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그 파란만장한 역사 속으로

 

 

바야흐로 10월이다.
가을바람이 마음속에 스산한 바람을 불어넣어 괜스레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10월. 이런 몽롱한 기분으로 어딘가로 홀연히 떠나버리고 싶지 않은가? 공강 때 마땅히 할 일은 없고…. 홀연히 떠나버리자니 쌓여만 가는 과제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그대들에게 가까운 듯 먼 세계, 서대문구의 이야기를 준비해봤다. ‘달콤한 나의 서대문’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코스:서대문형무소-서대문구청-서대문소방서-북문-청송대-스팀슨관-언더우드동상-정문

 

 

아무도 찾지 않는 이른 아침 서대문형무소 앞은 유난히 가을 공기가 쌀쌀하다. 끝도 없이 이어진 붉은색 벽돌담장을 손끝으로 스치며, 이 담장 앞으로 끌려왔을 수많은 우리 조상들, 그들이 겪었을 피비린내 나는 고문들, 그리고 아직까지 울부짖고 있을 그들의 혼을 손끝으로 느껴본다.


잠들지 못한 영혼들,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는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됐던 역사의 상흔이다. 당시 ‘경성감옥’이라 불렸던 이곳은 해방 이후엔 주로 정치범들이 투옥됐다가 지난 1998년에야 비로소 형무소가 아닌 역사관으로 탈바꿈했다. 박경리의 소설『토지』에서 주인공 서희가 길상을 면회하는 장면이 이곳 풍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붉은 벽돌의 높은 담, 서대문형무소의 우중충한 풍경은 서희 마음을 짓누른다.
이곳 풍경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늘 잿빛이었다.
- 박경리 『토지』

 

 

형무소 자체를 역사관으로 만든 독특한 구조 덕택에 1평 남짓한 감옥 안에도 직접 들어가 볼 수 있었다. 가운데에 서서 손을 뻗고 한 바퀴를 돌면 4개의 벽에 손이 닿을 정도로 좁은 이곳에 수감자들이 서너명씩 투옥됐다고 한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그 열악함이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많은 죄수가 앉아 있을 때엔 마치 콩나물 대가리 나오듯이 되었다가, 잘 때에는 한 사람은 머리를 동쪽 한 사람은 서쪽으로 해서 모로 눕는다. 그러고도 더 누울 자리가 없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일어서고, 좌우에 한 사람씩 힘이 센 사람이 판자벽에 등을 붙이고 두 발로 먼저 누운 자의 가슴을 힘껏 민다.
그러면 누운 자들은 “아이구, 가슴뼈 부러진다”라고 야단이다.
- 김구 『백범일지』

 

 

유관순 열사가 투옥됐던 여자감옥의 환경은 더 열악했다. 임신한 여성들은 그곳에서 출산했고, 엄마와 아기는 얼마 못가 함께 세상을 뜨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고문 기구만 해도 수십 가지에 이른다. 여운형은 『옥중회고록』에서 형무소 투옥 중에 당신이 겪은 고충을 이렇게 묘사했다.

맨 처음 상해에서 잡힐 적에 운동장에서 경관과 격투하다가 귀를 몹시 얻어맞았는데
그때 고막이 상하여 한쪽 귀는 아주 병신이 되고 말았다. (이하 생략)
- 여운형 『옥중회고록』

 

전공서적 한권 넣으면 폭이 꽉 찰만한 길쭉한 나무상자가 보인다. 이것은 사람을 안에 넣고 문을 닫아 압박시키는 고문기구란다.

 

 

수십 개의 가시가 박힌 상자도 보인다. 이른바 상자고문으로, 웅크린 사람이 간신히 들어 갈만한 이 상자에 대못을 박아 놓고 수감자를 넣어 굴려서 못에 찔리는 고통을 줬다고 한다.

 

  

위에 보이는 저 나무는 바로 ‘통곡의 미루나무’다. 나무 두 그루를 하나는 사형장 안에, 하나는 밖에 심었는데 그 크기가 많이 다르다. 그 이유는 수감자들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며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 슬픔에 나무를 붙잡고 눈물을 흘려 그 원통한 혼이 스며들어서란다.

“역사관이 현 세대에게 아픈 역사를 조금만이라도 되짚어 볼 수 있게 만든다면 기쁠 것 같네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김태동 대리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관에서 우연히 만난 중학교 국사 교사 A씨는 “20대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요. 다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말아야 합니다. 불과 100년도 채 되기 전의 일인걸요”라며 울분을 토했다. 김 대리와 A씨의 말대로 우리 20대는 이 아픈 역사의 상처를 평생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시는 반복돼선 안 될 상흔이니까…

 

 

절대로 잊혀져선 안될 민족의 상흔, 서대문 형무소. 잠들지 못한 그들이 이젠 편히 쉴 수 있길 바라며...

 

서대문형무소의 차가운 역사에서 벗어나 이제 조금은 따스한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 발길을 돌려 서대문구청으로 향한다. 아침 11시를 넘긴 이 시각, 마을버스 3번 차창 밖으로 스며드는 서대문구의 가을바람이 자못 시원하다. 녹음이 우거진 이 길에서 이양하의 「신록예찬」이 탄생했다고 한다.

오늘도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우리 연전 일대를 덮은 신록은 어제보다도 한층 더 깨끗하고 신선하고 생기 있는 듯하다. 나는 오늘도 나의 문법 시간이 끝나자, 큰 무거운 짐이나 벗어 놓은 듯이 옷을 훨훨 떨며, 본관 서쪽 숲 사이에 있는 나의 자리를 찾아 올라간다.
- 이양하 『신록예찬』


서대문구의 복지와 안전을 책임지다, 서대문구청과 서대문소방서

 

 

서대문구는 고등학교 시절 한국지리 시간에 배운 ‘배산임수’ 지형으로, 앞으로는 홍제천이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뒤로는 안산이 자리 잡고 있어 안정적이고 쾌적하다. 서대문구청 홍보기획팀 조봉기 팀장에 의하면 현재 서대문구청에선 지역주민들의 쾌적한 생활을 위해 ‘백가정 보듬기 프로젝트’를 마련했다고 한다. “법적으로는 자격요건이 되지 않지만 불우한 이웃들을 돕기 위해서 마련한 독특한 정책입니다.” 현재 70가정까지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산학 클러스터’라는 일자리 창출 프로젝트와 ‘대학생 임시주택’ 등으로 우리대학교를 비롯해 이화여대, 서강대, 명지대, 홍익대 등 서대문구 지역의 대학생들과도 연계를 도모하고 있단다.

 

 

서대문구 지역주민의 복지를 위해 힘쓰는 것은 비단 구청뿐만이 아니다. 우리대학교 북문과 맞닿아 있는 이곳은 바로 서대문소방서로 2년째 ‘서울 시내 22개 소방서 순위’에서 1위를 했다고 하니 지역주민을 위한 이들의 노력을 알 만하다. “화재가 나면 신고자의 급박한 목소리를 스피커로 틀어줍니다. 때문에 현장 출동 대원들도 사태를 짐작하고 갈 수 있죠.” 서대문소방서 홍보교육팀 김국 팀장은 하루에도 15건 가량 들어오는 신고 접수 때문에 24시간 맘 편히 지낼 날이 없지만 시민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서대문소방서를 지나자 우리에게 너무나 친근한 이 길이 나온다. 바로 무악학사 쪽문으로 향하는 길이다. 『여고괴담』의 ‘여우계단’을 닮은 생김새로 각종 악담이 떠도는 이 계단을 지나 학교 안에 들어선다. 본격적으로 옛 문인들을 추억하며 교정을 밟아보겠다.


백양나무의 역사를 짚으며…

 

 

북문에 위치한 무악학사를 지나자 캠퍼스 내 녹음이 우거진 공원이 보인다. 무악산에서 백양로 쪽으로 이어진 이곳은 바로 청송대다. 캠퍼스 커플들의 필수 데이트 코스이자, 공강 때 홀로 거닐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인 이 곳, 청송대(聽松臺)는 ‘소나무의 소리를 듣는 곳’이라는 뜻을 가졌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라는 구절은 마치 청송대 소나무의 소리를 뜻하는 것 같다.

 

 

청송대를 따라 거닐면 1920년대에 지어진 세 건물, 바로 본관, 스팀슨관, 아펜젤러관이 보인다. 우리대학교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 하지만 그 역사는 외관만큼 아름답지만은 않다. 70년대 민주항쟁에 뛰어들었던 우리 선배들의 상처가 남은 곳이기 때문이다.

 

언더우드 동상 기단의 움푹 파인 곳은 70년대 당시 총알이 스친 자국이라는 설도 있다.

 

언더우드 동상 앞에서 백양로를 바라보면 건물 하나하나, 나무 하나하나마다 선배들이 겪었을 험난한 투쟁의 아픔이 스며들어 있을 것 같다. 우리대학교 국문과 출신의 비평가인 유종호 시인의 「언제나 비가」에선 백양나무에 스민 역사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백양나무를 시간의 나무라 부른 옛 부족이 있었다
갈잎나무 잎사귀 거죽이 한밤처럼 검푸르고
뒤쪽은 대낮같이 희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부족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필시 삼세 번 멸망하고 말았으리라
나무 잎새에서 역사를 추려내는 시인 부족을
사방 오랑캐가 가만둘 리 없으므로
세상은 항상 개판이었고 역사는 언제나 비가이므로
무참한 무참한 서사이므로…
- 유종호 『언제나 비가』

 

우리대학교가 독수리를 상징하게 된 연유에는 많은 설이 존재하지만 당시 「연세춘추」 편집국장이 술자리에서 장난스레 내뱉은 말 -고려대가 호랑이를 상징한다면 우린 하늘을 나는 독수리지- 이 중앙일보에 그대로 실려 그때부터 독수리를 상징하게 됐다고도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백양로를 끝까지 걸어 정문에 다다르자 벌써 어둑어둑해진다. 이정도면 달콤한 나들이를 떠나기엔 적절했던 것 같다. 서대문형무소의 붉은 담장을 손끝으로 스치며, 3번 버스에 앉아 차창 밖으로 서대문구를 지나치며, 그리고 백양나무에 스민 선배들의 역사를 느끼며… 이젠 젊음과 패기의 상징인 신촌로터리에서 달콤한 서대문구의 여행을 마무리 질까 한다. 새내기들의 놀이터이자 대학생들의 낙원이자 연세인의 터전으로서의 신촌. 젊음의 기운이 꿈틀대는 그곳을 두고 성석제는 이렇게 말한다.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어른이 된다. 어른들은 탐욕과 폭력과 배신으로 자기들끼리의 나라를 만들려 하지만, 언제나 실패한다. 그들은 지나가는 존재일 분이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런 일이 이었다, 서울하고도 신촌에. (이하 생략) 시간도 사람도 포스터도 추억도 모두 사라지도 골조만 앙상한 ‘언젠가는’만 남는다. 그러니 인생이여, 부탁하노니, 즐겁게 춤을 추시다가 그대로 멈출 줄 알지어다.
- 성석제 『언젠가는』

 

 

글 김유빈 기자 eubini@yonsei.ac.kr
자료사진 연세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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