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힙합퍼, 주석을 만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온 몸을 날려 끊임없이 정상을 향해 달려
눈 앞에 펼쳐지는 짙푸른 평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나의 영혼
-주석, 정상을 향한 독주 中- 


힙합 1세대, 원조 힙합퍼, 한국 힙합계의 선구자, 마디를 채우기 위한 랩이 아닌 진짜 랩을 하는 가수. 주석(본명 박주석)을 수식하는 말은 수도 없이 많다. 표현은 서로 다르지만 ‘진정한 힙합퍼’를 의미한다는 사실에는 대동소이하다. 흔히 ‘힙합퍼’라고 하면 거칠고 삐딱한, 약간의 허세가 깃든 마초맨이라는 느낌이 먼저 다가올지 모른다. 그러나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진정한 힙합퍼’는 말이 적었다. ‘멋지다’라는 수식어가 가장 어울리는 가수. 힙합이 낯설었던 시절, 대한민국에 진정한 힙합을 알린 가수, 주석. 그를 만나 인터뷰하며 느꼈던 흥분을 연세인과 나누고자 한다.

 

 


힙합키드? 전 그냥 열심히 공부 하는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10년이 넘도록 주류와 비주류를 아우르는 1세대 힙합퍼라는 평가를 듣는 주석. 그는 2000년대 초 막 생겨나기 시작한 한국 힙합 팬들에게 미국식 힙합을 선사했다. 이런 그였기에 어렸을 때부터 ‘힙합소울’이 충만했을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우리의 예상을 통쾌하게 빗나갔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소위 말하는 ‘강남 8학군’에 살았다. “그 때는 제가 공부를 잘하는 줄 몰랐는데, 송파구로 이사오면서 갑자기 반에서 1등을 해버렸어요.” 어떤 일이든 1등을 해본 사람은 안다. 한 번 1등을 하면 계속 그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엄청난 부담감을. 주석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과 선생님의 기대가 커지는 상황에서 그는 특별한 목표 없이 ‘성적이 나오니까’, ‘당연한 일이니까’ 공부를 했다.


할 말은 하는 ‘힙합’에 빠지다 

‘엄친아’ 소리 꽤나 들었던 그가 음악을 하겠다고 나선 것은 부모님에게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일이었다. 어떻게든 그를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부모님은 이과에서 문과로, 문과에서 다시 체육계열로 전향을 권유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이미 ‘음악’이 있었다. 결국 그는 부모님의 기대에 못 미치는 대학에 입학했고 얼마 다니지 않아 그마저도 그만뒀다.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위해서였다.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초반 3년은 아버지와 거의 의절하다시피 지냈어요.” 그는 힙합의 어떤 매력에 끌려 부모님의 강경한 반대에도 고집을 꺾지 않았던 것일까.

 

“딱 듣고 ‘그냥 좋다’가 아니라 아예 충격을 받아버렸어요.” 그가 힙합과 처음 대면한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친구를 통해 알게 된 흑인음악. 그것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90년대 초반의 한국 가요계에는 발라드나 댄스음악밖에 없었다. 랩이 있기는 했지만 댄스음악의 마디를 채우는 역할 밖에 하지 못했다. 하지만 친구가 들려준 랩에는 ‘영혼’이 있었다. “영어로 된 가사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가수가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 그 날로 힙합의 매력에 빠져버린 주석은 외국 음반을 수입해오는 국내에 단 하나뿐인 가게를 오가며 음악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뒤 그룹 ‘가리온’의 멤버 메타의 권유로 힙합모임에 들어가게 됐다. 이곳에서 그는 수많은 랩퍼, 프로듀서, 그리고 작곡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재미로 들어갔는데, 생각해보니까 우리나라 가요계에 힙합음악이 없다는 걸 깨달았죠. 지금 아무도 안하고 있는 장르니까 대중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곳에서의 만남을 계기로 그는 본격적으로 힙합음악에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 후 꾸준한 활동으로 대중에게 이름이 알려지자 그의 아버지도 마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당시엔 몰랐는데 아버지 친구 분들께 자랑도 하셨나봐요. 요즘은 활동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조언도 해주세요. 제가 출연하는 프로그램도 다 챙겨 보시고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시절이었지만 그에겐 당시가 가장 좋았던 때란다. 방송이나 기획사 같은 음악 외적 부분에 대한 고민 없이 ‘음악’에만 열중할 수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행복의 비법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어릴 때부터 그를 잘 따르던 사촌동생이 있었다. 사촌동생은 청소년기 모범생 주석을 따라 공부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박씨는 음악으로 발길을 돌렸고, 사촌 동생은 계속 공부를 해서 명문대에 진학해 대기업에 입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침마다 퀘퀘한 지하 작업실로 향하는 그의 인생보다, 번듯한 사원증을 목에 걸고 으리으리한 건물의 회사로 출근하는 사촌동생의 인생을 더 성공적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물론 그들이 저보다 편하게 살 수는 있겠지만, 정말 마음이 가는 일을 하는 것이 더 행복한 거라고 생각해요.”
솔직히 말해, 요즘 그는 예전만큼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지는 않다. 아이돌 가수가 넘쳐나는 가요계에서 힙합으로 꾸준히 인기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자신이 음악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행복하다고 말한다.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그의 인생관이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걸어 나갈 수 있게 하는 믿음직한 지표가 되고 있는 것은 같았다.


‘정상을 향한 독주’는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진정 ‘원하는 것’을 이룬 그의 계획은 무엇일까? “다음 달에 싱글 앨범을 발표할 예정이에요. 이번에 발표하는 앨범은 기존의 음악보다는 조금 가벼운 힙합으로 대중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을 거예요.” 과연 힙합으로 시작한, 힙합퍼의 인생답다. 덧붙여 그는 “기획사나 대중의 소리보다 내가 하고 싶은,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음악이 뭔지 고민해보고 그런 음악들로 엮어보려 한다”며 좋아하는 일을 향한 독주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얼핏 자유로운 영혼 그리스인 ‘조르바’를 떠오르게 한다. 그는 20대에게 청춘을 어영부영 보내지 말고 반드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현실적인 면모도 잃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을 하되,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버리지는 마세요.” 좋아하는 일을 하되 유연함과 융통성을 잃지 않는, ‘현실적인 외골수’ 주석. 성공을 바라보며 살기보다는 행복을 누리며 산다는 진정한 힙합퍼의 말을 다시 떠올려 본다. “음악을 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상황이 좋지 않을 때에도 음악을 원망하기 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 위로받고 행복할 수 있어요.”

귀에 꼽고 Play ma music on! 주위 시선은 상관없어
나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공간 안에서 (중략) 음악은 흐르는 내 삶의 오아시스
-주석, 오아시스 中- 

 

글 박진영, 시나경 수습기자 yond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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