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내게 말을 걸다 #3


커다란 개가 지나가자 아이들이 ‘파트라슈다!’ 하고 외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누구나 한 번 쯤 동화책이나 만화영화로 접해 봤을 법한 ‘플란더스의 개’에 나오는 네로와 파트라슈가 예나 지금이나 꽤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네로와 파트라슈가 보여주는 우정이 시대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 때문인 듯하다. 현대에는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이 보편화되어 인간과 동물이 한 가족과도 같은 경우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생명이 생명을 소유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문화를 반드시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러한 관계에서 형성되는 애정과 교감이 인간에게 큰 선물이 된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나의 애완동물 이력은 조금 특이하다. 여기에는 동물에 관심이 많으셨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는데 가장 웃겼던 한 때는 병아리, 메추리, 거위를 옥상 위에 풀어 놓고 길렀을 때였다. 병아리야 초등학생들도 길 가다가 한 마리씩 손에 쥐는 경우가 많으니 그렇다 쳐도 메추리와 거위까지 종종거리며 걸어 다니고 있으니 굉장히 어수선했다. 나와 동생은 이제나 저제나 병아리가 커다란 닭이 되어서 아침을 알리는 때만 기다렸고 메추리가 빨리 장조림 해 먹을 알을 낳아주길 학수고대했다. 하루는 비 오는 날 병아리 두 마리가 실종이 됐는데 이 아이들도 자유를 찾아 떠나고 싶었던 모양인지 옥상에서 연결된 관을 타고 땅을 밟는데 성공했는데 안타깝게도 발각되고 말았다. 한 동안 서로 다른 새들의 옹알이로 꽤 시끄러웠는데 아버지께서도 더 이상은 감당이 안 되셨던 모양인지 어느 날 공원인지 유원지인지에 기증했다고 하셨다.
더 특이한 이력은 바로 새끼 ‘매’를 길렀던 경험이다. 역시 호기로우신 아버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날 보통 새장과는 차원이 다른 커다란 새장에 꽤 큰 새가 우리를 쏘아보고 앉아 있었는데 그만한 게 새끼라니 매우 놀라웠다. 고기만 먹었던 팔자 좋은 매에게 어느 날은 동생과 내가 먹이를 주게 되었다. 덜덜 떨면서 한 명은 새장을 열고 한 명은 고기를 넣으려고 하는 찰나 잽싼 매가 틈을 비집고 날아 부엌 창가에 떡하니 앉았다. 동생과 나는 쪼일까봐 너무 무서워서 당장 안방으로 달려가 문을 잠그고 아버지께 전화를 했고, 어떻게 한달음에 오신 아버지께서 수건을 가지고 다가가 매의 눈을 가리며 잡으셨던 순간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후 아이러니하게 주인이 애완동물 눈치를 보는 나날이 지속되다가 어느 날 보니 그 아이는 기특하게도 자유를 찾아 떠난 뒤였다.
이렇듯 재밌는 경험도 있지만 애완동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실 하늘로 떠나버린 나의 토끼와 강아지였다. 새들보다도 먼저 키웠던 것이 토끼들이었던 것 같은데 회색과 흰 색의 한 쌍의 토끼들이 나는 너무도 좋았다. 하지만 원래 건강이 좋지 않았는지 회색 토끼는 채소들을 입에도 안 대다가 곧 세상을 떠났고 흰 색 토끼도 뒤를 이었다. 이후 하얀 말티즈도 키웠는데 원래 건강이 좋지 않았던 데다가 낮에는 식구들이 모두 나가 많은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그 아이도 하늘나라로 가 버리고 말았다. 옥상에 올라갔는데 꼬물꼬물 나를 따랐던 강아지가 그냥 흰 색 털뭉치처럼 몸을 쭉 뻗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던 기억은 사진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 이후 난 어딜 가도 동물을 만지지 않게 되었다.

애완동물을 보살피던 어린 나를 돌아보며 깨닫게 된 단순한 생각 하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점이다. 뛰놀고 싶어 하던 강아지를 예쁘게 품속에 안아가려고 꼭꼭 싸매고 놓아 주지 않았던 나의 행동이, 외롭게 하루 종일을 보내야 하는 동물들을 소유는 하려고 했던 우리의 행동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남녀 관계이든 부모와 자식 관계이든 이 간단한 것을 인식하지 못해 마찰이 일어나는 경우를 꽤 보았다. 한 쪽이 상대방은 원치 않는 자신만의 판단으로 사랑을 하면 상대방은 그것을 수용할 수 없고, 또 그런 상대방을 탓하다 보면 아름다워야 할 사랑이 싸움으로 변하게 되기 때문이다. 박완서의 ‘옥상위의 민들레꽃’을 보면 물질적으로는 풍족한 환경에서 지내는 노인들이 외로움에 옥상에서 몸을 던지자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젓는 젊은 부부들의 모습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물을 원하는 꽃에게 영양소가 풍부하다며 백날 우유를 뿌려봐야 말라 버린 꽃잎만 바스러질 뿐이다.
나의 기억들을 더듬어 볼 때 가장 그리운 것은 나와 애완동물 사이에 형성되었던 ‘진실한’ 믿음이다.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 때 정말 내가 반가워서 저럴까 의심한 적은 없지만 나를 향한 사람들의 웃음은 그 진실성을 확신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와 함께 살아가고 때에 따라 빈말도 할 줄 아는 것이 사회성을 갖추고 살아가는 것일지 모르지만 절대로 약속을 잡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밥 한 번 먹자’는 말을 듣는 것이 때로는 슬프다. 얼마 전 아는 오빠가 자신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한 선배 앞에서 그 사람이 가진 힘과 인맥 때문에 억지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고충을 토로했는데 속이 썩어 문드러진 개살구를 보는 양 그 관계가 안타까웠다. 아이들의 말을 의심하지 않듯이 오히려 인간과 동물이기에 가능한 그 진실함이 품에 안은 애완동물의 체온보다도 나를 더 따뜻하게 감싸 주었던 것 같다.

네로와 함께 루벤스의 그림 앞에서 하늘나라로 떠난 파트라슈의 사랑은 동물이었음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다. 우리는 때로 위급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희생하여 사람을 살린 동물들의 이야기나 사정상 멀리 보내 버린 개가 험난한 여정을 넘어 다시 집으로 찾아와 주인의 품의 안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곤 한다. 어떻게 보면 참 바보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와 동시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자신을 우선할 수밖에 없는, 또 그것이 전혀 비난받을 일이 아닌 사람들 간의 관계를 보면 동물이기에 가능한 한결같은 애정과 교감이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어린 날 내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 소중한 생명들을 생각하며 나도 먼 훗날 동물 친구들에게 내 아이들의 교육자가 되어 주십사 초대장을 건넬지도 모르겠다.

S. Stella  yond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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