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내게 말을 걸다 #7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어가면서 늘어가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모든 것이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깨달음이다. 어린 시절에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고 항상 나를 보호해 주는 누군가가 있어 두려움이라는 것을 몰랐지만 커 가면서 세상이 꼭 내가 원하는 대로만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모든 이들이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이러한 깨달음은 많은 이들을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존재에 대한 믿음, 즉 ‘종교’로 이끄는 하나의 원동력이 아닐까 한다. 그러한 점에서는 모두 공통적일 것인데 이러한 믿음이 사람마다 각각 다른 대상을 향해 있다는 사실은 꽤 흥미롭다.

우리 집은 종교적으로 꽤 다양해서 어릴 때 나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다다익선’이라는 생각에 항상 ‘천지신명’께 기도를 드리곤 했다. 많은 분들께 기도하면 그만큼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에서였다. 우리 집은 아버지 쪽 집안은 불교, 어머니 쪽 집안은 천주교, 하지만 막상 어머니께서는 무교인 다소 복잡한 종교적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었다. 어린 시절 특별히 종교에 대한 관념이 없었던 나는 가족끼리 등산을 가면 절에 가고, 교회에서 여름학교가 열리면 그 곳에도 가보고, 외할머니 댁에 가면 성당도 가끔씩 따라가곤 했다. 한 때는 나를 믿고 살겠다는 나름의 가치관을 세우기도 했지만 점차 내게도 정신적인 안식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되었다.
그러한 생각과 함께 점차 성장하면서 내가 가장 끌렸던 곳은 성당이었다. 활발하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왠지 조용하고 평화로운, 햇살과 함께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환히 빛깔을 드리우는 성당이 내 마음의 안식처로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중학교가 혜화에 있었던 나는 고등학교를 준비하면서 마음이 힘들어지면 친구와 함께 아무도 없는 혜화동 성당에 가서 조용한 가운데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그 이후에도 힘든 일이 있거나 마음이 어지러우면 나는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그런 내 마음의 움직임이 22살이라는 나이에 Stella라는 세례명과 함께 나를 천주교 신자로 이끌게 되었던 것 같다.

대학생이 되어 자발적으로 6개월의 교리 공부 기간을 거쳐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된 내게 몇몇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마음의 안정을 찾았냐고 묻곤 한다. 솔직한 대답으로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답한다. 하지만 이전의 나와 구분 지을 수 있는 몇 가지 장점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우선 삶의 많은 부분에 감사하면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점, 미사를 드리며 늘 내 자신을 되돌아보고 쇄신하게 된다는 점을 말하고, 무엇보다도 내 자신을 이전보다 좀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학생이 되어 내 스스로 ‘나’라는 존재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를 던지다 보면 존재의 이유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해 우울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이럴 때에 기도를 드리며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나는 꼭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태어난 사람,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기에 가치 있는 존재라는 생각에 다시금 눈을 반짝이곤 한다.
사실 때로 나는 내가 ‘나를 위한 종교’를 갖고 있다는 생각에 때로 마음의 갈등을 일으키곤 한다. 결국은 내가 잘 되기 위한 바람을 이루기 위해, 내가 의지할 곳을 찾기 위해 종교를 갖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부분이 신앙의 한 부분을 차지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으로서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고, 내게는 믿음이 있고, 또 종교를 통해 나와 다른 사람을 위해 좀 더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지나친 내적 갈등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좀 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고 손을 내밀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게는 여전히 부족한 면이 많지만 그래도 이러한 고민과 노력이 세상에 조그마한 행복을 더하는데 소소한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이렇듯 내가 가지고 있는 종교관의 일부를 이야기했지만 이것이 종교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지나치게 종교를 권하는 태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고 또 같은 맥락에서 종교는 자발적인 의사에서 가질 때에 비로소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반드시 종교가 아니더라도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일종의 믿음이나 신념은 간직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홀로 삶의 무게에 눌려 어쩔 줄을 모르거나 그러한 경우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의 소식은 그리도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믿음이 닿아 있는 성당은 때로 정말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나를 가만히 부른다. 그곳에 앉아 조용히 기도를 드리다 보면 나를 지켜주시는 분이 있고, 항상 나의 수호천사님이 날개로 나를 감싸주고 있음을 떠올리며 눈물을 거두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S. Stella  yondo@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