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고하는 세상, 그리고 인간

아름다움을 모르는 여자는 인생의 절반밖에 모른다 - 몽타란 부인

영국의 시인 존 키츠는『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의 마지막 구절에서 “아름다움이야말로 참이요, 참이야말로 아름다움”이라고 노래했다. 그리스의 여류시인 삽포 또한 "아름다운 것은 선하고 선한 자는 곧 아름다워진다"고 했으며, 아름다움을 뜻하는 희랍어는 kalos, 즉 선(善)이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아름다움은 착한 것, 올바르고 정상적인 것이라는 의미로 통하며 이와 관련한 많은 철학적, 미학적 연구가 이뤄졌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추함은 고전 미학과 철학에서 배제돼 왔으며 미학분야의 논의대상으로 다뤄진 것은 19세기 헤겔학파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추’를 ‘미’의 하위개념으로 여기고 독립적인 미적 범주로 다루지는 않았다.

추와 관련한 논의를 최초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카를 로젠크란츠도 추를 ‘감성형식에 부조화로 드러나는 정신의 부자유와 파열’로 보았다. 비록 추를 미적인 것과 희극적인 것의 중간 개념으로 파악한 로젠크란츠도 추를 미학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는 했지만 헤겔학파에 속하는 그 역시 추를 ‘부정적 미’로 파악하는데 그친 것이다. 그들에게 추는 미를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존립할 수 없는 보조적인 것이었다.

아름다움(美)의 화룡점정, 추(醜)

 

 

이러한 미학 개념들은 아도르노에 의해 비판받는다. 아도르노는 추를 “기존의 미개념에 의해 억압된 것, 무시된 것, 제거된 것”으로 보고 이런 것들을 회복시키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아도르노는 “추의 범주는 미의 범주 못지않게 역동적이고 필연적이며, 추한 것은 예술의 한 획을 형성하고 형성할 수 있다”고 했다. 아도르노의 관심은 추한 것을 정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변화된 의식에서 추의 의미를 재조명해 그것을 철학적 논의의 중심에 두는 것이었다.

추가 단순히 미의 대척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뷔히너의 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작품 『당통의 죽음』에서는 인간의 적나라한 추한 모습이나 사회의 부조리가 가감 없이 그대로 표출되어 있다. 작품에서는 혁명을 일으킨 동지인 로베스삐에르가 같은 동지인 당통을 죽이는 현실과 관련하여 인간의 부조리한 관계를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뷔히너는 추한 현실과 그런 추한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가능한 한 그대로 묘사했다. 아울러 인물들 간의 대화도 방언이나 하층민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이러한 그의 작품 경향은 당시 주류였던 ‘고전주의’와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19세기 초 뷔히너가 생존했던 시절은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왕정이라는 구질서가 다시 들어섰던 때였다. 현실은 감시와 탄압이 지배하던 암흑기와도 같았으며, 고전주의의 아름다운 예술로는 그런 현실을 담아낼 수가 없었다. 고전주의가 절정에 있던 18세기 말도 사실 현실사회는 어두웠지만, 독일 고전주의자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미를 통해 개혁하고자 했다.

그러나 뷔히너는 그런 미적 혁명을 거부했다. 한국뷔히너학회 최문규 회장은 “뷔히너는 현실과 인간을 아름답게 미화시켜서 개혁하려는 미적 혁명보다는 좀 더 현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주는 방식을 취했는데, 그런 점에서 뷔히너는 추한 현실에 부합하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예술’, 즉 추의 예술을 취했던 것이다”고 했다.

궁극적으로 추는 미라는 이름으로 이성의 규범 아래 억압되었던 자연적인 것이 합리적 굴레를 벗어나서 형식을 해체시키는 자유의 표현으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미학에서 이단아 역할에 그쳤던 추가 당당히 미학이라는 학문의 지평을 넓힌 것이다. 그리고 이는 뷔히너 문학을 포함, 불협화음을 주제로 한 음악 등 다양한 예술의 장르로 재탄생하게 된다.

서울대학교 미학과 신혜경 교수는 “미와 추를 미학적으로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다양한 논의가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예컨대 미가 비례나 조화와 같은 객관적인 대상의 속성이라고 한다면, 추는 비례없음이나 부조화이므로 미의 결여가 될 것이고, 그런 점에서 추는 미적 가치라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미라는 것이 좁은 의미의 이상적인 미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보는 이에게 일종의 미적인 감정, 혹은 쾌감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추 또한 미적 가치를 갖을 수 있다”고 신 교수는 말했다.

추를 통해 진정한 미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은 그리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추함을 통해 한계와 부조리에 도전하고 인간 삶의 본질과 진실된 모습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이러한 추의 미학적 가치는 1835년 뷔히너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도덕 교사가 아닙니다. 소위 이상적 시인들은 하늘색 코와 꾸민 듯한 열정을 가진 인형만을 만들어냈을 뿐입니다.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고통과 기쁨을 내가 함께 느낄 수 있는 인간, 그들의 행위와 행동이 나에게 혐오감이나 혹은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인간 말입니다…”

임미지 기자 haksuri_mj@yonsei.ac.kr
일러스트레이션 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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