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향기 #6

일전에 블로그에 올린 글인 ‘모란꽃의 진실(http://kumroa.com/16)’은, 신라 선덕여왕과 모란꽃에 얽힌 기록을 독화법(讀畵法), 즉 그림을 읽는 법과 관련하여 분석해본 글이었다. 결국 선덕여왕의 모란 이야기는 독화법과 큰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는 결말로 끝나긴 하지만, 한국화를 비롯한 동양화를 감상할 때 그림을 어떻게 ‘읽느냐’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동양의 화가와 서양의 화가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다. 서양의 그림은 기본적으로 ‘대상의 재현’에 초점을 맞춘 그림이다. 따라서 서양화는 명암, 색채, 형태 등을 보이는 그대로 화면에 옮기는 데 주력한다. 하지만 동양화는 화가가 생각한 것을 화폭에 옮기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 동양화는 ‘생각을 표현한 그림’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동양화를 감상할 때에는 작가의 생각이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되었는지를 읽어내야 한다. 그래서 동양화는 ‘읽는다’, 즉 독화(讀畵)’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어떤 언어로 된 문장의 뜻을 이해하려면 기본적으로 단어의 뜻을 알고 있어야 하듯이, 동양화를 감상할 때에도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소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동양화의 소재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현재 심사정의 일로연과도. 과거시험에서 한 번에 소과와 대과 둘 다 합격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그림이다.

 


 
첫째는 동음이자(同音異字), 즉 음이 같은 한자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옛날부터 한자문화권에서는 어떤 문자를 음이 같거나 비슷한 글자로 대체하여 풀이하는 일이 많았다. 이것을 ‘성훈(聲訓)’이라고 한다. 동양화의 소재에서도 이렇게 음이 유사한 한자를 사용하여 소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잦았다. 예를 들어, 동양화 중에는 물고기의 일종인 쏘가리를 그린 그림이 있다. 옛 사람들이 쏘가리를 그림으로 그린 이유는, 쏘가리가 특별히 예뻐서가 아니라, 쏘가리 궐(鱖)자가 궁궐 궐(闕)과 같은 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결국 쏘가리가 뜻하는 바는 입궐(入闕), 즉 과거에 합격하여 궁궐에 드나들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이 된다. 다른 예시로는 잘 여문 연밥과 백로 한 마리가 함께 그려진 그림이 있다. 백로는 원래 여름 철새이기 때문에, 연밥이 여무는 가을에는 백로는 따뜻한 남쪽나라로 날아가버리고 없다. 따라서 연밥과 백로가 함께 있는 구성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백로 한 마리는 한문으로 일로(一鷺)라고 쓸 수 있고, 연밥은 한문으로 연과(蓮果)라고 쓴다. 이를 붙여 쓰면 일로연과(一鷺蓮果)가 되는데, 이것은 일로연과(一路連科), 즉 한 번에 소과와 대과, 두 가지 과거시험에 연달아 붙으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래서 동양화에서는 과학적으로 불합리한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또 참새(雀)는 벼슬(爵), 게는 등딱지(甲)가 있으므로 시험의 최고점수인 갑(甲)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계호의 포도도. 덩굴과 함께 그려진 포도는 알이 많아서 자손이 번창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소재 자체의 상징적인 의미를 활용하는 법이다. 예를 들어, 씨앗이 많이 박혀 있는 수박이나 참외, 여러 개의 열매가 다닥다닥 열리는 포도송이나 석류는 자손이 많이 생기라는 것을 뜻한다. 또한 모란은 꽃송이가 크고 탐스러워서 옛날부터 부귀의 상징으로 쓰였다. 이런 상징체계는 앞서 소개한 동음이자와 함께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서양의 정물화와 달리, 동양화에서 포도는 포도송이만 덩그러니 그려지기보다는 죽죽 뻗은 덩굴과 함께 그려진 경우가 많은 것도 이와 관련하여 설명할 수 있다. 포도는 앞서 설명하였듯이 자손(子孫)을 뜻하며, 덩굴은 한문으로 만대(蔓帶)라고 쓰는데, 이것은 만대(萬代)와 음이 같다. 따라서 덩굴과 함께 그려진 포도송이들은 자손만대(子孫萬代)를 의미하는 그림이 된다.

 

▲ 이경윤의 고사탁족도. 선비가 냇가에서 발을 씻는 그림은 굴원의 <어부사>에 전거를 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전거(典據)를 활용하는 법이 있다. 즉 옛 고전에 나오는 글귀를 염두에 두고 그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냇물에 발을 씻는 그림은 굴원(屈原)이 쓴 어부사(漁父辭)의 구절을 전거로 두고 있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창랑의 물이 맑거든 내 갓끈을 씻을 것이며,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내 발을 씻으리라.)” 결국 탁족도는 세상이 맑든 흐리든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춰 처신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다른 예로는 삼여도(三餘圖)가 있다. 이것은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말이다. 동우(董遇)라는 학자가 제자들이 질문을 할 때마다 “우선 책을 백 번을 읽어라. 그럼 자연히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讀書百遍義自見).”고 대답했다. 이에 제자들이, 공부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어느 틈에 백 번을 읽느냐고 항의하자 “세 가지 여가(三餘)가 있지 않느냐. 일 년의 여가는 농사짓지 않는 겨울이며, 계절의 여가는 비 오는 때이며, 하루의 여가는 밤이니 그때 읽으면 된다.”라고 답했다는 고사가 있다. 여기서 따 와서, 남을 여(餘)와 중국어로 발음이 비슷한 물고기 어(魚)를 사용하여 세 마리 물고기를 그린 그림이 있다. 이 것을 바로 삼여도(三餘圖)라고 한다. 이런 삼어도는 주제에 맞게 주로 서재에 걸어 놓는 일이 많았다.

이렇게 옛 사람들은 표현하고자 하는 자신의 생각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그림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구도나 색감, 묘사 등 서양화 감상법으로만 동양화를 감상하는 경향이 있다. 옛 그림을 이해하려면 옛 사람들의 안목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음 번, 옛 그림을 감상할 일이 있다면 그림의 소재와 의미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자. 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가 다가올 것이다.

 

 

지우군 yond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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