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난 너무 외롭거든. 특히 일이 잘 안 풀리고 말할 상대도 하나 없을 때면 말이오. 다시는 하나도 팔지 못하고 당신이나 아이들 생계를 책임지지도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단 말이지.”

희곡『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윌리 로먼이 말한다. 그는 극 중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세일즈맨이다. 그러나 그는 판매에 뛰어난 능력을 보이지는 못한다. 그저 아등바등 돈을 벌어 집과 차를 유지하는 평범한 미국 중산층의 가장이다. 그런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을 열심히 해서 주택 할부금도 다 갚고, 아들들도 좋은 대학 보내 성공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이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윌리 로먼은 능력이 부족하지만 오늘도 열심히 일한다. “노동은 미래를 보장해준다. 놀지 말자”는 신념으로.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대부분 윌리 로먼과 같이 살아가고 있다. 노동을 통해 우리는 그 대가를 지불받고 그것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을 하지 않는 것, 소위 ‘논다’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아주대 사회학과 노명우 교수는 “화투놀이, 마작놀이 등 도박도 일종의 놀이라고 불리고 있다”며 “결국 논다는 말에는 게으르다, 부도덕하다는 뜻도 포함돼 있다”고 전했다.

그런데 이렇게 노는 것을 싫어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14세기 아날 학파의 엠마뉘엘 라뒤리는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의 저서인 『몽타이유』를 보면 당시 남프랑스 중세마을의 평민은 일주일에 나흘만, 하루에 세 네 시간 일했다고 한다. 주말은 당연히 쉬는 것이었고 월요일도 ‘블루 먼데이’로, 쉬는 날이었다. 대장장이는 일하다가도 포도주를 마시고 친구들과 잡담을 하면서 근무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프랑스 노동사회학자 보방에 따르면 이처럼 노동과 놀이가 뒤섞여 있는 사회는 1700년 경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태동하면서 놀이는 점차 노동에서 분리되기 시작했다. 자본가는 대장장이의 노동력을 구매하면서 보다 많은 일을 하길 요구했고, 의회는 ‘빈민구제법’을 만들었다. 이 빈민구제법은 노동을 하지 않으면 노예가 되는 제도이다. 사람들은 이 법에 따라 공장으로 들어가 일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열심히 일해 부를 쌓는 것이 신의 은총이라는 청교도 윤리가 사회 전체에 점차 스며들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점차 예전에 놀면서 일하던 문화를 잊어버리고 논다는 의미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노 교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젖어 사는 사람들은 ‘진짜 논다’는 의미를 잊어버리고 있다”며 “논다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했다. 사실 사람들은 이미 삶 속에서 자신이 놀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철학자 가다머는 ‘놀이는 예술’이라고 정의했다. 놀이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인간이 자유롭게 행동하면서 긴장과 이완사이를 오가는 활동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축제에선 우리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긴장도 되지만 즐거움에 이완도 된다. 노 교수는 이러한 가다머의 의견에 덧붙여 “연애도 하나의 놀이”라고 했다. 남녀가 자유롭게 연애를 하면서 불안과 기쁨 사이를 오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놀이 안에서 삶의 원동력을 얻는다. 

이처럼 ‘놀이’에 대한 폭넓은 의미는 놀이를 노동의 반대어로만 본 우리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고 있다. 점차 단조로운 일상이 돼가는 오늘날의 노동에 있어서 놀이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맹목적인 경쟁만이 있는 노동에서 우리는 윌리 로먼이 된다.

프랑스 시인 발레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난 몇 세기 동안 공업화 과정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공상하는 능력을 상실해왔다. 인간은 본래 노동하고 사색하는 존재지만, 동시에 놀이하는 존재다”

임서연 기자 guiyoomi@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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