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부 배형준 기자의 부기자 일기

나는 외톨이였다. 누군가와 소통하는 것 자체가 두렵고 금방 싫증나며, 그들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이 역겨웠다. 누구에게 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꺼려졌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향수』의 주인공처럼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은 채 세상의 구석에서 웅크려 살아왔던 것이다. 어릴 적부터 경쟁사회에 내몰았던 주변환경 탓일까? 가끔은 그렇게도 생각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천성 때문인 것 같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지만, 나는 천성이 본래 내성적이어서 (소심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사회를 이해하고 주변의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 왔다. 가끔은 인간이 갖추고 있는 모든 외형적 조건들, 이를테면 눈, 코, 입조차 어색해 보였고 때로는 자신의 존재에도 의문을 가졌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를 인간으로 만든 ‘익숙함’ 그리고 자아상실


인간은 어떤 극한 상황에 처해도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으면 살아남는다. 비단 생존의 문제에 국한된 것만이 아니다. 인간은 지극히 ‘적응의 동물’이더라. 낯선 환경, 사람에 익숙해지고 그것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다.
같은 맥락으로, 이전까지 나란 인간은 자신과의 대화에만 익숙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한 가지 과업을 위해 온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고, 그 열기에 익숙해졌을 무렵 마침내 ‘인간’이 됐음을 느꼈다. 내 눈으로 바라보는 사회란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다른 이들과 나를 ‘인간’이라는 개념아래 동등하게 놓아둔 기제였다.
그러나 이렇게 좋아만 보이는 ‘익숙함’이란 것도 양날의 칼이더라. 조직사회에서 맡은 과업에 취해 살다보니 어느새 스스로가 낯설어지는 순간도 생겼다. 그럴 때면 스스로도 내가 지금 이 공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망각하는 경우가 자주 생겼다. 이런 상황을 슬럼프라고 하면 적합할까? 


 

 

새로운 나를 만나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예전의 나를 잃었다. 다만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연세춘추 부기자’로서의 자신이다. 지금의 내 자아는 과거와는 사뭇 다르다. 누군가 내게 베푸는 배려를 받는 느낌, 또 그들에게 되돌려주는 호의, 그리고 열망의 성취를 위한 노력에서 뿜어져 나오는 환희, 결과의 산물에서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 모든 감정들은 감정을 가진 나를 ‘살맛나게’ 하는 경험이다.
나는 우리대학교, 그리고 ‘연세춘추’란 조직에 애정을 담았다. 그리고 지면에 실리는 모든 지적 잔여물들은 길고도 짧은 21년의 생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색다른 뿌듯함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고 있다.


 

좋은 사진이란


나를 춘추에 머물게 한 존재, 그리고 그곳에서 천만가지의 감정들을 맛볼 수 있게 한 장본인은 바로 사진이다. 물론 나는 프로 사진가는 아니다. 사진에 관해 공부한 적도 없고, 사진 촬영을 직업으로 삼고 있지도 않다. 앞으로도 그럴 계획은 없다. 다만 사진이야말로 그 어떤 물질적인 것들보다 사랑의 감정 같은 가치를 담을 수 있기에 사진을 좋아한다.
내가 겪은 경험, 공간, 시간들을 담아주는 매개체. 그것이 사진의 미학이다. 그때문에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이기적이어야 한다. 감정을 최고조화 시킬 수 있는 아름다움, 혹은 불안한 그 무엇을 렌즈에 담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사진을 찍는 사람의 의무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중요치 않다. 본인의 마음에 드는 순간을 포착해내는 것이야말로 좋은 사진이 갖춰야할 요건이다.
사진은 취미다. 나를 둘러싼 사회와 또 다른 나와의 싸움에 지친 자아를 쉬게 해줄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 2011년에 국한해서 사진은 내 ‘일’이기도 하다. 사진기자란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동안만큼은 직업정신을 갖고 값진 시간을 보내고 싶다.

 

배형준 기자  elessar@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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