리 도움닫기를 해 보아도, 저 멀리서 달려와 이빨을 꽉 깨물고 점프를 하며 공을 던져 보아도, 아슬아슬 닿지 않는 저 버거운 높이는 저 멀리서 그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 또한 아찔하게 한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여기서 멈출 것만 같았던 꼬마의 노력은 열 번, 스무 번이 지나도, 그리고 10분, 20분이 지나도 그칠 줄을 모른다. ‘얘야 그만 하렴! 넌 아직 어려서 아무리 공을 던져도 저 높다란 골대에 골을 넣을 수 없어! 이제는 힘 그만 빼고 좀 쉬려무나.’ 그래도 제 딴에 나이 좀 먹었다고 파릇한 저 아이에게 충고의 한마디를 건네주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이상도 하다. 이놈의 목소리는 뭐가 그리도 잘났다는 건지 도무지 입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왜일까?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아이를 상대로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 창피해서? 아니면 나의 모자란 한 마디로 저 아이의 자유권 행사를 침해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판단해 보았을 때 옳지 않기 때문? 모두 틀렸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고개를 90도 각도로 치켜들어야 겨우 보일 둥, 말 둥한 저 높은 고지를 정복하기 위한 한 꼬마아이의 몸부림. 그것은 마치 ‘새가 알에서 깨어나기 위한 노력’과 같은, 자기 자신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그것이 형성하는 임계점을 돌파하여 더 큰 이상을 조그마한 손아귀에 꽉 붙잡기 위한 사람들의 염원. 나의 가슴 한 구석에서 살아 숨 쉬는 이 작다란 소망의 뜨거운 입김은 나에게 언제나 새로운 도전에의 에너지를 부여해 주는 뜨거운 엔진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유리병 속에 갇힌 벼룩들. 우리는 모두 이러한 뜨거운 이상을 지니고 있음에도, 부모님이, 선생님이, 직장 상사가, 그리고 사회라는 대집단의 권위적인 모습이 제시하는 한계에 순응해버리고 마는, 아니 그것에 순종하고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미물들에 불과할 뿐. 우리의 달구어진 혼은 언제나 ‘안주’에의 유혹에 쉽사리 현혹되어 그 열기를 잃어버리며, 우리의 방대한 이념은 언제나 상아탑에 갇힌 지식인마냥 상실된 실천력에 의하여 어두운 심연으로 침전해만 가고 있다.

동물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글을 남긴다? 이는 옛말에 불과하다. 요즘 동물들은 살아서는 애완동물이라 하여 우리 인간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죽어서는 영양가 있는 고기며, 고급 의류에는 필수인 천연가죽이며, 콜라겐이며, 에헴, 또한 아무튼 간에, 우리들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남겨주고 극락왕생하기 위한 먼 길을 떠나간다. 그렇다면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떵떵거리는 우리들이라면 무언가 더 멋지고 훌륭한 결실을 남겨야 하지 않겠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 하였다. 어떻게든 우리 인간의 업적을 미화하기 위하여 편파적인 통계를 위한 자료를 찾다보니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위인전에 이름이 실린 우리의 자랑스러운 얼굴들. 유럽을 정복한 나폴레옹, 발명왕 에디슨, 신대륙 발견의 콜롬버스, 한글 창제 신화의 세종대왕님. 그런데 가만있어보자,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칭해지는 이들의 공통점이 유난히도 눈에 확 들어온다. 그것은 모두가 ‘Yes’라 말하는, 혹은 말하도록 교육받는 이 범인들의 세상에서 나 홀로 ‘No’라고 외치며 비범인으로서 우뚝 서기를 고수했던 이들의 완고함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비록 먼지만 쌓여가는 책꽂이지만, 그들이 위인전이라는 표제를 달고 당당히 책꽂이의 상석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것. 세상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짊어지고 갈 의무라고만 생각되는 이 무거운 족쇄를 깨뜨려 버리고 자신의 이상을 위하여 미지의 한 걸음을 개척해 나간 이 발자국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도 위인들처럼 나 자신을 혁신해 내고, 더 나아가 세상을 바꾸기 위하여 노력해야겠다!’ 말로는 참 쉽다. 못할 것이 없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해야만 한다.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 비범인으로 향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치지만 결국 잘못된 길로 빠져들어 살인이라는 원죄을 저지르는 비극의 주인공. 그리고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지 않을까?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즘이 불러온 잔혹한 참상. 이들의 모습을 새겨보라. 자신을 구속하는 저 높은 장벽을 넘어서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에는 잘못된 장소로 곤두박질치게 된 슬픈 참상을. 천진난만하게 공놀이를 하는 꼬마아이의 모습으로 시작된 나의 생각 방울은, 이게 웬걸, 그리 쉽게 터져버릴 것 같지 않다.

이상. 그것은 현실이란 평범한, 일반적인, 상투적인, 천편일률적인, 단순한 세계의 반대 극에 위치하고 있는 ‘비’현실적 공간을 의미한다. 저 드높은 하늘을 동경하여 금단의 힘찬 날갯짓을 고집하던 이카루스. 그는 자신이 속한 현실이라는 공간을 무시하고 이상만을 추구하다 결국 심연의 바다 속으로 영원히 가라앉게 되었다. 감초가 없는 약방은 상상할 수나 있는가? 컨베이어 벨트 돌아가듯 지루하고 단조로운 우리의 일상 속, 이상이 가져다주는 짜릿한 일탈은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카루스의 비극을 기억하자. 비록 이곳이 아무리 지겹고 형편없는, 나에게 실망만 안겨주는 장소일지라도, 우리가 살아왔고, 살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 살아갈 이 곳. 우리는 여기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이제는 정말 지칠 때도 되었음에도, 골대에 공을 집어넣기 위한 필사의 날갯짓을 시도하는 저 꼬마아이. 비록 오늘은 실패할 지라도, 시간의 흐름이라는 필연적이고 강력한 손길은 그 아이의 몸도 마음도 점점 성장하게 할 것이며, 따라서 그는 어쨌거나 저쨌거나 골을 넣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당연히’란 말로 일축하여 물 흐르듯 이루어지는 자연의 법칙인양 치부해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골을 넣을 수 있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만약 꼬마의 끊임없는 몸부림이 없었다면 거기에는 골도 없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도약. 그것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 단, 이 기회를 유효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아이다운 순수함을 기반으로 한 의지와 실천력. 아 참,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언젠가 저 높이 도약하여 ‘골’이라는 소망을 이루게 된 꼬마도 결국에는 다시, 순서가 어찌되었든 두 발을 이 땅에 딛게 될 것이란 사실!

어느새 텅 비어버린 농구코트. 차가운 바람이 나의 옷 속을 타고 흐름을 느낀다. 이제 일어나야할 때라는 것을 통감하는 순간, 나는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끓어오르는 강한 열망에 못 이겨 탁탁, 오랫동안 앉아있어 굳어진 다리를 두어 번 풀어주고 전 속력으로 달려들어 저 익숙한 골대로 되도 않는 맨손 덩크를 시도하는 것이었다.

센치한 솔방울  yond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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