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나영석 PD의 ‘리얼’한 버라이어티 이야기

“족구 한 판을 부탁드리는데.. 만약 저희가 지면, 스텝 80명 전원 입수!”
- 경남 남해편, 나영석 PD


이 남자, 기어코 일을 내고 말았다. 주변에 있던 스텝들이 놀라서 곧바로 그의 입을 막고 나서지만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다. 촬영 직후, 행여 스텝들의 원성을 사진 않았을까. “입수? 안 했잖아. 이겨서 안 했으면 된 거지, 뭐”라는, 다소 사악한 답이 돌아온다. “내 단언컨대, 오히려 이겨서 내심 속상했을 스텝들도 꽤 있을 걸.”
스텝들의 입수라니, 어느 예능 프로에서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리얼 버라이어티, 『KBS 해피선데이』‘1박2일’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특히 그 가능성은 “1박2일은 연기자 6명 뿐만 아니라 스텝 80명 모두가 만드는 프로그램”이라는 나영석PD의 철학에 의해 현실화된다. 나PD가 이끄는 1박2일에서는 이렇게 브라운관 안팎에서 연기자와 제작진, 그리고 시청자 모두가 주역이 된다. 쇼와 현실의 벽을 허물며 예능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나영석 동문(행정·94)을 만났다.



음지에 깃든 한줄기 빛


이제 일요일 저녁이면 ‘안 됩니다’, ‘땡’, ‘실패’ 3단 콤보를 무작위로 발포하는 나PD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정겨울 따름이다. 연이은 방송 출연에 ‘나요미’, ‘나초딩’ 등 귀여운 별명까지 얻었다고. 특히 요즘에는 프로그램의 적재적소에서 등장, 빛나는 예능감으로 재기를 발휘하니 그의 인기가 연예인 못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나PD는 스스로에 대해 외려 “음의 기운이 겉도는”이라고 형용한다. 강호동, 이수근 등 내로라하는 개그맨들을 쥐락펴락하는 그가 본래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게 잘 상상이 되지 않는데, 그 ‘음의 기운’의 방증은 우리대학교 재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충청북도 청주 토박이 출신으로 난생 처음 밟은 서울 땅. 당시 나PD는 대학교에서 빚어낼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꿈꿔왔던 대학의 낭만은 현실 속에서 빛을 잃었다. 지루한 대학생활에 일찌감치 실망했고, 유난히 내성적인 성격 탓에 적응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왜 어딜 가나 항상 어둡고 주변에 겉도는 그런 사람이 있잖아, 오티나 응원할 때 한창 절정일 때면 쓰윽 사라지는, 내가 그런 어둠의 아이였어.” 그런데 그렇게 숨어 들어간 음지에도 한줄기 빛이 있었으니, 바로 사과대 연극 동아리 ‘토굴’이다. 그는 “무엇보다 어두침침한 분위기가 나한테 딱 맞더라”라며 그때의 기억을 더듬었다. 이후 대본을 쓰고, 연출을 하고, 또 직접 출연까지 하며 연극반 활동에 재미를 들였다고 했다. 나PD는 “처음에는 그저 좋아하던 여자친구 때문에 열심이었는데, 돌이켜보니 대학 4년 내내 한 게 그거밖에 없었다”며 연극반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를 계기로 군 제대 후 진로에 대해 고민하다가 행정학도로서의 전공을 포기하고, 좋아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시작한다.





처음엔 작가를 생각했다. 연극대본도 써봤겠다, 옛날부터 개그 프로그램도 좋아했고 또 나름대로 개그감이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있게 어느 시트콤 신진작가에 공모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빌려 ‘믿을 수 없게도’,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또, 연극반 선배의 제안으로 영화 연출에 뛰어들기도 했지만, “어느 날 출근을 하니 회사가 문을 닫고 없어진” 황당한 일을 겪기도 했다. 그렇게 방황하던 끝에 만난 KBS PD시험. 잇다른 좌절에 별 기대를 걸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뜻밖에도 합격통지를 받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천운이지 않았을까.”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당시 얼떨떨한 심경이 전해지는 듯했다.


“미친 척 떠난 여행도 추억이 되거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입사한 KBS 예능국에서 나PD는 ‘드림팀’, ‘스타골든벨’, ‘여걸식스’ 등의 조연출을 맡았다. 그런데 이전 연출작과 지금의 1박 2일은 전혀 다른 색깔이다. 기획 배경을 묻자, 일단 “아무거나 해본 건데 얻어걸린 거지 뭐”라는, 예능 PD다운 재미진 답변이 돌아온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포맷이긴 해. 대학 때 동기와 술에 만취해서 충동적으로 경포대에 갔다가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돌아왔거든. 바다도 일출도 구경하지도 못했는데, 기차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가던 기억이라든지 바닷가에 누웠을 때 느껴지던 모래의 감촉, 여고생들의 시끄러운 소란으로 잠에서 깬 그 느낌이 정말 희한하게도 내 머릿속에 아직까지 선명히 박혀있더라고. 그 어떤 여행보다도 더 선명하게. 무엇보다 예고 없이 흥에 받쳐 떠난 여행이라 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렇게 나PD는 대학시절 돌발여행에서 모티브를 얻었고, 그 설렘과 여운을 연기자들에게 그리고 시청자들에게도 온전히 전해주고 있다.
이처럼 그가 추억을 되새기며 시작한 즉흥여행도 어느덧 3년차다. 그리고 그 3년동안 나PD는 한결같았다. 그는 “이쯤이면 자칫 포맷이 지루해질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지. 그런데 기본 포맷을 바꿔가며 연명시킬 건지, 초심을 잃지 않고 기본에 충실할 건지 선택해야 할 기로에서, 내가 생각하는 답은 후자야”라고 밝혔다. “그래서 (프로그램의)자연스런 생로병사를 즐겨볼 생각이야. 다만 아름답게 막을 내릴 때까지 열심히 해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을 뿐”


대세는 그의 ‘리얼’한 버라이어티



1박2일이 40%라는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하며 흥행하자, 유사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며 ‘리얼 버라이어티 시대’가 열렸다. 이 중, 나PD가 단연 그 선구자로 손꼽혔던 가운데, 최근에는 ‘나는 가수다’라는 강적이 등장하며 화제의 중심에서 빗겨선 것도 사실이다. 나PD는 “시원섭섭하지만 이전까지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켜야 했기 때문에 부담이 됐다면, 이제부터 조금은 짐을 내려놓고 마음 편히 프로그램을 할 수 있는 계기로 생각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래서일까. 세간의 관심이 분산되는 이 시점에서 그는 시청률에 불안해하기보다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새로운 계획들을 조심히 풀어갈 생각이다. 예를 들면 여배우나 남자조연배우들 특집 등 실험적인 기획을 통해 연기자들의 진솔한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라고 한다. 진솔함. 이것이 가능한 것은 1박2일이 이제는 단순한 쇼를 넘어서, 연기자들이 화면 안팎에서 맺는 관계와 겪는 감정들을 여과 없이 전달하는 ‘리얼’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계속될 그의 치명적인 매력

나PD는 1박2일이 끝난다면 요리를 주제로 작은 심야 요일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가 여행 프로그램에 멋진 풍경과 따듯한 인간미, 유쾌한 인연까지 담아내며 진화시킨 것처럼, 요리와 음식 이야기는 그의 손에서 또 어떤 모습으로 발전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크다.
어느덧 카메라 뒤에 선 지 10년차, 하지만 그는 1박2일이 그러하듯, 초지일관 뚝심을 발휘한다. “사람이 쉽게 바뀌진 않더라. 여전히 나는 음의 기운이 감돌고 낯을 많이 가리며,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조금 익숙해진 것 빼곤 그대로”라는 게 그의 말이다. 하지만 직접 만나본 나PD는 “스텝 전원 입수!”를 굳세게 외치던 화면에서처럼, 진지한 얼굴로 큰 웃음을 선사하고 천진한 얼굴로 사람을 들었다놨다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가진 ‘음의 기운’을 굳이 말하자면, 나PD가 가진 가능성의 집합체 정도가 아닐까. 이 남자의 말 한마디는 80여 명의 예능인을 뒤흔들고, 그 전류가 수백만 시청자들까지 설레게 하는, 기묘한 매력이 있다.


이영빈 기자 yblee90@yonei.ac.kr
사진 유승오 기자 steven103@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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