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덮는다. 나는 가슴 속에서 울려 퍼지는 뜨거운 두근거림을 멈출 방법을 찾지 못 한다. 이미 하늘엔 어두운 장막이 드리워졌다. 마치 새로운 연극을 준비하듯, 혹은 그 화려했던 막을 내리는 듯. 나는 이 긴장감과 기대감, 그리고 아쉬움이 가득한 무대의 앞에서 우두커니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한다. 고개를 들고 밤하늘을 바라본다. 무대의 중앙, 연극의 주인공을 환하게 비추어줄 하나의 스포트라이트. 그렇다. ‘각자의 삶’이란 연극의 주인공인 우리들을 비추어 주는 달은 한 개다. 나는 이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다.

드디어 현실감이 나의 가슴을 차오른다. 나는 다시 한 번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는 돌아왔다. 달이 두 개인 세계로부터 나의 세계로.
벅차오르는 감동은 나에게서 타인의 가슴으로의 전이를 위하여 끊임없는 열정을 표출한다.
‘야, 1Q84 읽어봤어? 한 번 읽어봐 진짜 대박이야!’
그 뒤를 잇는 친구의 한마디.
‘그거 엄청 오래 전에 유행하던 책 아니야? 난 당연히 읽었지. 그걸 지금에서야 읽냐?’
‘아, 그래? 그럼 말구, 괜히 웬 핀잔이냐?’
‘그냥 하는 말이지. 근데 책 내용이 뭐였지? 하도 오래 되서 생각도 안 난다 야.’
‘어, 그건 말이지, 결국엔 사랑이야기인데.....’

나는 곧 말문이 막힌다. 책의 곳곳에 숨어있는, 마치 누군가가 몰래 나의 삶을 감시한 후 소설 속에 투영시킨 듯한, 현실적 요소들은 나의 전폭적인 공감을 이끌어내었으며, 책을 내 양손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의 내용과 의미를 친구에게 쉽사리 설명해 낼 수 없었다. 나는 순간 나의 모습에 소설 속 주인공들의 모습이 ‘오버랩’됨을 느꼈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공기번데기’를 읽는다. 두 개의 달과 리틀피플. 마더와 도터. 그들은 그들의 세계 속에서 공기번데기라는 소설이 미치는 영향을 느끼지만, 막연한 추측만이 존재할 뿐. 그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들은 소설과 현실의 세상을 넘나드는 과정 속에서, 결국 새로운 삶을 향하여 나아가는 쾌재를 부른다.

그렇다. 소설 속 주인공들과 나는 동일한 상황에 놓여있다. 나는 당황스런 마음을 쓸어내린다. 나는 이 소설의 작가가 아니며, 따라서 이 글의 세세한 의미 하나하나를 해명할 의무는 없는 것이다. ‘1Q84’가 나에게 주는 의미. 여행 후 차곡차곡 쌓이는 사진들과 기념품들과 같은, 1Q84의 세상을 여행하고 현실로 돌아온 나의 손에 들려있을 그 무언가의 흔적. 그것이 바로 나의 여행의 의미가 되는 것 아닐까?

나는 이러한 일련의 생각에 힘을 얻어, 다시 한 번 그 세계에 방문하여 마음 속 앨범을 채우기 위한 셔터를 누른다.

1984년. 조지 오웰이 암시한 디스토피아의 세상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세상. 하지만 ‘평범한’이란 말을 쓰기가 무섭게 도래하는 기묘한 세상. 1Q84년. 그곳에는 두 개의 달이 떠 있으며 리틀피플이 공기번데기를 만든다. 현실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1Q84년의 공간. 하지만 비현실성은 일상 속에서 너무나 현실적으로 묻어나며, 우리는 두 개의 달이 어두운 밤하늘을 밝게 비추는 시간에야 그 비현실적 세계의 존재를 실감해낼 수 있다. 어두운 밤하늘의 밝은 두개의 달,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인지되는 비범한 세상. 그리고 나는 이 연속선의 끝에서 ‘꿈속의 공간’을 떠올린다.

서로 반대의 삶을 살아온 두 사람. 수학 영재로 신문에 얼굴이 실리기도 했으며, 유도계의 에이스로 뭇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으며 살아온 덴고. 가정의 종교적 이유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으며, 같은 이유로 인해 자신의 존재감을 감추는 방법으로 살아온 아오마메. 극과 극의 삶을 살아온 두 사람. N극과 S극의 끌림 때문일까? 두 사람은 같은 꿈을 꿀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상반되는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이지만 그들에게는 ‘아픔’이라는 접점이 존재한다. 프로이트는 ‘꿈이란 무의식의 의식화’라고 말하였다. 무의식의 바다 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두 사람의 ‘아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그들에게 ‘꿈의 세계’로의 입장권을 부여하였다. 덴고와 아오마메의 만남. 이것은 우연일까? 우연을 가장한 필연. 그들은 서로 만나, 사랑이라는 종착역에서 함께 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각각 NHK 수금원인 아버지, 광신적 종교 신자인 어머니에 의하여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삶,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던 덴고와 아오마메. 그들은 이러한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결국 ‘수학강사’, ‘피지컬 인스트럭터’라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 또한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는 아픔의 반작용에 불과할 뿐. 그들에게 IQ84년이란 꿈속의 세상은 우연히 찾아온 공간이 아니다.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살아간, 머물러온 지난날을 투영하는 과도기적 장소. 이 독특한 의미를 갖는 공간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 꼭꼭 숨겨두었던 아픔을 의식화하고, 그것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특별한 모험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은 이 특별한 여행길에서 수많은 역경과 마주한다. 세상을 향한 외로운 고군분투. 그들 앞에 드리워진 고난이란 그림자 속에서 두 사람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같은 상처에 신음하는 덴고와 아오마메에게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이끌어주는 매개가 된다. 귓속에 어렴풋이 울려 퍼지는 사랑의 종소리는 어두운 그림자를 벗어나 밝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나침반으로의 역할을 수행한다.

두꺼운 책 4권에 걸친 두 남녀의 여행. 기나긴 여정의 끝에서 그들은 1Q84년에서의 출구를 찾아낸다. 하지만 그들이 돌아간 세계는 그저 익숙한, 그들이 여태까지 살아온 1984년인 것만은 아니다. 눈에 익지만 조금은 어색한, 이질적인 1984년. 이 속에서 그들은 더 이상 타의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서,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갈 것이다. 새로운 1984년. 그것은 그들만의 공간이며 그들 스스로가 창출해낸 길에 다름 아닌 것이다.

나는 다소는 기진맥진하여, 조금은 고양된 마음을 안고, 다시금 달이 하나인 세계로 돌아왔다. 하지만 나에게 더 이상 아쉬움은 없다. 나는 불끈 쥔 주먹을 천천히 펴본다. 그리고 여행의 깊은 흔적을 느낀다. 우리의 길. 그것은 그곳에 그저 수동적으로 놓여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걸어가야 하는 길. 그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통하여 찾아내야만 하는 능동적 과정이다.

'1Q84'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소설을 접한 이후, 나는 소설이 만들어 내는 세상 속 ‘덴고, 아오마메’와 함께 호흡하며 기나긴 여행을 해왔다. 소설이 창조해 내는 허구의 세계. 이곳은 분명 현실과는 괴리되는 세계, 두 개의 달이 뜨는 세계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현실보다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치밀한 세상.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가슴 속에 만들어진 작은 세계를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우리는 소설을 읽는다.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 조그마한 세상을 바라보고, 또한 그 작은 세상의 문을 열고 들어가 우리의 삶을 바라본다. 마치 ‘구운몽’의 선몽과 같은 원리. 비록 육관대사와 같은 훌륭한 스승은 없을지라도, 우리에겐 언제나 우리 삶의 동반자가 되어주는 소설이 있다.

글 센치한 솔방울 yond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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