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총에서 출토된 금관. 신라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금관이다.

 

신라 금관은 우리나라의 금속공예 유물 중 가장 대표적인 유물일 것이다. 신라 금관은 일제시대때 금관총(金冠塚)에서 처음 발굴된 이후 여러 고분에서 총 여섯 개의 금관이 발굴되었다. 우리는 여러 매체에서 신라의 왕들이 금관을 쓰고 집무를 보는 이미지에 익숙해져 있다.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런 금관의 이미지가 사실일까? 

신라 금관이 발굴된 고분은 금관총(金冠塚), 천마총(天馬塚), 황남대총(皇南大塚) 북분, 금령총(金鈴塚), 서봉총(瑞鳳塚) 으로 모두 5개이다. 이 중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금관은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자가 적혀있는 허리띠와 함께 출토되었다. 따라서 황남대총 금관의 주인은 여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고분이 축조되었다고 추정되는 4~6세기에는 신라에 여왕은 없었으므로 이 금관의 주인은 적어도 ‘왕’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금관총은 15세 전후의 남자아이의 무덤이며, 금령총 역시 어린 남자아이의 무덤이었다. 이로 보아, 금관의 주인은 왕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관. ‘부인대’라는 글자가 적혀있는 허리띠와 함께 출토된 것으로 보아, 금관의 주인은 여성이다.

 

이들 고분의 공통점은 돌무지 덧널무덤[竪穴式積石木槨塚]이라는 구조를 한 고분이라는 것이다. 이들 돌무지 덧널무덤은 땅에 넓은 구덩이를 수직으로 판 다음 시신을 안치한 관과 함께 수많은 부장품을 넣은 목곽(木槨)을 넣고 그 위에 거대한 돌을 높이 쌓고 다시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든 구조이다. 이러한 돌무지 덧널무덤들은 대부분 4세기에서 6세기 사이, 약 150년간 조성되었다. 이 시기는 신라 지배자의 왕호(王號)로 ‘마립간’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시기에 축조된 고분이다.

 

돌무지 덧널무덤의 구조. 신라 금관이 발굴된 고분의 묘제는 공통적으로 돌무지 덧널무덤이다.

 

마립간 시기는 신라가 한창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갖춰나가던 시기였다. 이 시기 왕경인 경주를 중심으로 한 왕족들은 새로 병합한 지역의 족장들을 회유하고 간접 통치 방식으로 다스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관은 이러한 통치 방식에 중요한 매개물로 쓰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며 상대의 권위를 인정하는 증표인 이른바 ‘위세품(威勢品)’으로 금관을 하사했던 것이다. 이럴 경우 금관은 반드시 왕만 쓰는 것도 아니고 또 굳이 착용할 필요도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관

족장은 이렇게 하사받은 금관을 상징적으로 ‘보관’하였고, 그 족장이 죽어서 묘에 묻힐 때 금관은 부장품으로 함께 매장되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본 것처럼 임금이 아닌 여성이나 어린 아이의 묘에서도 금관이 출토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고분 발굴 당시 금관이 관 속에 있던 위치를 보면, 금관은 이마가 아니라 가슴걸이가 있는 어깨선까지 내려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금관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마에 쓰는 것이 아니라 푹 눌러써서 얼굴을 모두 감출 정도로 썼다는 뜻으로, 이 역시 금관이 실제로 머리에 쓰고 다녔던 실용품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는 것을 보여준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금관

신라는 진흥왕 대에 이르러 신라 금관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6세기 중후반, 신라 진흥왕은 지배자의 왕호를 ‘마립간’에서 ‘왕(王)’으로 바꾸고, 각 군현에 지방관을 직접 파견하면서 본격적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완성하였다. 이렇게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바탕으로 전 지역을 왕의 직접 통치권 아래에 두게 되자 더 이상 위세품을 하사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신라 금관을 통해 4~6세기 신라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통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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