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 '언니'의 유리구두 한 켤레

불같이 화가 난다. 세차게 타오르는 불은 쉽게 꺼지지 않는 법.
손등에 ‘참을 인(忍)’자를 긋고 마음을 다스리려 해도, 달아오른 나의 가슴은 쉽게 안정되지 않는다.

  내 여자친구의 주위에는 ‘남자’ 친구들이 참 많다.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행사 중, 같은 과 남학생들이 실시한 인기투표에서 1위를 했을 정도이니 과 동기며, 선배며, 후배며, 그리고 초등학교 동창생까지 ‘남자’ 친구들이 따라다니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래, 애들이 예쁜 건 알아가지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애써 미소 지어 보지만, 한 쪽만 올라가는 입꼬리에 먹먹해 지는 나의 가슴 한 켠. 식을 줄 모르는 여자친구의 인기는 나에게 그리 유쾌한 일만은 아닌 듯하다.

 


  그런 내 여자친구가 오늘 친한 ‘남자’ 친구를 만난다고 한다. 물론 나 역시 친한 ‘여자’ 친구들이 있고, 그들과의 교제에 별다른 의미부여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나는 마음속으로 여자친구의 교우관계를 인정해야 한다고 소리친다. 하지만 세차게 고동치는 나의 가슴은 이성의 외침에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두근두근, 가슴 속 두근거림이 만들어낸 열기가 몸속을 차고 오른다. 길고 뜨거운 한숨을 한없이 내쉬어 보지만 달구어진 가슴은 쉽게 식으려 들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이번엔 이마에 ‘참을 인’자를 그려 본다. 하지만 이미 나에게 너그러운 마음(心)은 사라진지 오래. 내 가슴 속엔 칼날(刃)만이 시퍼렇게 번뜩이고 있다.

  ‘나는 되지만, 너는 안 된다?!’
너무 마음이 좁고 이기적이며, 남자답지 못하다고? 하지만 어쩌겠나. 나는 ‘질투의 화신’인 것을!

  나는 질투심이 많다. 물론 상대적 사고를 넘어서 상대주의라는 극단적 가치관이 만연해 있는 오늘날, ‘질투’라는 추상적 가치를 나 자신만의 잣대를 통하여 측정한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내 자신을 형용한 ‘질투의 화신’이란 말을 통하여서도 보여지듯이, ‘질투’라는 개념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는 오늘날, 질투심이 많다는 나의 고백은 어찌 보면 당돌한 도전이며, 어찌 보면 고해성사의 한 측면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어찌 보여도 나는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의 시선. 나는 남들이 모두 ‘예’라고 해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는 나만의 시각을 견지해 나갈련다. 내 질투심에 대한 고백을 필두로 하여!

  ‘질투심’은 우리가 예로부터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던 가치이다. 과거, 판단의 두 기둥이었던 ‘선과 악’이란 기준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악’으로서 당연시되던 개념이었다. 인간의 눈을 어둡게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골을 깊게 하는 악한 마음. 인간의 선한 마음을 가리는 장막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되어 온 질투심. 종교, 특히 기독교에서는 ‘십계명’의 마지막 항목인 ‘탐하지 말라’라는 격언을 통하여 ‘질투’라는 개념을 금기시해왔다. 또한 어린이들이 즐겨보는 동화책 ‘신데렐라’, ‘콩쥐팥쥐’에서는 ‘권선징악(勸善懲惡)’적 해피엔딩이 나타난다. 질투심이 많은 계모와 그의 딸에게 핍박받는 착한 주인공이 결국에는 복을 받는다는 이 결말은, 어린이들에게 질투심 대신 착한 마음씨를 가지라는 교훈을 일러주고 있다.

  동, 서양을 막론하여 나타나는 질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들. 하지만 하나의 가치관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 따라서 ‘질투’라는 가치 역시 그 고전적 틀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당시, 사회의 정설로 인정받았던 ‘천동설’은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의 도전을 통하여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었으며, 콜롬버스의 항해는 지구는 네모나다는 그 신화적 상상을 실제적 경험에 의하여 수정해내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단 하나의 절대적인 가치란 사라졌으며, 하나의 패러다임은 언제든지 다른 강력한 패러다임에 의하여 공격당하고 전복되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일반화 되었다. 우리 사회는 다양한 가치를 두루 존중하고, 또한 그것을 추구하는 사회로 변화․발전해왔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그 정당성, 당위성을 얻어 우리가 여태 경시해왔던 ‘질투’의 가치에 대하여 재조명해 보려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 정도가 어떠하든, ‘질투’의 가치를 마음속에 품고 있다. 사탕 하나와 같은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권력, 돈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 까지.
  산업, 상업의 발달과 그에 동반한 신자유주의의 팽창. 그리고 뒤이은 사회 경쟁체제와 상대주의적 사고. 이러한 배경 속, ‘필요악’으로 거듭나는 ‘질투’는, 그 강력한 손길로 사회의 유기적 매커니즘(mechanism)을 정상적으로 작동시켜 나가며,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근간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우리는 삶 속에서 이 욕망에 대해 무감각한 경우가 많다. 아니, 무감각해하는 척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욕망을 직시하지 않고 자꾸 회피하려고만 하며, 또한 욕망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고 금욕적인 마음의 정책을 펼쳐 이를 억누르려 하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욕망이란 추상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회피로서 표출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까닭은 내가 믿는 하나의 가치에 있다. ‘욕망을 통하여 삶의 목표를 정립해 나갈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 나는 우리가 어떠한 욕망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내고, 그 방향을 다잡아 나가는 과정이 삶 속에서 필수적으로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열쇠가 되는 것이 바로 ‘질투’이다.

  ‘질투’는 욕망이라는 무의식의 표면화이며 의식화이다. 무의식이라는 무인도 안에 꽁꽁 숨겨져 있는 ‘욕망’이라는 보물을 찾기 위한 실마리이다. 우리는 질투 없이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고 인지할 수 없으며, 질투라는 욕망의 편린을 통하여 그 실체를 찾아가는 과정을 끊임없이 시도해야 한다.

  나는 질투심이 많다. 나의 질투심은 나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나보다 더 나은 상황에 있는 사람에 대한 질투는 나 자신의 위치에 대한 회의를 갖게 하였고, 나의 능력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에 대한 질투는 나의 능력에 대한 의심의 마음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양면의 모습이 존재하는 법. 질투는 나에게 이 상황을 타파해야겠다는 의지와 행동의 초석이 되었고, 나보다 잘난 사람을 뛰어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으로 결국 그를 뛰어넘는 성과를 이룰 수 있게 하였다.

  인간은 동일한 잣대로 비교해 보았을 때, 언제나 자신의 이익보다는 손해를 더 크게 평가하곤 한다. 질투는 이러한 기본적 오류의 피해자이다. 다양한 가치와 생각들이 재조명을 받고 있는 지금, 질투 역시 화려한 무대 위의 주인공을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나는 우리 스스로가 질투의 앞길을 닦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난민에 대한 연민으로, 또한 우리 자신의 발전을 위한 신무기 개발의 기대감을 가지고!

  발에 맞지 않는 유리구두를 억지로라도 신으려 안간힘을 쓰는 신데렐라의 언니. 신데렐라에 대한 강한 질투심을 가지고, 왕자의 사랑을 얻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애처롭게까지 보인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어쩌면 자신의 질투심을 인정하고, 그가 가져다주는 유지를 이어받아,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혁해 나가려는 의지를 가진 이로서 ‘신데렐라 언니’의 가치를 재조명해 보아야만 하지 않을까?

 

이한솔  yond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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