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이리저리 요동친다. 좀 진정시키려 아무리 달래고, 또 달래 보아도 이놈의 거친 몸부림은 가라앉질 않는다. 어라, 내 몸뚱이를 든든하게 지탱하고 있던 다리도 갑자기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방정맞게 다리를 떨면 복 떨어진다는 성현들의 말씀. 이것은 필시 가슴이란 놈의 병이 전이된 것이리라. 이 떨림은 점점 번져나가 이번엔 손으로 이어진다. 탁탁탁, 마치 모스부호로 누군가에게 간절한 신호를 날리듯 조급하지만 정확한 리듬으로. 그때, 내가 보낸 신호에 응답이라도 하는 듯 가방 속에서 부르르 수줍은 진동이 느껴진다. ‘왔다!’ 나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신속한 동작으로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쥔다. 그리고 ‘하나, 둘, 셋!’하는 무언의 신호음과 동시에 폰 잠금을 풀고 발신자를 확인한다. 

 ‘최대 100만원까지 보장. 무이자, 무담보 소액대출 서비스! XXX-XXXX, 지금 즉시 전화주세요.’
 
아, 이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처참하게 깨어진 백일몽. 내 주위를 가득 채우던 설렘과 기대는, 마치 동전의 앞뒤를 바꾸듯, 삽시간에 아쉬움의 뜨거운 한숨으로 증발되어 날아갔다. 

 ‘얘는 뭘 하길래 아직까지 답장을 안 하는 거야? 또 프리즌브레이크를 보고 있나? 에, 몰라. 밀린 레포트나 쓰고 있어야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였나. 그렇다면 나 역시 정신없이 내 할 일 하면서 여자 친구의 속 좀 태워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무념무상. 마음을 비우고 노트북 타자기에 손을 올린다. 하지만.
 
‘부르르’
 내 손은 어느새 핸드폰에, 내 눈은 어느새 너의 답장에, 내 마음은 어느새 너의 곁에. 꿋꿋한 대한의 건아, 참 실없기도 하다. 

하루에 수십번 아니, 수백번 씩 너와의 카카오톡 채팅방을 들락날락. 애타는 기다림에 지칠 만도 한데, 참 이상하다. 기다림까지 기다려지는 나의 이 마음이. ‘내 정신이 어디로 마실 나갔나? 이거 혹시 몹쓸 병에라도 걸린 것이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에 나는 흰 색 가운을 두르고 귀에는 청진기를 꽂는다. 비록 의사 자격증은 없을 지라도 한 번 진단을 해본다. 잘못 진단한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지 않은가. 으흠, 가슴이 심하게 쿵쾅거리고 얼굴이 화끈화끈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른다. 머리가 핑핑 세상이 빙빙 도는 듯 어지럽다. ‘이건 무슨 병일까?’ 그리고 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을 여기에서 찾는다. ‘머릿속은 다른 온전한 사고가 어려울 듯, 한 가지 생각, 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갑자기 거대한 댐의 한 구석에 조그마한 구멍이 난 듯, 기다림이란 현상에 의하여 억압되어 있던 다채로운 감각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설렘, 수줍음, 행복, 기쁨, 두려움, 불안, 초조함. 바닥에 무질서하게 흩뿌려진 감각들은 마치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려는 듯 스믈스믈 기어 다니며 질서정연하며 완결성 있는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낸다.

  ‘♡’

 사랑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들 개개인의 삶 속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아니 온 세상에 달콤하고 상큼한 노란빛 봄내음을 품어주는 사랑. 하지만 이것은 향긋함에 취한 감상적 사고에 기인한 것? 다시 생각해 보면, 사랑은 그리 특별하지만은 않은, 우리들 누구나가 겪게 되는 친숙한 사건의 하나일 수 있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았을 때 ‘사랑’이란 남자와 여자가 만남으로써 이루어지는 우연적 작용에 다름 아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사회라는 우리의 삶의 터전 속에서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만남을 통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 우리는 수많은 만남을 경험하며 그 과정 속에서 사랑이라 불리는 복권에 당첨되곤 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만남’을 단순히 유기체적 존재로서의 개인과 다른 개인의 순간적 마주침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모든 ‘결과’에는 그 결과를 도출해 내는 근본적인 사건인 ‘원인’과 그를 결과라는 종착점까지 이끌어주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랑이라는 결과의 원인이 되는 ‘만남.’ 그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비약의 틈을 메우기 위하여 우리는 ‘과정’이라는 경유지의 존재를 상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만남’이 초래하는 화학작용, 즉 인식과 행위라는 ‘과정’속에서 타인과의 ‘관계 맺음’을 이루게 되며 비로소 사랑을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사랑은 ‘관계 맺음’이다. ‘지금 나에게 있어서 너는 수많은 다른 아이들과 다르지 않은 그냥 어린 소년에 불과하단다. 그리고 지금 나에겐 네가 없어도 돼. 물론 너에게도 나는 수많은 여우 중 한 마리일 뿐이겠지만. 그렇지만 만일 네가 나를 길들이면,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게 되지. 내게는 네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이가 될 것이고, 나도 너에게 유일한 존재가 될 거야.’ 어린왕자와 여우의 대화에서처럼 내가 너의 이름을 부르고, 또한 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에만 우리는 서로에게 꽃이 될 수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수많은 만남의 사슬에 얽혀 살아간다. 그러나 이 사막과 같은 무미건조한, 피상적인 만남만이 거리의 매연처럼 답답하게 우리를 억죄는 공간 속, 오직 사랑이라는 소중한 관계만이 작은 행복 ‘오아시스’를 꿈꿀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쌩뚱맞게도 머릿속 작은 물음표를 그려보게 된다. 그럼 친구와 연인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두 가지 보편적인 관계에 모두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연인 보다는 그러나 친구는 아닌, 어색한 사이가 싫어서 떠나버린 그 사람’. ‘사랑과 우정사이’란 노래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우리는 삶 속에서 이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나는 ‘사랑’에 ‘전념’이라는 속성을 추가하고자 한다. ‘전념(Concentration)'이란 어떠한 힘을 분산시키지 않고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이다. ‘관심, 배려, 욕망, 그리고 질투’ 자신의 사랑에 대한 이성적, 감성적 요소를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 절대적으로 투영하는 것. 물론 사랑은 ‘자유’이다. 그리고 서로의 자유에 의하여 사랑이란 관계가 만들어진 것이기에 우리는 이 속에서 당신이 곁에 있어도 당신이 항상 그리운, 절실한 감정을 느낀다. 내가 사랑하는 그는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나를 떠나 버릴 수도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에는 언제나 책임이 동반되기 마련이란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아무리 자기가 자유롭게 택한 사랑일지라도 그것에 대한 책임은 올가미가 되어 나의 손에 수갑을 채운다. 사랑은 마약과 같다. 어떠한 상황에 의하여, 혹은 어떠한 유혹에 의하여 시작하기는 쉬울 수 있지만 일단 깊숙이 들어가고 나면 마음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구속이 된다.

진단 소견서가 나왔다. 병명은 초기 사랑증세. 너무 급하게 많은 사랑을 하고자 하여, 나의 수용기관에 무리가 찾아왔단다. 돌팔이 의사의 자가진단 소견서의 처방전. 그것은 아직 온연히 피어나지 않은 사랑의 새파란 새싹에 꾸준히 물을 주는 것. 매일 한 번 씩, 아니 그보다 더 많이 너에게 ‘사랑해’ 한 마디 전하며 우리의 사랑에 양분을 공급해 주는 것. 약간 미심적은 부분이 없지 않으나 나름대로는 그럴 듯 하다. 

이런저런 생각 와중에 다시 한 번 ‘부르르’

내 손은 어느새 핸드폰에, 내 눈은 어느새 너의 답장에, 내 마음은 어느새 너의 곁에. 바보같이 입을 헤벌쭉, 기다림의 복잡미묘한 기억들은 어느새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 이름 모를 콧노래를 부르며 한 자, 또 한 자 너에게 답신을 보낸다. 꿋꿋한 대한의 건아, 참 행복도 하다.

갓 100일, 돌을 맞이한 ‘애기 커플’ 아직 풋풋한 향을 가진 우리의 사랑이 언젠간 향긋한, 좀 더 성숙한 내음새를 풍길 것을 기대한다. 사랑. 그 매혹적인 향내에 흠뻑 취해버릴 준비가 나는 되어있다. 

글 센치한 솔방울 yond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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