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내게 말을 걸다 #1

‘사진 속 내게 말을 걸다’는 저의, 동시에 여러분의 것이기도 한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통해 현재의 자신에게 신선한 물음을 던져 보고자 합니다. 많은 이들이 ‘그 땐 그랬지’라는 한탄으로 지금과는 달랐던 현재의 모습을 씁쓸히 여기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여전히 살아 자신을 돌아보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힘든 현실에 문득 어릴 때 앨범을 꺼내 보며 미소 짓는 것처럼 글로 그려낸 어린 시절의 모습을 통하여 또 다시 훗날 아름답게 돌아볼 수 있는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사진 속 내게 말을 걸다’의 문을 엽니다.




첫사랑, ‘그런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을 사랑했던

S. Stella


꽤 인상 깊게 봤던 영화 『김종욱 찾기』에서는 배우 공유가 열연했던 ‘기준’이 ‘첫사랑 찾기 사무소’라는 이색적인 간판을 걸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수익성이 염려되는 사무소였지만 그럭저럭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사연은 각각 다양하고 때로 황당하여 웃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모든 고객들의 공통적인 점은 그들이 말했던 ‘첫사랑’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데에 있었다. 아마 현실에도 이런 사무소가 있었다면 수줍게 문을 두드릴 이들이 꽤 되지 않을까 싶다. 가장 아름다운 추억에 금이 갈까 두려워 막상 현실로 나타난 첫사랑과의 재회는 포기할지라도 말이다.


나의 소중한 첫사랑의 기억은 한창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7살의 유치원생에게서 시작된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어머니께서 좀 더 학교와 가까운 유치원을 원하셨던 탓에 나는 유치원을 옮겨야만 했다. 원래의 유치원보다 예쁘지가 않아서 마음에 안 드는 구석도 있었지만 어느덧 마음속에는 유치원에 꼭 나가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다. 어린 내가 처음으로 느껴 본 완전히 새로운 설렘, 생각만 하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 씩씩했던 내가 요조숙녀가 되었던, 왠지 모르게 가슴 한 편을 따끈따끈하게 해 준 남자 아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정말 멋있었던 그 아이는 그 때부터 나의 하나뿐인 왕자님이 되었다.
꽤 어린 나이라 그 아이와의 추억이 많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느 날 내 마음에 엄청난 갈등을 가져왔던 한 사건은 생생히 기억이 난다. 정말 적극적인 꼬마였던 나는 꼭 나의 왕자님과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하루는 다른 남자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고 있던 그 아이에게 가 귓속말로 ‘나중에 크면 나랑 결혼하자’는 수줍고도 저돌적인 프러포즈를 하였다. 아마 여기서 끝냈으면 지금의 나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을듯한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아무래도 한 번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 그 말을 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다시 가서 커서 꼭 나랑 결혼한다는 확답을 받아냈다. 웃긴 것은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일명 ‘밀당’의 개념을 어렴풋이 깨달았던 모양인지 하루에 두 번이나 그러고 나서는 내가 너무 티를 냈나 하는 생각에 괴로워했다는 점이다. 한 번 더 말할까 말까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고 결국 행동에 옮기고서는 괜히 그랬나 하고, 조금 과장하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했던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듯 순수하면서도 한 편 조숙했던 그 시절, 프러포즈하던 그 용기는 어디 갔는지 우리는 서로 전화번호도 모른 채 안녕을 했고 나는 그 이후로도 그 아이에 대해 꽤 많이 궁금해 했다. 9살 때 그 아이의 어머니께서 재롱잔치에서 발레 파트너였던 우리를 찍어 만들어주신 앨범을 간혹 꺼내 보던 기억도 나고 친구들에게 한 번 씩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내 볼에 뽀뽀해 주던 그 아이의 모습이 담긴 생일잔치 비디오도 어릴 때가 그리우면 가끔 틀어 보곤 했다. 사실 그 이후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너무도 빨리, 너무나도 우연한 기회에 첫사랑과 재회하여 새로운 사랑을 했지만 스무 살의 가슴 아픈 상처만 마음에 남았다. 7살 때의 나만큼 용기가 없었던 나는 이상하게 돌아서면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 아이 앞에서 의도치 않았던 말과 행동을 자꾸 했다. 마침내 다시 만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세상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도 나는 그 아이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가슴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가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래도 그 때의 나는 ‘그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을 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어느덧 겉으로만 어엿한 대학교 3학년생이 된 나와 주위의 많은 이들을 보니 물론 아닌 경우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지 않고 자신이 생각하는 어느 정도의 ‘그런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뜻이다. 상대적으로 어떤 사람을 오랜 시간 지켜보기 어려운 대학생의 특성도 무시할 수 없지만 외로워서, 이 정도면 됐다 싶어서 자신을 ‘사랑에 빠지게끔’ 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 그 사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대학생이 되어 처음 사귀었던 나의 전 남자친구를 떠올려 보면 나도 그런 주문을 걸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의 이상형에 가까웠던 그 아이의 많은 면이 마음에 들었고, 나를 사랑에 빠뜨렸고, 주위의 부러움을 즐겼지만 내가 정말 사랑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내면의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안녕을 고했다.
물론 이것이 아무것도 따지지 말고 누군가를 사랑해야 진정 사랑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현실적’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조건’이라는 단어는 비판적으로만 보면 세속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달리 보면 그 사람의 한 조각, 그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의미 있는 일부이기에 중요하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모든 요소가 동일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또는 어떤 부분에서 다른 이가 우월하다고 할지라도 지금의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모든 부분이 완벽하게 똑같이 자란 일란성 쌍둥이에게 각각의 배우자가 있는데 그들이 객관적으로 모든 것이 같다고 해서 배우자들이 누구와 함께 살아도 상관 없다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 사람이 가진 모든 매력적인 요소도 ‘그 사람’의 것이기에 사랑해야 한다. ‘그런 사람’ 중에 누군가를 택하는 사랑은 유일한 사랑이 아니다.
영화 ‘김종욱 찾기’에서는 ‘맨 처음 사랑만이 첫사랑은 아니다’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얼핏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지만 나는 여기에 진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이것이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하게 되더라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사랑이기에 또 다른 첫사랑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요즘 각종 커뮤니티에는 한 번도 이성을 사귀어 본 적이 없다는 의미로 ‘모태솔로’라는 단어가 많이 보인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을 사귀었던 사람들에게도 ‘첫사랑’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직은 순수한 설렘에 대한 열망이 있는 나도 오늘 ‘그런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또 다른 ‘첫사랑’을 꿈꾼다.

S. stella  yond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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