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우 송도순과의 만남

 어릴 적 봤던 만화영화 『톰과 제리』. 쫓고 쫓기는 둘의 이야기 속에는 대사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좀 더 기억을 더듬어 보면, 톰과 제리를 지켜보는 아주머니의 내레이션이 어렴풋이 들려온다. “오, 불쌍한 톰”. 이 정겨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성우, 송도순(62)씨다. 제법 쌀쌀해지기 시작한 날씨에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만나고 싶은 사람, 목소리에 삶이 묻어나는 성우인 송씨를 만나봤다.

성우의 길은 우연한 계기가 불러온 운명 같은 길

“얘, 너 목소리가 참 좋다. 성우 해보지 않으련?” 주임교수에게 들은 한 마디가 삶의 전환점이 됐다.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할 당시만 해도 그의 꿈은 배우였다. 그러나 170cm를 웃도는 그의 키가 당시 여배우로서는 지나치게 컸기 때문에 그는 연극무대에 서고자 했던 꿈을 접어야 했다. 배우가 되지 못한다면 연극영화과에 남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송씨는 전과를 위해 교수실을 찾았고 주임교수에게 성우의 길을 제안 받았다. 그렇게 성우의 길로 들어서게 된 송씨는 중앙대 방송국 성우 모집에 합격했고 지난 1967년 당시 4학년 선배였던 김을동 의원과 함께 동양방송 TBC의 공채 시험을 쳤다. 선배의 핸드백을 들어주기 위해 같이 수험표를 끊은 것뿐인데 공채에 합격한 사람은 놀랍게도 송씨였던 것이다. 당시 1학년이었던 송씨는 그렇게 ‘얼떨결에’ 방송국 성우가 됐다. “사람마다 그 나름의 운명이 있나봐”라는 송씨의 말이 참 절묘하게 느껴진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목소리가 좋다는 칭찬 한마디가 나를 성우로 만들었어.” 말의 위력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배우가 되려는 한 학생이 자신의 말에 성우가 될 줄은 지도교수도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송씨는 주변인에게 칭찬과 좋은 말을 많이 해 줄 것을 강조한다. 또한 송씨는 자기 자신에게도 칭찬을 많이 해주라고 말한다. ‘마음먹은 대로 안 된다고 자기 자신을 원망하지 마라, 칭찬을 해 주어라.’ 그것이 그의 인생철학이다. “자기한테든 남한테든 칭찬을 해줘야 해. 꿈을 꾸는 것은 좋지만 그 꿈이 자신을 힘들게 해선 안 돼.” 이어서 덧붙인 말에 그의 인생이 오롯이 녹아있다. “현실은 쥐인데 이상은 다들 코끼리를 원하지. 자신을 칭찬할 시간도 부족한데 말이야. 그렇게 자기를 괴롭히면서 지나간 인생은 돌아오지 않는데…….” 고된 방송국 생활을 하며 송씨가 느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44년간의 방송 생활 동안 그는 자신을 채찍질해서 정상에 올랐지만, 가장 아껴야 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말 속에 피를 담고 땀을 담아라

서편제는 말이다. 사람의 가슴을 칼로 저미는 것처럼 한이 사무쳐야 되는데 니 소리는 이쁘기만 하지 한이 없어. 사람의 한이라는 것은 한평생 살아가며 응어리지는 것이다. 살아가는 일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일이 살아가는 일이 된단 말이다.
<영화 『서편제』 중에서>

송씨는 성우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진심’이라고 말한다. 소리에 진심을 담을 때 비로소 인물의 삶이 녹아나기 때문이다. “목소리의 시대는 지났어. 목소리가 좋다고 성우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야. 마음을 담아서 연기를 하는 게 중요한 거지.” 마음과 마음이 맞닿을 수 있도록 진심을 담는 것, 그것이 성우로서의 송씨를 있게 했다. 말 속에 피와 땀이 있었기에 그의 목소리는 기억될 수 있었고 대중에게 오롯이 전해질 수 있었던게 아닐까. “진심으로 진실을 이야기해야 목소리에서도 말이 만져져.” 송씨의 목소리 철학은 영화 서편제의 한을 연상시킨다. 진심을 담는 성우의 목소리와 한을 담는 우리 민요 서편제는 결국 같은 맥락이다. “가슴이 없으면 말은 안 나오고 소리만 나오는 것”이라는 송씨의 말처럼.
비단 소리에만 진심이 묻어나는 것은 아니다. 송씨는 흔히 눈을 ‘마음의 거울’이라고 하듯이 눈을 마주보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말한다. 눈을 보지 않고 말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의미 없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은 영화 『서편제』에서 소리꾼 ‘유봉’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진성(眞聲)과 다름없다. 그래서인지 인터뷰 내내 송씨는 기자들과 눈을 맞추며 대화를 이어나갔고 그 진심을 담은 목소리는 편안했다.

노력하는 국민성우

“만화 성우를 하면 여러 가지 삶을 살 수 있어. 내가 나비도 되고, 곰도 되고. 그래서 만화할 때가 좋아.” 다채로운 성우의 삶이 좋다는 송씨는 그의 말대로 운명적인 성우였는지도 모른다. 젊었을 때는 더 잘하기 위해, 지금은 밀려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연습을 반복한다는 송씨.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건 어쩔 수 없다. “좀 더 공부를 했다면 다양한 삶 속에서 다른 철학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그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송씨의 진실된 ‘목소리 철학’에서는 이미 그가 목소리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TV 방송과 달리 라디오 방송은 목소리만으로 모든 것을 전달해야 하기에, 그의 목소리엔 삶이 더욱 진하게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세상에는 많은 성우가 있다. 그 성우들의 목소리에는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도 있는가 하면 한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는 목소리도 있다. 송씨의 목소리는 어느 쪽일까? 목소리에 진심을 담아 매 순간마다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는 아마 후자일 것 같다.
“진심으로 진실을 이야기해야 목소리에서도 말이 만져져.” 그녀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메아리친다. 그와의 편안한 만남은 여기에서 마무리하지만, 진심을 보다 깊이 있게 전달하려는 송씨의 노력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글 김은주, 김정연, 전성호 수습기자 yond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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